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화면을 보시면, 서울고등법원 행정항소 사건 ‘배당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무분담, 재판부별 코드, 총 배당 건수 등을 말합니다. 지금 보는 화면이 검사가 (대법원)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로그 기록을 증인이 그대로 옮겨놓은 것 맞습니까.”(검찰)
“네, 맞습니다.”(배당 프로그램 개발자)
“잠깐만요, 사무분담에 따른 배당이 어떻게 된다는 건지, 재판부 코드는 무엇을 뜻하는지 하나씩 설명해주시겠습니까.”(재판장)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가 검사와 증인의 질의응답을 잠시 멈춰 세웠다. 2015년 통합진보당(통진당)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 배당에 법원행정처의 의중을 관철시켰다는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현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부장판사)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검찰은 배당 프로그램 개발자 박아무개씨를 증인으로 불렀다. 배당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남아 있는 로그 기록으로 배당 과정을 다시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배당룰, 재판부 코드, 로그 기록, 채번, 랜덤함수 등 생소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이날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는 “자세히 설명을 해줘야 듣는 사람도 이해를 할 수 있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을 구했다.
‘1호 기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재판만이 사법농단 사건의 전부는 아니다. 양 전 대법원장, 임 전 차장 등과 공모 관계로 묶여 ‘실무자’ 노릇을 담당했다는 전·현직 판사 10명이 홀로, 또 같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서울중앙지법의 형사합의 재판부 5곳이 각기 따로 심리한다. 그중 심 전 원장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현 서울고법 부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현 대전지법 부장)와 함께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 심리로 재판을 받고 있다. 주요 혐의만 8가지다. 이날 첫 정식재판의 쟁점은 ‘배당’이다.
배당은 사건을 재판부에 나누어주는 절차를 말한다. 사건은 재판장 협의가 필요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몇 가지 원칙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배당 프로그램에 의해 ‘전자 배당’된다. 이를 흔히 재판 독립의 시작점으로 보기에 사건을 배당받는 것이 일상인 재판부마저도 예측불가능성, 업무형평성과 같은 대원칙 말고는 배당 프로그램의 구체적 작동 원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재판부가 배당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이유다.
배당 과정에 특정 의도를 반영시키는 것 자체가 재판 독립 침해, 재판 개입의 한 유형이다. 재판부에 손을 뻗어 어렵게 결론을 수정하려 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재판부에 사건을 ‘꽂아주면’ 추후 절차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배당 조작’은 가장 유혹적인, 또한 매우 위험한 재판 개입의 한 형태로, 배당 프로그램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경계의 대상이 된다.
이규진 업무수첩에서 발견된 사건번호
통진당 행정소송 항소심 배당 조작 의혹은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의 업무수첩에서 비롯됐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의 업무수첩에서 통진당 행정소송의 항소심 사건번호(2015누68460)를 발견했다. 사건이 항소심 재판부에 배당되기 며칠 전(12월1일)에 적힌 것이었다. 전자 배당의 경우 사건번호는 배당 과정에서 생성된다. 배당하기 전에 사건번호가 생성돼 있었다면 ‘배당 조작’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건은 4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진당 소속 의원들은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에도 국회의원 지위는 유지돼야 한다는 행정소송을 냈지만 2015년 11월 “헌재의 결론을 법원이 다시 판단할 수 없다”는 취지로 1심에서 각하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 사법기관의 위상을 두고 헌재와 줄다리기를 하던 대법원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이었다. 항소심 판결은 달라져야 했다. 당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은 이민걸 전 기조실장과 친분이 있는 김광태 서울고법 부장판사(당시 서울고법 행정6부 재판장)에게 항소심 사건을 맡기려 했다. 이에 관련 예규(법관 등의 사무분담 및 사건 배당에 관한 예규)에 따라 사건 배당을 주관하는 심상철 당시 서울고법원장이 이러한 지시를 하달받아 실행으로 옮겼다는 게 검찰 시각이다. 심 전 원장이 사건번호를 부여하는 ‘채번’을 실무자에게 지시해, 특정 재판부가 특정 사건을 배당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행정6부에 배당됐지만 인사이동이 이뤄지면서 다른 판사가 판결했다. 심 전 원장 쪽은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과거 로그 기록과 당시 행정과장 최아무개씨, 배당담당 사무관 오아무개씨 등의 증언을 종합해봤을 때, 항소심 사건이 배당된 2015년 12월3~4일 통상의 업무 패턴과는 다른 정황이 여럿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통진당 사건이 통상적 절차를 밟았다면 사건번호 ‘2015누68545’를 부여받아야 했는데 △2심 법원으로 사건 기록이 전달되기도 전에 이미 ‘2015누68460’으로 사건번호가 별도로 채번돼 있었다. 또 △이 사건만 배당 결재·실행이 지연되면서 결과적으로 행정6부가 재판을 맡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동 배당 프로그램으로 사건이 행정6부로 배당될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고 검찰은 본다. 배당 프로그램 개발자 박씨는 “전전날까지 (로그 기록을) 다 봤는데, 보통 그냥 사건을 분류 다 하고 결재 올리는 식이었는데 이날은 좀 특이하긴 했다”고 검찰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2014년 당시 의원직을 상실한 이상규 민중당 대표가 지난해 9월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동문 앞에서 열린 ‘사법적폐 청산 문화제’에 참석해 사법부 적폐청산을 촉구하며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2009년 신영철 파동의 교훈
‘배당 의혹’은 사법농단 사태의 한 축이다. 2012년 8월 박병대 전 처장이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세금 포탈 혐의로 기소된 대학 후배의 재판 청탁을 들어줬다는 혐의도 있다. 검찰은 박 전 처장의 후배가 자신의 사건이 대법원 판단을 받게 되자 “저의 사건, 형님네 재판부로 배당되면 안 돼요?”라는 ‘배당 청탁’을 했다고 본다. 검찰은 이런 후배의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후배 사건은 실제로 박 전 처장이 속한 대법원 제1부에 배당됐다. 박 전 차장은 후배 사건임에도 재판을 회피하지 않았고 대법원 제1부는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대학 후배의 청탁으로 박 전 처장이 ‘배당 조작’을 했는지 여부는 앞으로 재판에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세월호 참사 가해자에 대한 재판도 있다. 2014년 5월7일 작성된 법원행정처의 문건 ‘세월호 사건의 적정 관할 법원 및 담당재판부 검토’를 살펴보면, 신광렬 당시 인천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 설치를 고민한 정황이 나온다. 실제 실행되지는 않아 세월호 사건은 인천지법이 아닌 광주지법이 맡았다. 신 부장판사는 ‘영장 기밀 유출’ 등 사법농단 연루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배당 논란’이 사실로 밝혀지면 법원으로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10년 전인 2009년 사법부는 배당 조작 의혹으로 이미 진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해 2월 대법관으로 임명된 신영철 대법관이 2008년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 시민들에 관한 ‘촛불 재판’ 배당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 대법원 진상조사단은 “재판 내용과 진행에 관여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고 발표했다. 신영철 당시 대법관 탄핵은 유야무야됐지만, 더욱 강화된 배당 원칙이 유산으로 남았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번 사태로 공정성을 보장한다는 전자 배당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 인적 청산을 하지 못하고 넘어간 2009년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