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수술 뒤 1급 시각장애 판정을 받은 이지은(가명)양이 6일 오후 서울 성북구 집에서 플루트를 연습하고 있다. 이양은 세계적인 플루티스트가 되어 예술의전당에서 꼭 공연하고 싶다고 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아름다운 세상. 그대에게 보여주리. 말해 봐요. 그대가 보고 싶은 것들을.”
플루트에서 영화 <알라딘>의 주제곡 ‘어 홀 뉴 월드’(A Whole New World)가 흘러나왔다. 2분 정도 연주를 마친 지은(가명·15)이는 이 노래를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마스터했다”고 했다. “이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에게 플루트 연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그러더니 발 옆에 놓아둔 케이스를 열어 플루트를 넣었다. 다섯발자국 정도 걸어가면 있는 책꽂이 맨 아래 칸을 더듬더니, 플루트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지은이는 늘 플루트를 저기 갖다놔요. 플루트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더라도, 느낌으로 찾아서 꺼내고 갖다 놓는 거예요.” 지은이 엄마 김인숙(가명·46)씨가 말했다.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다니던 지은이는 10살 때 맹학교로 전학했다.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한 건 8살 때다. 두개인두종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한 뒤부터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이 병은 뇌하수체 부위에 발생하는 뇌종양의 일종이다. 주변의 뇌 구조물이 시신경 등을 압박해 시력 저하를 동반한다. 호르몬 분비를 관장하는 뇌하수체가 제구실을 하지 못해 몸에서 각종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발병 전 징후는 여러번 있었다. 지은이는 8살 때까지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2살 어린 남동생도 잘 타는데 유난히 중심을 잡지 못했다. 초등 1학년 때는 같은 반에서 ‘가장 뚱뚱한 아이’였다. 김씨가 가끔 물건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물건을 잘 찾아오지 못했다. 김씨는 그럴 때마다 지은이가 꾀를 부린다고 생각해 혼을 냈다. 2학년 2학기 때는 담임교사가 “지은이가 책을 잘 못 읽는다”고 알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2012년 11월 어느날. 지은이는 그날따라 지저분하게 밥을 흘리며 먹었다. 김씨는 또 지은이를 혼냈다. 그날 남편 이현태(가명·45)씨와 함께 운영하는 떡집으로 출근한 김씨는 문득 불안해졌다. “여보, 우리 지은이 안과 좀 보내봐야겠어.”
뇌종양 수술 뒤 1급 시각장애 판정을 받은 이지은(가명)양이 6일 오후 서울 성북구 집에서 플루트를 연습하고 있다. 이양은 세계적인 플루티스트가 되어 예술의전당에서 꼭 공연하고 싶다고 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안과에서는 “시력이 너무 낮아 측정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서둘러 지은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다. 대학병원에선 “시신경염이 의심된다”며 주사를 놔줬다. 그런데 지은이는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대학병원에서는 다시 “뇌종양이 의심된다”며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세번째로 간 병원에서 두개인두종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종양 크기가 7㎝로 큰 편이다.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지은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나서야 김씨는 지은이가 냈던 ‘소리 없는 비명’을 인지했다. 지은이의 성장과 함께 자란 혹이 뇌하수체를 압박해 호르몬 분비를 막았다. 자전거를 제대로 타지 못한 건 운동 호르몬이 조절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찐 건 혈당 조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장호르몬도 문제가 생겨 지은이는 2학년 때 키가 121㎝밖에 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작았다. 그렇게 점점 자라난 혹이 마침내 시신경까지 압박한 것이다.
3시간 정도 수술을 마치고 지은이가 보는 세상은 두갈래로 나뉘었다. 왼쪽 눈은 아예 흑백으로 보이고, 오른쪽 눈은 시야가 매우 좁아졌다. 시각장애 1급 진단을 받았다. 그 뒤 지은이는 길을 걸을 땐 지팡이를 사용하고, 점자책을 읽으며, 점자 타자기를 쓴다. 수술 때 뇌하수체를 모두 제거해 혈당 조절도, 성장도, 소변을 참는 것도 모두 약에 의존한다. 인슐린, 갑상선호르몬, 여성호르몬, 소변 조절 호르몬 등 매일 먹는 약 종류만 4개가 넘는다. 김씨는 매일 밤 지은이 엉덩이에 성장호르몬 주사도 맞힌다.
문제는 지은이의 키가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고 마냥 자라나도 곤란하다는 점이다. 성장호르몬 주사는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다. 석달치 주사가 200만원이다. 다만 지은이처럼 호르몬 이상으로 맞아야 하는 경우에는 보험 적용이 되지만, 그것도 여자아이 기준으로 키가 150㎝ 미만일 경우다. 김씨는 “지금 148㎝인 지은이 키가 2㎝만 더 크면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게 돼요. 아이 키를 키우려고 주사를 맞히는데 돈은 무시무시하게 들고, 그렇다고 아이가 크지 않기를 바랄 수도 없고….”
이런 지은이에게 김씨는 ‘빛나는 시절’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김씨 자신에게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때였다. 김씨는 대학 때 피아노를 전공했다. 2003년 지은이 아빠가 다니던 회사 상황이 안 좋아져 형편이 기울 때까지, 김씨는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지은이에게도 그런 시절을 주고 싶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맹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해보게 했다. 지은이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6학년이 되어서 ‘인생 악기’를 찾았다. 소리로 세상을 느끼는 지은이에게 플루트 소리가 몸에 감겨왔다. “처음 들은 플루트 소리는 마치 저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어요. 그 소리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더 강해졌어요. 공부의 양이 많아지면서 한학기 동안 힘들었거든요. 그때 플루트의 잔잔한 연주를 들으면 위로도 되고, 희망이 생겼어요.”
지은이는 이제 학교 오케스트라와 서울 성북구립장애청소년합주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막내동생과 함께 요양원 연주 봉사활동도 다닌다. 지난 4월부터는 월드비전의 지원으로 난생처음 학원에서 일대일 수업도 받기 시작했다. 점자로 된 악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청력과 기억력에 의존해 플루트를 연주한다. 연주 자체가 쉽지는 않다. 성장호르몬 부작용으로 추정되는 척추측만증 때문에 척추를 고정하는 보호대를 매일 착용한다. 보호대가 상체를 압박해 플루트를 연주하고 나면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도 맹학교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처음 단상에 올랐을 때 지은이는 ‘짜릿함’을 느꼈다고 한다.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어요. 떨리긴 했지만 벅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플루트로 위로받은 만큼 나도 내 연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지은이는 “이 악기를 앞으로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빠 이씨와 엄마 김씨는 종일 떡집에서 일하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집으로 온다. 한창 클 나이인 4남매의 식비만 한달에 100만원이 넘는다. 지은이가 한달에 한번꼴로 가는 병원만 신경외과와 안과, 이비인후과, 내분비과, 피부과, 정형외과 등 6곳이나 된다. 김씨는 지은이의 수술비를 포함해 진 빚이 8천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지은이 삼촌과 친가, 외가 등 가족에게 빌린 돈은 뺀 금액이다. 떡집 운영으로 월평균 120만원을 벌지만, 대부분 가게 월세로 나간다. 이 때문에 김씨가 넉달 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일하고 있다. 한달 꼬박 104시간 일해 버는 돈은 90만원 정도다.
이지은양의 집 화장실 입구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은 집이다. 낡은 2층 주택은 이사 올 때부터 성한 곳이 없었다. 얼마 전 폭우가 쏟아지면서 주택의 시멘트 자재가 부서지고, 바닥에 주먹만한 구멍이 파였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 10개 이상을 올라야 지은이네 이층집에 다다르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지은이에게는 오가는 일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이 집마저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곧 이사를 나가야 한다. 임대아파트를 알아봤지만, 92.6㎡(28평) 아파트가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16만원이라고 했다. 전세 보증금 2천만원을 빼도 턱없이 부족하다. 주방과 방 2개인 33.1㎡(10평) 남짓한 집에서 키 170㎝를 훌쩍 넘는 큰아들은 주방에서 몸을 구겨 자고, 남동생 두명은 작은방에서 자고, 지은이는 엄마, 아빠와 큰방에서 같이 잔다. 계단 2개를 내려가야 있는 화장실은 지은이에게 특히 위험하다. 김씨는 혹시라도 지은이가 넘어질까봐 하루에도 몇번씩 화장실 바닥을 닦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안전한 집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집은 계단도 많고, 좁고 낡아 아이들이 생활하기에 위험하거든요. 무엇보다 플루트를 좋아하는 지은이가 생활이 어려워서 자기 입으로 ‘포기한다’고 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시각장애를 가진 이지은양에게 철제 난간이 전부인 2층 계단은 위태로워 보이는 만큼 위험하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은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클로드 볼링 같은 세계적인 플루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국외로 공연 다니면서 제가 플루트 소리를 들으며 받은 위로를 더 많은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영어도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요즘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영어 단어 50개씩 꾸준히 외우고 있어요.” 지은이는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한겨레 나눔꽃 캠페인 참여
지은이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우리은행 269-800743-18-309 예금주: 나눔꽃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또 다른 방식의 지원을 원하시면 월드비전(02-2078-7000)으로 문의해주세요. 기부금 영수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목표 모금액은 3천만원입니다. 후원금은 지은이네 가족이 안전한 주거지로 이사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생계비로 쓰이고, 3천만원 이상 모금되면 지은이네 가족처럼 어려운 가정에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대한적십자사가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하준(가명)이의 사연(
▶관련 기사 : 심실 하나뿐인 둘째, 왼팔 굳는 장애까지 “워터파크 가봤으면”)이 소개된 뒤 모두 1401만6907원(26일 기준)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167명의 후원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습니다. 후원금은 하준이네 가족의 생계비와 교육비로 쓰일 예정입니다. 목표액을 넘어선 후원금은 하준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의 다른 위기가정에 지원될 예정입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