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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의 ‘#오빠 미투’, 남편에게 고백했어요

등록 2019-08-26 13:58수정 2019-08-27 12:51

[한겨레21]
실명 ‘미투’ 위해 남편에게 고백하고 정신과 전문의 만나
훌쩍 성장한 ‘오빠 성폭력’ 생존자 조이
베를린 거리의 벽 앞에서 조이가 그래피티 속 여성과 눈을 맞추고 있다. 조이 제공
베를린 거리의 벽 앞에서 조이가 그래피티 속 여성과 눈을 맞추고 있다. 조이 제공
“전정윤 기자님께 꼭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전 사촌오빠 성폭행 피해자 ○○○입니다.”

‘#오빠 미투’ 보도(제1273호)가 나간 뒤 많은 친족 성폭력 생존자한테 연락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이런 유의 사건을 건강하게 이슈화하기 위해서는 실명이 거론돼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실명으로 이 사건을 공개할 용의가 있다”며 곧 전투에 임할 듯한 태세로, 그것도 두 번이나 전자우편을 보낸 생존자는 조이(가명·40대 초반)가 유일하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조이는 흐뭇한 이유로 자못 결연했던 ‘실명 #미투’ 계획을 접었다. ‘#오빠 미투’ 보도 이후 3주간 스스로 “테라피(치유) 과정”이었다고 고백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과 가정의 평화를 되찾았다. 조이는 처음 맛보는 평온한 일상을 깨고 싶지 않다며 결심을 바꿨다. “이기적인 이유로 마음을 바꿔 미안하다”고 머쓱해하면서도, 자신의 ‘응집된 회복 과정’을 익명으로나마 기사화하겠다고 했다. ‘실명 #미투’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과 지인들, 의사가 보여준 전폭적 지지와 전문성 있는 조언이 다른 생존자와 그 주변인들에게 긍정적 ‘변화의 메시지’가 될지 모른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7월31일 조이를 처음 만나 6살 때 중학생 사촌오빠에게, 9살 때 고등학생이 된 그 오빠에게 겪은 성폭행과 성추행 사건을 들었다.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거점) 부소장 겸 아주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조이를 소개했고, 8월5일 두 사람의 동의로 이 만남을 취재했다. 8월19일에는 조이와 남편을 함께 인터뷰했다. 세 번의 만남 사이사이, 조이와 전화·문자로 진행 과정을 주고받았다. 기사에는 조이가 울고 웃었던, 짧지만 강렬한 희망의 서사를 담았다. 조이와 세상 모든 친족 성폭력 생존자의 ‘해피엔딩’을 응원하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조이는 첫 만남에서 “그런 일을 당했지만 꽤 잘 살았다”고 거침없이 자기를 소개했다. 유쾌하고 씩씩한 그는 실제로 잘 살아온 듯 보였다. 예술 분야에서 제법 성공해 자리도 잡았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불도저 기질을 살려 지독하게 열심히 살았다. 대학, 대학원, 유학…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로 고생하면서도 기어이 바늘구멍을 뚫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름을 대면 모두 알 만한 직장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았다. 같은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해 딸을 낳고 안정적인 가정도 꾸렸다.

억울할 정도로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집안 사정으로 큰집에 얹혀살다가 오빠 성폭력을 당했지만 스스로 ‘럭키하다’(운 좋다)고 생각했다. 더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타고난 힘’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컸고, 그 힘으로 꿈을 이뤘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자신의 인생에 불행한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상 징후를 감지한 건 20개월 전 딸을 낳고부터다. 공교롭게도 극기 훈련 같은 ‘워킹맘’의 삶과 ‘#미투’ 열풍 시기가 겹쳤다. 생후 백일 된 아기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너무 고단한데, 밤새 #미투 기사를 찾아 읽으며 울었다. ‘결정타’는 최근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맞았다.

이사할 집은 2층이었는데, 1층에 사는 부부가 4살과 6살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얘네 둘이 금방 커서 우리 딸이랑 놀 텐데… 우리 딸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아랫집 아들들은 잠재적 가해자로 보기엔 너무 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딸을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과잉보호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그 일이 나한테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7월29일… 온라인으로 배포된 <한겨레21>의 ‘#오빠 미투’ 기사를 읽었다.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곧바로 낯모르는 기자에게 신상 정보와 성폭행 상황을 상세히 적은 전자우편을 써보내고야 말았다.

“남편은 내 아픔을 몰랐고 나는 남편의 진가를 몰랐다”

조이는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가해자에게 복수할 생각은 이제 “1도 없다”고 강조했다. 가해자가 어떻게 되든 자신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실명 #미투를 계획한 이유는 하나였다. 조이는 그저 강도당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성폭력 피해자도 피해 사실을 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부모가 ‘우리 집에선,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럴 리 없다’ 여기지 말고 예방 성교육에 나서도록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딸이 커서 ‘우리 엄마가 나를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고 노력했구나’ 알아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일 듯싶었다.

조이에게 오빠 성폭력이 굳이 숨겨야 할 상처는 아니었다. 전에도 몇 차례 존경하는 선생님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다. 믿을 만한 ‘남자 사람 친구’들에게도 얘기한 적이 있다. 실명 #미투를 결정하기 앞서 가장 큰 걱정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남편이었다. ‘성관계 파트너’이기도 한 남편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신할 수 없었다. 배우자가 어린 시절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남편이 시뮬레이션(연상)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부부의 성생활에, 나아가 결혼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솔직히 무서웠다.

남편에게 고백하기 직전, 조이는 기자에게 “남편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최악의 파트너일 수도, 최상의 파트너일 수도 있다”며 반신반의했다. 예술 이론을 공부한 남편은 “모든 현상을 이성적으로 객관화해서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평소에도 크고 작은 일상의 문제에 ‘아내의 일’이라고 여겨 위로해주기보다는 ‘남의 일’처럼 객관적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이번에도 큰 위로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조이의 범죄 피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라이하게’(건조하게) 받아들여줄 것 같은 기대는 있었다.

7월31일 저녁, 조이는 남편에게 동네서점에 가자고 졸랐다. <한겨레21>을 먼저 읽고 그다음에 이야기를 풀어갈 작정이었다. 남편은 어리둥절해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순순히 아내를 따라나섰다. 조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사는 지역에 있는 서점을 다 돌아다녔지만 품절이었다. 남편은 차 안에서 <한겨레21> 사이트에 접속했다. 조이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본능처럼 ‘#오빠 미투’ 기사를 클릭해 단숨에 정독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이는 입을 뗐다. 15분쯤 흘렀을까… 조이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이가 말했다. “오빠, 나 운전하면서 얘기하고 싶어.” 남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다시 아파트를 나가, 돌면서 얘기해.”

“남편은 내 아픔을 몰랐고, 나는 남편의 진가를 몰랐다.” 그날 남편과 대화한 뒤 조이는 기자에게 광고 카피 같은 문장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기뻐했다. 조이의 고백 이후, 남편은 애써 티를 안 내고 ‘평소와 같은 일상’이 유지되도록 배려했다. 조금 달랐다면,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평소와 달리’ 부부가 손을 잡았고, 남편의 말투가 좀더 따뜻했다는 정도다. 조이는 “그 사건이 우리 삶에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그 느낌이 행복했고 남편에게 고마웠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말한 뒤 “가족이 훨씬 단단해지고 행복해졌다”며 “내가 남편에게 육아 짜증을 안 내니까 남편도 편해졌다”고 웃어 보였다.

남편의 지지 “당신의 #미투는 연대 운동”

조이는 다만, 다른 생존자와 그 남편들이 ‘조이 부부는 특별하다’고 오해해 ‘우리하곤 다르다’고 여기게 될까봐 경계했다. 조이는 “우리 부부도 육아 문제로 하루가 멀다고 싸우고, 사소한 일로 지지고 볶는 평범한 부부다. 이 일로 내가 남편에게 위로받을 수 있었던 건, 특별한 부부여서가 아니라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남편이 상식과 이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조이의 고백이 끝난 뒤 남편은 평소 습관대로 ‘긴 스피치’(일장 연설)를 시작했다. 조이가 “하트 뿅뿅”이 되었다는 ‘남편의 명연설’ 요점은 여섯 가지였다. 첫째, 당신이 실명으로 #미투를 하고 성폭행 피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도 내가 창피하거나 내 삶에 불이익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당신이 ‘사회적으로 건강한 논의를 촉발하고 싶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면 좋겠다. 셋째, 당신의 #미투이므로 내 부모님께 먼저 동의를 구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직장에 먼저 #미투 계획을 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넷째, #미투는 연대 운동이다. 실명 #미투를 하려거든, ‘가십’(흥미성 기사)으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여러 사람을 만나 제대로 준비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다섯째, 나는 ‘우리 딸이 성폭력당하지 않는 환경’보다 ‘딸이 (성폭력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당신의 경험 때문에 과잉보호하느라 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으니, 전문가 상담을 받아보면 좋겠다. 여섯째,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도 함께 기자를 만나겠다.

조이의 남편은 실제로 8월19일 기자와 만나는 자리에 나왔다. 그는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당연히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요하지 않는 듯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내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사실이고, 가족으로서 당연히 아내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해줄 수 있을지 먼저 고려했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이 현재 아내와 가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빨리 치유·해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이에게 심리상담을 권한 배경도 “아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을까 우려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를 만나서 ‘그 사건이 미칠 수 있는 무의식적인 영향’에 대해 정확한 조언을 받아보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이가 “잔 다르크처럼” 실명 #미투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동안, 남편은 곁에서 그 뒤 따를 수 있는 여러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언했다. “아내가 실명 #미투를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만, 아내의 선택이니까 내가 ‘된다’ ‘안 된다’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는 다만 “성폭력 피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불합리한 사회적 인식이 있고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실명 #미투를 하면 아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거나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논의했다”고 말했다.

“직장 걱정까지 하는데, 가족은 어떤가요”

조이는 8월5일 성폭력 전문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장형윤 교수를 두 시간쯤 만났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깊은 상처를 짧은 시간 안에 들여다보게 해주는 ‘전문가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다. 실명 #미투를 계획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조언도 받았다. 무엇보다 다른 피해자들을 진료할 때마다 매번 들었을 법한 하소연에도 눈물을 흘리며 깊이 공감해주는 의사의 태도 자체가 ‘치유제’였다고 했다.

조이는 장 교수 앞에서 자신의 성장 환경과 오빠 성폭력 피해 사실을 설명했다.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만일의 불이익에 대비해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지인들의 ‘실명 지지 선언’을 준비한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지인들은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꽃뱀’ 공격을 받을 우려가 없고, 남편의 지지가 너를 질 낮은 공격에서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막”이라고 격려했다. 다만 가해자나 큰집 식구들이 공소시효 만료를 악용해 조이를 무고로 고소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조이는 “그 정도는 큰 스트레스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잠잠히 조이의 말을 경청하던 장 교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금 남편과 지인, 직장 걱정까지 말씀하셨는데 혹시 친정 식구, 아버지와 새어머니, 남동생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하던 조이가 ‘한 방’ 맞은 듯 멍해졌다. “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눈물) 기사가 나가게 되면 부모님이 상처받으실 텐데 그 생각을 안 했네요. 엄마가 집을 나가서 내가 큰집에 맡겨졌던 거고… 지금은 새어머니가 너무 불쌍하고 사이도 나쁘지 않지만, 어려서는 내가 엄청 맞았어요.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자랐지만 주변에 좋은 지인이 많아서, 과거의 영향을 크게 안 받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 말씀 듣자마자 이렇게 계속 우는 걸 보면 저한테 많은 영향을….”

“친정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지. 비난할까요, 지지할까요?” 장 교수는 다시 조이의 가장 가까운 혈육, 아버지를 언급했다.

“아버지는… 지지까지는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10년 전쯤 아버지랑 싸우다가 ‘엄마 집 나갔을 때, 아빠가 나 큰집에 맡기는 바람에 ×× 성폭행당했다’고 소리 질렀어요. 아버지는 ‘그 자식 죽여버릴 거’라며 나가셨는데 실제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새어머니에게 얘기를 하셨는지 새어머니가 친척들한테 가십처럼 ‘××가 조이를 성폭행했다’고 해버렸어요. 큰어머니가 나한테 전화해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난리를 치셨어요. 내 남동생이 ‘형수도 있는데 누나가 ××형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야단쳐서 너무 충격받아 고소할 생각을 깨끗이 접었어요. 제가 9살 때, 오빠가 방에 들어와 저를 만지는 걸 남동생이 봤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큰집 식구들 앞에서 그 얘기를 해서 한순간 분위기가 싸해졌어요. 큰어머니가 저한테 조용히 ‘문 잠그고 자라’고도 했고. 동생은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을 못하나봐요.”

직계가족의 영향력을 과소평가 말라

장 교수는 “이 분야에서 일하다보니, 폭력 사건의 해결에는 두 개의 축이 있더라”며 A4용지 위에 천천히 두 축을 그렸다. 하나는 ‘정의 실현의 축’, 다른 하나는 ‘회복의 축’이다. 가해자가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이 정의 실현이다. 피해자가 다친 부분을 치료하는 것이 회복이다. 가해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의 회복이 빨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돼야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회복이 됐다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두 축이 서로 영향을 많이 끼친다고는 하나 완전히 별개이기도 하다.

피해자 회복과 관련해서는 ‘다친 만큼만’ 회복하면 된다. 까졌으면 까진 곳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생기면 또 그 부분을 치료하면 된다. 반면 정의 실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이뤄지지 않고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각각 직계가족, 친인척, 학교와 직장 같은 집단, 사는 지역, 나라, 지구 같은 사회의 단위가 존재한다. 장 교수는 동심원으로 이 단위를 설명했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동그라미, 그 외부에 친인척 동그라미, 학교나 직장 등 가까운 집단이라는 동그라미, 지역 사회 동그라미, 가장 큰 지구라는 동그라미가 종이 위에 순서대로 그려졌다.

장 교수는 “동그라미가 클수록 셀 것 같지만, 오히려 동그라미가 작을수록 세다”고 설명했다. 원에도 위계가 있어서, 중심에서 가까울수록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건 직계가족이고 그다음은 친인척, 그다음 학교·직장과 친구, 그다음이 지역사회고 국가고 지구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가장 가까운 집단에서 정의 실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장 교수는 “조이님은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 정의 실현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큰 동그라미, 이 사회의 일부 성숙하고 올바른 부분에 기대서 정의 실현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조이님은 친구들 사이에서, 직장에서 좋은 관계를 굉장히 탄탄하게 만들어오신 듯하다”고 높이 샀다. 그러나 “제가 그동안 진료해온 경험을 보면 친구 백 명이 힘을 실어줘도 엄마 한 명의 비난 목소리를 더 크게 듣는 피해자가 많았다”고 우려했다.

장 교수는 “직계가족의 반응을 여쭤본 것은, 조이님이 직계가족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면 #미투 이후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어서였다”고 설명했다. 조이 역시 “살면서 가족한테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고, 10년 전 이미 직계가족의 지지를 못 받는 상황을 한번 겪어봐서 ‘여기서 더 상처받을 게 뭐 있나’ 싶은 마음에 그 부분을 간과해온 것 같다”며 장 교수의 깊이 있는 분석에 수긍했다.

8월19일 밤 <한겨레21> 인터뷰를 마친 조이 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전정윤 기자
8월19일 밤 <한겨레21> 인터뷰를 마친 조이 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전정윤 기자

생존자가 자녀 보호에 민감한 건 당연

조이는 실명 #미투를 고민하면서, 악의적인 네티즌의 공격을 받거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를 크게 우려했다. 장 교수는 “오히려 큰 동그라미는 크게 걱정을 안 하셔도 된다”며 웃었다. 장 교수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에서 오래 일한 전문가다. 사회에서 많이 주목받았던 ‘별의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많이 만났다.

사건 초기 ‘댓글 집중포화’를 받을 때, 피해자는 ‘인생 끝났다’고 느낀다. 대한민국 사람이 다 자기만 본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하다. 장 교수는 관련 기사에 ‘꽃뱀’이라는 댓글이 몇만 개씩 달리던 사건도 많이 경험했다. 아무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도 길어야 2~3개월이 지나면 또 다른 이슈에 묻히곤 했다. 직장에서도 누군가와 원한을 산 것이 아니라면, 길어야 반년만 잘 넘기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별 관심이 없다.

조이 부부가 실명 #미투에 앞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 중 하나는 ‘딸의 장래’였다. 사랑하는 딸이 훗날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할 때 혹시라도 엄마의 #미투가 걸림돌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장 교수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따님의 친구나 선생님, 동료가 조이님 일까지 알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 “따님 혼사 때 사돈집에서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아주 현실적인 걱정도 있으시겠지만, 그런 집과는 사돈을 안 맺는 게 맞다”는 ‘유레카’(알아냈다!) 같은 해답을 내놨다. 조이는 성폭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는 문제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자신을 자책했었다. 딸을 건강하게 기르려면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장 교수는 “제가 조이님과 정식 정신과 면담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말씀을 들었을 때 크게 병이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며 조이를 안심시켰다.

지금까지 조이가 잘 살아왔고, 인적 네트워크를 잘 맺어왔으며, 부부 간에 신뢰 있는 가정을 꾸려왔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다. 또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책을 찾아 읽어가며 실명 #미투를 준비해온 과정을 들어보면, 의학적으로 우려할 만한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조이는 힘든 상황에서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응원도 덧붙였다.

전문가가 보기에, 조이의 ‘딸 과잉보호’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 교수는 “성폭력 경험이 없는 부모라고 해서 자식들한테 아무나 믿고 아무 데나 돌아다니라고 하지 않는다”며 “세상이 너무 험하기 때문에 딸을 더 조심시키려 하고 염려하고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삶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쳐준다. 파산을 겪은 부모가 자녀에게 경제 교육을 민감하게 하고, 공부에 한 맺힌 부모가 자녀를 무섭게 채찍질하며 공부시키는 것처럼, 성폭력을 겪은 부모가 성폭력 예방에 예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의학적 치료가 아닌 심리) 상담을 받고 싶다면 자기가 선택해서 받으면 되고, 싫으면 안 받아도 괜찮다”고 조언했다.

“더 이상 트라우마로 여겨지지 않아요”

조이는 “누구나 자기 삶에 비춰 아이를 키우게 돼 있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내 과거 경험이 더 이상 트라우마로 여겨지지 않고 마음이 너무너무 편하다”고 했다. 조이는 이날 이후 이어진 “마음의 평화”를 헤집고 싶지 않아 실명 #미투를 포기했지만,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그의 해피엔딩은 그 이름보다 더 오랜 여운을 남길 것 같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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