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KIKO) 사태가 터진 지 올해로 11년이 흘렀다. 많은 수출 중소기업이 부도와 파산, 자산 매각 등의 피해를 보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여전히 키코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업도 많다. 반면 여러 중소기업을 상대로 키코라는 ‘괴물’을 판매한 은행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사이 금융은 시기와 대상을 조금씩 바꿔가며 ‘제2의 키코’ 사태를 여럿 만들어냈다. 1조원대 피해가 예상되는 국외 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S·DLF) 논란이 대표적이다. 키코의 피해집단이 중소기업이었다면, 이번에는 개인 투자자의 대규모 손실이 예고된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차이다.
은행들이 ‘첨단 금융기법’의 이름으로 중소 제조업을 망가뜨린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며 금융의 존재 이유를 묻는 탐사기획 ‘키코 사태, 11년’을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인천에 본사를 둔 재영솔루텍은 일본 업체가 강세를 보이는 정밀금형 분야에서 경쟁력을 입증한 몇 안 되는 국내 강소기업이다. 휴대전화와 자동차 내·외장재, 가전제품 등에 쓰이는 부품을 주로 만들었다. 1976년 서울 구로공단의 8평 남짓한 임대공장에서 출발해 금형 기술력 하나로 40년 넘게 성장을 거듭했다. 2001년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으로, 2007년 품질경쟁력 우수기업으로 꼽혔다.
2008년 수출 1억불 탑을 수상하기까지 재영솔루텍의 미래는 밝게만 보였다. 연 매출은 3천억원에 육박했고, 총매출의 절반 이상이 수출에서 나왔다. 무차입 경영이 가능할 정도로 재무구조도 탄탄했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의 재영솔루텍에 대해 “경영 기반이 안정적인데다 기술 경쟁력도 높아서 경인 지역의 대표적 ‘알짜 기업’으로 통했다”고 소개했다.
재영솔루텍의 위기는 그해 3개 은행과 맺은 키코(KIKO) 계약에서 비롯했다. ㄱ은행과 ㄴ은행, ㄷ은행이 거듭 제안한 통화옵션 상품 ‘키코의 유혹’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영솔루텍은 키코를 ‘환위험 회피를 위한 보험’ 정도로만 이해했다.
“중소기업이 은행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가 없잖아요. 울며 겨자 먹기로 ㄱ은행과 키코 계약을 마치면,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ㄴ은행이 찾아와서 계약서를 내미는 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출액을 뛰어넘는 규모의 키코 계약을 맺고 말았습니다.”(재영솔루텍 전 임원)
☞키코(KIKO)란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통화옵션 상품의 하나다. 원-달러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미리 정한 환율(계약환율)에 달러를 팔 수 있어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문제는 환율이 상한선 위로 올라가거나(Knock In), 하한선 밑으로 내려갈 때다(Knock Out).
키코의 ‘사기적’ 피해는 환율이 만기 이전에 한번이라도 상한선 이상으로 올라갈 때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계약 금액의 두배 이상의 외화를 마련해 은행에 약정 환율로 팔아야 한다. 환율이 하한선 밑으로 떨어지면 키코 계약은 무효가 된다. 수출 기업은 환율이 떨어진 만큼, ‘정직하게’ 환차손을 입는다. 이런 고위험 구조 탓에 ‘키코 계약으로 기업이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제한적인 반면, 부담하는 위험은 무한대’라는 비판이 나왔다.
키코 가입 직후 미국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원-달러 환율이 예상범위 바깥으로 치솟았다. 달러를 기준으로 거래하는 수출 기업에 원화 가치의 하락은 반가운 일이다. 똑같은 제품을 수출한다고 가정할 때, 실제 손에 쥐는 현금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키코는 이런 금융 상식을 뒤집었다. 환율이 오르면 기업은 오른 환율로 달러를 마련해서 이를 낮은 환율로 은행에 팔아야 했다. 그 규모는 대개 수출대금의 2배 이상이었기에, 그 피해가 더욱 컸다. 재영솔루텍은 순식간에 500억원대 손실을 보았다.
키코 손실에 따른 재무구조의 악화는 2차 피해로 이어졌다. 부채가 늘자 재영솔루텍의 신용등급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 그 금액이 300억원을 넘어섰다. 재영솔루텍에 키코를 팔아 손실을 키우고, 그 손실로 채무가 쌓이자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뒤, 그만큼 더 비싼 이자를 받아간 곳은 모두 은행이었다.
키코 피해는 재무적 손실에 그치지 않았다. 키코를 판매한 은행은 채권단이 되어 2010년 재영솔루텍에 대한 워크아웃 체제를 가동했다. 채권 일부(290억원)를 주식으로 바꿔 대주주(지분 55%)의 지위에 오른 채권단은 이 업체에 대한 ‘실질적 경영권’을 행사했다.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채권단의 약속과 달리, 2015년 워크아웃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지 재영솔루텍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10원 한장’이라도 돈이 나가는 일이라면, 채권단이 파견한 재무책임자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재영솔루텍 관계자가 기억하는 키코의 가장 심각한 피해는 그때 발생했다.
“6년의 워크아웃 기간에 이뤄진 투자가 거의 ‘제로’입니다. 반면, 회사 자산 가운데 돈이 될 만한 건 무조건 팔아서 빚 갚으라는 게 채권단 요구였어요.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치고서도 저희가 살아난 건 기적입니다.”
재영솔루텍은 그 기간에 재영웰릭스 등 계열사와 자동차사업부, 부품사업부 등 핵심 사업부를 매각했다. 공장을 지으려고 확보해둔 부동산마저 처분했다. 아울러 채권단은 기존 대주주의 감자를 요구했다. 대주주 지분 감소에 따른 피해 금액만 290여억원(지난 8월 말 기준)에 이른다.
‘키코 사태, 그 이후’의 시간은 재영솔루텍에 모두 1100억원 안팎의 피해 금액을 남겼다. 재영솔루텍은 그 가운데 아직 절반 남짓의 부채를 갚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키코 사태의 그림자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재영솔루텍 쪽은 “키코 계약으로 생긴 빚을 매년 조금씩 갚고 있는 처지인데, 은행이 갑자기 만기 연장을 거부하면 우리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며 키코 판매 은행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반면 키코를 판매한 은행은 어떠한 손해도 입지 않았다. 되레 여러 단계별로 돈을 빼갔다. 재영솔루텍의 키코 피해 금액과 그 이자, 지난해 출자전환 주식을 시장에 일괄 매각하며 얻은 200여억원(추정치)의 차익까지 모두 은행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해 한국기업회생지원협회 산하 키코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관계자는 “은행이 10년 넘게 키코라는 ‘빨대’를 꽂고 재영솔루텍의 골수를 빨아들이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공대위 등의 주장과 달리 은행들은 키코 사태의 모든 책임을 자신들한테 돌리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태도다. 키코 사태 당시에도 은행 쪽에서는 키코 거래가 ‘기업 스스로의 판단 아래 이뤄진 계약’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은행연합회는 2008년 7월 보도자료를 통해 “수출기업이 키코 거래로 막대한 손실을 본 것처럼 주장하는데, 거래의 특성상 환율 상승으로 통화옵션에서 손실을 보더라도 수출대금에서는 이익이 발생하게 된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키코 거래에서 은행과 기업이 기대 이익과 손실을 1 대 1이 아니라 1 대 2 혹은 그 이상의 불공정한 조건으로 교환했다는 사실을 배제한 주장이다. 쉽게 말해 기업이 키코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제한적이지만, 손실은 그 몇배로 커지는 것이 키코의 구조였다.
2008년 키코 사태가 터진 뒤, 정부가 피해 중소기업을 위해 마련한 ‘패스트트랙 프로그램’도 기업에는 독이 됐다. 그해 10월1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등 7개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방안’을 보면, 정부는 은행이 피해 중소기업에 패스트트랙이란 이름으로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한다고 약속했다. 정부를 믿고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기업의 상당수는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았다.
2005년 수출 1억불 탑을 수상한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엠텍비젼이 대표적 사례다. 이성민 엠텍비젼 대표는 “키코 피해가 기업의 부채로 전환되면서 신용등급이 떨어지자, 2009년 5월께부터 은행에서 끈질기게 찾아와 패스트트랙 가입을 압박했다”고 말했다. 은행 관계자는 패스트트랙에 가입하기만 하면 엠텍비젼의 유동성 위기가 당장 해결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패스트트랙 가입 결과는 이 대표의 기대와 크게 달랐다. 패스트트랙 지원금 180억원은 엠텍비젼에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은행은 패스트트랙 지원금을 엠텍비젼에 지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채권 회수에 활용했다. 키코 피해 기업을 돕는다며 정부와 은행들이 함께 홍보한 사업이 결국 “은행의 키코 손실채권 회수를 위한 수단에 그친다는 사실을” 이 대표는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엠텍비젼은 패스트트랙 가입으로 금융회사 4곳을 상대로 낸 키코 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 2008년 12월30일 서울중앙지법이 일부 중소기업의 키코 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엠텍비젼을 비롯한 여러 중소기업이 여기에 힘입어 비슷한 가처분신청을 냈다. 이 대표는 “패스트트랙 가입이 은행의 키코 채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사실, 패스트트랙에 가입한 기업은 가처분 인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엠텍비젼의 키코 피해 금액은 총 700억원에 이른다. 수년간 쌓인 재무적 피해를 감당하지 못한 엠텍비젼은 2013년 1월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고, 회사의 핵심 사업부문을 뺀 부동산 등 여러 자산을 매각하며 키코 채무를 갚아나갔다. 기업회생절차에서 빠져나온 건 2014년 10월이다. 그사이 최대 400명에 이르던 직원 수는 40명 선으로 줄었다.
2008년 수출 1억불 탑을 받은 플랜트 업체 일성하이스코(옛 일성) 역시 키코 피해 기업이다. 장세일 전 일성 회장은 약 1300억원에 이르는 키코 피해 이후 금융회사와 맞선 대가를 치렀다.
수출 1억불 탑을 받은 그해부터 일성하이스코는 전세계 플랜트 업계의 불황과 연이은 키코 피해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ㄷ은행 등이 꾸린 채권단은 일성하이스코를 상대로 패스트트랙 가입을 압박했다. 기업 워크아웃 진행도 요구했다.
장 전 회장은 채권단의 뜻과 달리 워크아웃 대신 2012년 3월13일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채권단이 주도하는 워크아웃과 달리 기업회생절차를 선택하면, 기존 경영진은 경영권을 유지한 채 회생절차를 밟게 된다. 장 전 회장은 “패스트트랙에 가입하면 그 돈을 은행이 그대로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이를 거절한 뒤 기업회생절차를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성하이스코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지 정확히 일주일 만에 부도 사태를 맞았다. 그 일주일 뒤에는 장 전 회장에 대한 채권단 일부의 형사고소가 이어졌다. 결국 장 전 회장은 2014년 6월 사기(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그가 수감돼 있는 사이 일성하이스코의 거의 모든 주식은 유암코(연합자산관리)에 넘어갔다. 유암코는 여러 은행이 기업 구조조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다.
재영솔루텍과 엠텍비젼, 일성하이스코 등 많은 중소기업의 키코 피해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찾아왔다. 1차 피해가 키코 계약에 따른 직접 손실이라면 2차는 금융비용 등 간접 손실, 마지막 3차는 자산 매각이다. 하지만 은행들의 중소기업 빨대 꽂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석헌 금융감독원 원장은 지난해 7월 취임 이후 키코 사태 재조사를 지시했다. 키코 사태 당시 은행이 기업을 상대로 상품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렸는지를 살피겠다는 취지였다. 아울러 금감원은 일성하이스코와 재영솔루텍 등 4곳이 신청한 금융분쟁조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금감원 분쟁조정은 소비자와 금융회사의 분쟁을 소송에 앞서 조정을 통해 합의하자는 제도다. 분쟁조정 결과에 따라 각 기업은 키코 피해 금액의 일부를 은행으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일성하이스코처럼 이미 대다수 지분을 금융기관(유암코)이 가진 경우다. 금감원 분쟁조정을 거쳐 보상 결정이 나온다 해도, 일성하이스코에 대한 보상금은 장세일 전 회장 등 옛 대주주가 아니라 이익 배당의 형태로 은행에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피해 기업에 손실을 입힌 은행들이 보상금을 받아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성하이스코 관계자는 “우리 회사 지분의 95%가 유암코에 넘어가 있다. 유암코를 설립한 주요 은행들은 모두 과거 우리한테 키코 손실을 입힌 곳”이라며 “은행이 피해 기업인 일성하이스코에 보상금을 입금하면, 그 돈은 유암코를 거쳐 다시 ‘가해자’인 은행에 돌아가는 구조”라고 말했다.
많은 피해 기업이 키코에 발목 잡혀 과거와 싸우고 있는 사이, 금융권은 주기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만들어냈다. 최근 ‘제2의 키코 사태’로 불리며 논란을 빚고 있는 주요 선진국 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S·DLF) 사태가 대표적이다. 2008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금융의 피해자가 우량 수출중소기업에서 은행에 노후자금을 맡긴 개인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파생상품으로 인한 금융 피해자 양산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