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한 어학원. ‘토익기숙학원’으로 알려진 이 학원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수업과 자습시간을 병행하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강사가 토익 문제를 설명하는 모습.
▶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20대 때 열심히 했던 일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그중의 하나로 토익을 꼽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지금의 대학생도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치열해졌을지 모른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시대, ‘취확행’(취업이 확실한 행복)을 외치며, 하루 14시간씩 토익 공부를 시키는 기숙학원에서 여름을 보내는 이들과 하루를 보냈다.
올해 대전의 한 대학교에 입학한 조아무개(19)씨는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한 토익기숙학원에 등록했다. 그는 한달째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요일을 제외하곤 하루 14시간을 토익만 공부한다. 이 학원을 알게 된 건 친척 형으로부터다. 그 형이 이곳에서 공부한 뒤 점수를 수백점 올렸다는 말을 듣고, 조씨는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을 여기에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학원과 집이 멀어 학원 근처에 원룸을 얻었다. 두달치 학원비 125만원과 원룸 비용 80여만원(한달 40여만원)은 부모님이 지원한다. 조씨는 “교환학생도 가고 싶고, 군대도 카투사로 지원하고 싶은데, 모두 토익 점수가 뒷받침이 돼야 한다”며 “더 나은 대학 생활을 위해 1학년 때 확실히 토익 점수를 따놓을 것”이라고 했다.
수도권 기온이 낮 37도까지 올라간 지난 6일, 조씨는 학원에 가기 위해 아침 7시30분께 원룸을 나섰다. 8시, 학원에 도착하자 휴대폰을 관리실에 반납하고 자습을 시작한다. 매일 9시에 치르는 단어시험에 대비해 한시간 동안 토익 빈출 표현을 외워야 한다.
성인들이 왜 기숙학원 찾나
강의실에 들어서자 진지한 표정으로 자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는 여러번 밑줄을 그어 너덜너덜해진 문제집과 초콜릿 봉지 따위가 헝클어져 있었다. 강의는 하루 6시간씩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습을 한다.
통번역학과로 편입을 준비하는 신아무개(25)씨는 990점 만점이 목표다. “전체 200문제에서 아주 조금 틀려야 만점이 나오는데 모의고사를 풀어서 목표치보다 많이 틀리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학원에서는 매주 모의고사를 실시하는데 수강생들 점수에 순위를 매겨 복도에 붙인다. 신씨는 “토익기숙학원에 들어간다고 하니 집안 어른들은 ‘토익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셨지만, 주변 친구들은 다 이해한다. 점수가 필요한 절실함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원 종강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이달 말에 목표를 이루고 피시방에 가서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실컷 하는 게 꿈이다.”
이 학원의 생활규칙은 엄격하다. 만약 늦게 일어나 지각을 하거나 단어 시험을 빼먹으면 3천원에서 1만원가량의 벌금을 내야 한다. 옆자리 수강생과 대화를 해서도 안 된다. 강의실 칠판엔 “잡담 5천원” “엎드려 잠 3천원” “원내에서 학생 간 대화 시 즉시 페널티”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음주는 물론 연애나 사랑 고백도 금지돼 있다. 수강생들끼리도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만 부르도록 한다. 밤 10시 이후 하원할 때 반드시 학원 조교에게 보고 문자를 보내야 한다. 숙소는 학원 근처의 고시텔(고시원), 원룸 등을 이용한다. 집이 가까우면 통학을 할 수도 있다. 외출, 조퇴, 결석 등으로 일정에 빠질 때는 사유서를 내고 승인을 받는다. 수강생들은 개강날 학원에 등록할 때 모든 규칙을 따르기로 서약서를 썼다.
‘토익기숙학원’으로 알려진 이 어학원의 강의실 칠판에 생활수칙과 벌금이 쓰여 있다. ‘엎드려 잠 3천원’ ‘잡담 5천원’.
“영어는 리듬이에요. 이 문장 리듬이 죽이죠? 다 같이 노래처럼 반복해서 따라 해봐요.”(리스닝 강사) 오전 11시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강사가 “EZ Yum is a wholesome treat that will help you feel full and satisfied”(이지얌은 포만감과 만족감을 선사해 줄 건강한 간식입니다)라는 영어 문장을 노랫말처럼 리듬에 맞춰 읽자 학생들이 따라 한다. 30명 남짓의 수강생은 오는 11일 치러질 385회 토익시험을 위해 막바지 학습에 속도를 올렸다.
리스닝(L/C) 수업 3시간, 리딩(R/C) 수업 3시간, 청취력 강화 훈련 1시간, 독해력 강화 훈련 1시간, 숙제와 예·복습, 단어시험, 모의고사, 수준별 진단과 처방…. 계속되는 일정에 식사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오로지 공부, 공부다. “‘respect’(존경)로 가득 차면 어때요? 공손해지죠. 그래서 ‘respectful’은 뭐다? ‘공손한’이에요. 그럼 ‘respective’는 뭘까. 존경하면 각각 잘 대접해주고 싶어지니까 ‘각각의’란 뜻이 되죠. 단어는 이렇게 외우는 거예요.” 하루에 수백개의 단어를 외우는 학생들은 리딩 강사의 설명을 문제집에 꼼꼼히 적고 별표를 치며 달달 외웠다.
수강생 상당수는 20대 초중반인 대학 2·3학년생이다. 취업 준비의 최전선에 있는 대학 4학년은 의외로 적다. 요즘은 조씨가 준비하는 교환학생이나 카투사, 신씨가 준비하는 편입처럼 또다른 ‘스펙’을 쌓기 위해 토익 점수를 한발 앞서 준비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간혹 승진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30대, 60살이 넘었지만 영어 실력을 갈고닦기를 원하는 어르신 등이 학원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고 학원 쪽은 설명했다. 기숙학원에 입소하는 수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다. 충남 홍성군에서 대학을 다니는 3학년생 김아무개(28)씨는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혼자 몇 시간 해서는 토익 점수가 쉽게 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방학 두달간 완전히 몰입해서 바짝 점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학을 전공한다는 김씨는 “학기 중엔 전공과목 공부가 힘들어서 도저히 토익 공부를 할 수가 없는데, 취업할 땐 병원에 높은 점수를 내야 한다. 경쟁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800대 후반 이상을 받기 때문에 나도 그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학원 주변엔 7~8개의 고시원이 있다. 학원이 주변 식당과 숙소를 안내하면 학생이 선택하는 식이다. 학원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ㄱ고시원은 좁은 화장실이 딸린 2평짜리 방에 침대, 미니 냉장고, 작은 수납장, 에어컨 등을 놓고 37만~40만원의 월세를 받고 있다. 지난 7월 기숙학원에 등록한 뒤 월 24만원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대학 3학년생 김아무개(22)씨는 “밤 10시에 숙소에 가면 바로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학원에 온다. 딱 잠만 자고 나오니까 불편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다”고 했다.
어학원 근처에 있는 고시텔의 방. 매일 밤 10시에 귀가한 수강생은 잠만 자고 아침 8시까지 학원으로 간다.
방학 때가 되면 주변 식당가는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학원으로부터 10분 정도 떨어진 한 한식뷔페 식당은 5천원에 한끼를 제공한다. 노량진 고시촌에 있는 고시식당처럼 여러 반찬을 뷔페 형식으로 차려놓으면 수강생들이 떠다 먹는다. 이 식당은 약 2년 반 전부터 학원과 연계해 운영하고 있다.
대학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토익 공부에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학원 관계자는 “이런 (스파르타) 방식의 학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학생 한명 한명에게는 (토익 점수가) 인생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토익으로 인생이 바뀐다. 원하는 직업을 갖느냐 못 갖느냐가 결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토익 열풍 한풀 꺾이긴 했지만
1982년 한국에서 첫 시험이 시작된 토익은 1990년대 이후 대졸 신입사원 채용 때 대기업들이 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됐다. 입사 뒤에도 승진, 연수선발 등 인사 기준으로 활용됐다. 최근에는 공무원 시험의 영어 과목이 토익을 비롯한 사설 검정기관의 점수로 대체됐다. 2017년부터 7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에서, 2021년부터는 7급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서 사설 검정기관의 영어 점수가 필요하다. 토익의 경우 700점(외교영사직 790점) 이상의 성적표를 받아야 7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한 어학원의 토익 강사는 “토플, 아이엘츠, 텝스 등 다른 영어시험은 대학원이나 유학 등을 준비할 때 필요하고, 일반적으로 취업에 도전할 때는 토익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토익을 시행하는 160여 나라 가운데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아시아 국가들의 토익 응시자 수는 일본, 한국, 대만 차례로 많다.
토익의 문제 난이도는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실제 상황에 맞는 지문을 출제한다며 2006년과 2016년에 두 차례 문제 유형을 개정했다. 2006년 개정 때 독해 지문 길이를 늘렸고, 미국 발음뿐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발음을 추가했다. 요즘엔 영어 커뮤니케이션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다며 휴대폰 메신저를 통해 대화하는 내용이 지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휴대폰 모양 지문에 ‘카카오톡’ 대화 같은 두 사람의 문자메시지가 번갈아 나오고 중후반쯤 나온 표현에 밑줄을 그어 “○○씨가 여기서 ‘△△△’이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지 고르시오” 같은 문제가 나온다.
하지만 취업 시장에서 영어 점수 하나로 무한 경쟁을 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엄격한 생활규칙을 지켜가며 토익 점수를 올리려는 기숙학원 수강생들의 수도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개원한 지 10년 됐다는 이 학원 관계자는 “옛날엔 800점 이상 고득점을 하고도 900점을 넘기기 위해 다시 학원을 찾았지만 요즘은 그렇게까지 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기초가 안 잡힌 학생들이 500점대에서 700~800점으로 올리는 데 이런 집중 교육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아침 8시 등원 후 휴대폰을 반납한다.
기업들도 현업에 필요한 영어 실력 검증을 위해 영어면접을 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표형종 한국커리어개발원 대표는 “토익 800점과 900점은 점수 차이는 크지만 그것이 실무 역량 차이와 직결되진 않는다. 취업 시장에서 토익은 최소한의 기본 요건으로서 갖추는 것이거나 교환학생 등 다른 경험을 쌓기 위한 밑바탕이 될 뿐이다. 영어가 필수인 해외영업직을 뽑을 때는 기업에서 영어면접을 한다”고 말했다.
실제 토익은 응시자 수가 줄고 있다. 와이비엠(YBM)한국토익위원회가 밝힌 토익 응시인원 추이를 보면, 첫해인 1982년 504명으로 시작해 2000년대 중반께 100만명을 돌파한 뒤 2012년 208만5874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 뒤 계속 하락해 올해는 180만명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2007년부터 선보인 말하기 시험 ‘토익 스피킹’ 역시 2013년 30만여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고 올해 25만여명(예상치)으로 다소 줄었다.
정성원 한국취업코칭협회 컨설턴트는 “취업 시장에서 토익 점수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취업준비생들 입장에선 불안하기 때문에 점수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작은 요소 하나로 합격과 불합격이 나뉘는 취업 시장인 만큼, 취준생 입장에선 ‘경쟁자들이 고득점 성적표를 갖고 있는데 나만 없으면 어떻게 하나’ ‘채용 때 토익 점수를 안 본다고 하는 기업도 정말로 반영이 안 될까’ 싶은 불안감이 크다”고 설명했다.
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