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한 학생이 한 손에는 컵라면, 다른 손에는 탄산음료를 들고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쌤, 기사 잘 봤어요. 기사로 보니까 두달 어떻게 버텼지 (싶어요)… 여기 오니까 그래도 살맛 나요.”
지난달 27일 늦은 밤, 중국에서 에스엔에스(SNS) 메시지가 한통 날아왔습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유학 간 14살, 방학이면 홀로 대치동 지옥에’ 기사에서 두달차 자취생으로 소개된 승완(가명·14)이입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뒤 연락이 뜸했던 승완이는 기사가 나간 당일 먼저 연락을 해왔습니다. 여름방학 내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 그리고 ‘승완’이란 이름 괜찮은데요? 나중에 아들 낳으면 그렇게 지어야지.” 덧붙이는 말에서 대치동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맑음이 느껴졌습니다.
안녕하세요. ‘대치동 학원가-리터니들의 방학 잔혹사’ 기획시리즈
(<한겨레> 8월27일∼9월4일)를 취재한 탐사팀의 이재연입니다. 기사가 나간 후 승완이뿐 아니라 많은 독자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독자는 “실제 재외국민 전형으로 대학을 보낸 학부모로서 현실적인 기사에 깜짝 놀랐다”며 “요즘 보면 (재외국민 전형은) 의미가 많이 퇴색한 전형이 된 게 맞는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한 한국국제학교에서 교감을 지냈다는 다른 독자는 “언젠가는 실상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교육인지 (싶다)”라고 했습니다. “한국국제학교에서는 ‘교실 붕괴’가 일어난 지 오래다. 과도한 사교육 비용을 지불하게 만드는 일부 대학에 분노를 느낀다”고 토로한 전직 국제학교 교사도 있었습니다.
기사에 공감해주는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재외국민 전형을 매도하는 나쁜 기사”라고 비판하는 학부모 이메일도 여러통 받았습니다. 2회까지 나간 후에는 한 에스에이티(SAT) 학원 원장에게 “‘스카이’ 중 한곳 입학사정관과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도 다른 대학처럼 장사 좀 해야겠다’는 뉘앙스로 말하더라. 재외국민 전형을 늘리겠다는 이야기다. 왜 학원만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학부모와 학생, 사교육업계와 대학까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주제인 만큼 독자 의견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갈리는 것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기획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어느 누구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학생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리터니(유학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24시간을 취재하면서 ‘참담하다’는 표현도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혹여 지나치게 자극적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차마 기사에 담지 못한 내용도 많습니다. “자취방에 혼자 있으면 자꾸 나쁜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옥상으로 올라간다”는 서준(가명·17)이의 이야기는 결국 적지 못했습니다. 승완이가 버릇처럼 입에 올렸던 “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죽고 싶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 꺼진 자취방으로 귀가하는 게 싫어 밤늦게까지 피시(PC)방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얼마 전 반지하 월세방에서 지네가 나왔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든 적도 많았습니다. 불면증을 앓는다는 서준이에게 한번은 “그러면 다음날 공부가 잘 안 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두워진 서준이의 표정에 ‘아차’ 싶었지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대학 가면 정말 좋아요? 가면 쓰레기처럼 살아도 돼요?”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한번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외롭지는 않았어요. 제가 좀 심하게 독립적이라.” 중학교 시절의 하숙집 생활을 두고 이렇게 말하던 승재(가명·19)에게 위로다운 위로 한번 못해준 것도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한국 학생들의 여름방학이란 게 거기서 거기일 것입니다. 학교 보충수업을 듣고 학원에 갔다가 남은 시간에는 과외를 받거나 독서실에서 자습을 하겠죠. ‘극성’과는 거리가 먼 부모님을 둔 저 또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방학이라고 해서 마음껏 놀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제부턴가 과도한 사교육에 대한 비판은 희미해졌고, 하루 4∼5시간 자며 학원 뺑뺑이를 도는 초등학생들도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게 됐습니다. ‘리터니들이라고 해서 뉴스거리가 될 수 있을까.’ 수백번 고민하면서도 기사를 쓴 것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어른들 모두 자기 자신의 욕망을 한번쯤은 내려놓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