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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기피신청, 서류 전수조사…재판 지연 작전 ‘성공적’

등록 2019-06-23 09:12수정 2019-08-19 14:45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제 속도 못내는 재판

“재판장이 유죄 예단한다”며
임종헌, 재판부 기피신청 내
재판에 브레이크 거는데 성공

양승태 “검찰이 다르게 출력 가능”
문서 파일과 종이 문서 수천 쪽
폰트, 음영 등 일일이 대조 중

사법농단 사태 다른 재판부도 영향
“트집 안 잡히려다 재판 늘어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월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월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의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재판장은 처음부터 피고인의 방어권, 공정한 재판 진행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겠다는 지상목표를 미리 설정해놓고 이를 추구하는 모습만을 보여줬습니다.”

사법농단 연루 의혹으로 재판을 받는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법원에 제출한 ‘법관 기피사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지난 2일 법원 쪽에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형사소송법(18조)을 보면, 피고인은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을 때 ‘이 판사를 피해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신청할 수 있게 돼 있다. 피고인이 기피신청을 내면 해당 재판은 일단 중단되고, 재판이 중단된 날짜는 구속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기피신청은 신청도 흔하지 않고, 받아들여지기도 쉽지 않다. 2008~2017년 동안 민·형사 재판에서 판사 제척·기피·회피 신청이 접수된 6496건 중 수용된 건 고작 5건(0.07%)에 그친다.(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실 자료) 피고인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은데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재판부에 밉보이기만 할 수 있어, 일반적으로 기피신청을 기피한다. 하지만 임 전 차장의 선택은 달랐다.

기약 없는 임종헌 재판

임 전 차장이 낸 기피사유서는 참고 자료를 포함해 모두 106쪽에 달한다. 그는 세 명의 판사로 이뤄진 합의부에서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만 콕 찍어 문제를 제기했다. 핵심 주장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가 재판을 무리하게 진행하고 증인신문 일정까지 촉박하게 잡아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재판장이 유죄의 예단을 강하게 드러내고 소송지휘권을 남용하거나 불공정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미 재판 과정에서도 임 전 차장 쪽은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지난 4월24일 재판 때 임 전 차장의 변호인은 서류증거 조사와 해당 서류증거를 작성한 증인신문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 일정이 너무 빡빡합니다. 증인신문 준비하느라 (앞서 봤던 서류증거 내용을) 다 까먹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문건이에요.”(임 전 차장 변호인)

“재판부 입장에서는 준비하실 수 있는 데까지…”(윤종섭 부장판사)

“준비 못 한 상태에서 할 수 있긴 하죠. 그게 재판부가 바라는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판부가 바라는 상황은 아닙니다.”

언쟁 끝에 잠시 휴정한 뒤 임 전 차장 쪽 변호인은 재판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1월 집중심리주의에 따라 재판부는 일주일에 네 차례 재판을 열겠다고 했다. 하지만 임 전 차장 변호인단 11명이 반발해 집단 사임하면서 그 계획은 수정됐다. 일주일에 1~3회 재판을 여는데, 첫 정식재판부터 12주 동안 주 3회 재판이 열린 건 5주에 불과했다.

임 전 차장의 기피신청에 대한 판단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손동환)가 맡았다. 하지만 한 달이 가까워져 오도록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임 전 차장은 항고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재판 휴지기’는 더 길어질 수 있다. 변호인 집단 사임에 이어, 기피신청까지 임 전 차장이 재판에 건 두 번의 ‘브레이크’ 시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이 언제 다시 열릴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다른 그림을 찾아라?

임 전 차장 재판이 ‘개점휴업’ 상태라면, 양승태(71) 전 대법원장 재판은 제자리걸음 중이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등 세 피고인과 검찰 양쪽은 지난 14일부터 일부 서류증거를 사실상 ‘전수조사’하고 있다. 이 문건들은 임종헌 전 차장의 유에스비(USB)에서 나온 것으로 그 개수는 1142개에 달한다. 쪽수 기준으로는 적어도 수천장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박병대 전 처장 변호인은 컴퓨터 파일을 출력해 “검사가 증거로 제출할 때 문건 내용을 다르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 두 피고인 쪽이 적극 동조했다.

검찰은 문건 작성자들이 증인으로 나올 테니, 증인신문 때 “본인이 작성한 문건이 맞나” 물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는 전수조사를 선택했다. 일부만 검증할 경우 피고인이 추후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증거에 문제 제기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틀린 그림 찾기’가 펼쳐졌다.

검증은 검찰이 서울중앙지법 법정 스크린에 컴퓨터 파일을 띄워서 마우스 스크롤로 문건을 넘기면 재판부와 변호인이 손에 든 종이 문서와 스크린 화면을 대조하며 차이점을 찾아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문건 이름을 설명하고, 차이점을 찾고,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과정이 오전 10시부터 늦으면 저녁 9시20분까지 온종일 이어졌다. 지난 18일에는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서울중앙지법 주요 형사사건 현황(대외비)’ 문건의 글자체가 문제가 됐다.

“컴퓨터 파일 본문의 글자체는 나눔고딕체이고요, 출력물 글자체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검찰은 이유를 설명해주세요.”(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이 파일을 열어본 컴퓨터에 해당 폰트가 부족해서 파일을 출력했을 때 폰트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 나타난 현상입니다.”(검찰)

간혹 가다 문서 특정 부분에 음영을 칠할 수 있는,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의 형광펜 기능이 쟁점이 되기도 했다. 지난 19일에 검증한 ‘정운호 법조비리 관련 리스크 현실화에 대한 대응’ 문건이 그랬다.

“출력물 5쪽입니다. 특정 부분이 컴퓨터 파일과 달리 (출력 문서에는) 하이라이트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출력했을 때 음영 표시는 인쇄가 안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검찰)

지금까지 확인한 ‘틀린 그림’은 주로 글자체, 쪽수, 음영, 간인(인장) 등이다. 글자체(폰트)가 없어서 다른 글자체로 뜨거나, 흐릿하게 인쇄되거나, 컴퓨터 설정이 달라서 발생한 편집상 오류였다. 외형상 차이가 있어도 내용은 동일하다는 사실을 재판장이 ‘확인’해주는 과정이 반복됐다. 한 문건당 검증은 3~5분을 넘기지 않았지만 문건 양이 많다 보니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하루에 7시간 내내 살펴봐도 전체 문건의 15% 정도만 살펴볼 수 있었다. 이틀로 예고했던 검증 기일은 이미 4일(14일, 18일, 19일, 21일)이 지났지만, 전체 문건의 절반 정도를 조사하는데 그쳤다.

물론 유에스비(USB) 출력물 외에,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실물 압수물, 외교부 압수물 등도 있다. 검찰 설명에 따르면, 전체 증거(11800개)의 5%를 검증하는 데 21일까지 재판을 4차례 열었으니, 이런 식이라면 본안도 다투기 전에 산술적으로 80회, 40주 동안 검증 작업을 해야 한다. 피고인들은 주요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양승태 석방 눈 앞으로

‘개점휴업’ 상태인 임 전 차장의 재판이 ‘사법농단 사태’를 심리하는 다른 재판부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범 관계의 피고인들을 재판하는 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증거 검증 절차는 필요하면 밟을 수도 있지만 불필요한 주장은 제때 쳐내야 주요 쟁점을 집중 심리할 수 있다. 옆 재판부가 기피신청까지 당하다 보니, 다른 재판부들도 공정성에 티끌이라도 트집 잡힐 일 만들지 않으려다보니 재판이 진행이 예상보다 늘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박남천 재판장은 법원 휴정기를 앞두고 그에 맞춰 재판을 잠시 쉬어갈 의사가 있는지 검찰과 피고인 양쪽의 의사를 물어본 상태다. 각급 법원은 보통 7월 말부터 일정 기간 재판을 열지 않는 여름 휴정기를 둔다. 7월29일부터 8월9일까지 서울중앙지법 휴정기가 끝나면, 바로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기간 만료일(8월10일)이다. 그의 석방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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