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범죄를 겪은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 시한인 10년이 지났더라도 정신적 피해를 비롯한 후유증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 등은 통상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신적 피해 등을 호소하는데, 그동안 법원은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성폭력에 따른 후유증의 경우 피해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취지다.
의정부지법 민사1부(재판장 조규설)는 11일 ‘체육계 미투 1호’로 알려진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28)씨가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초등학생이던 자신을 성폭행한 테니스 코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외상후 스트레스를 처음 진단받은 2016년 6월 현실화됐으므로 마지막 범행 시기인 2002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피고 쪽) 주장은 이유 없다”며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2016년 우연히 테니스 코치를 마주친 뒤 성폭력 피해 기억이 떠오르는 충격을 받아 3일 동안의 기억을 잃는 등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이후 김씨는 2016년 6월7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고, 2018년 6월 테니스 코치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의 최대 쟁점은 ‘불법행위를 한 날’을 언제로 보느냐였다. 민법 766조에 따르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단기)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장기)이 지나면’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 테니스 코치 쪽은 마지막 성폭력 범죄일이 2002년 8월이므로 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피해자 민사소송을 제기하다’ 토론회가 열린 지난해 11월말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박윤숙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소장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의 손해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원고가 최초 외상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은 2016월 6월7일에 그 관념적이고 부동적인 상태에서 잠재하고 있던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이는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의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일이 된다”며 피고 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장기소멸시효 기산점인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객관적·구체적 손해가 발생한 때, 손해 발생이 현실화된 때를 의미한다”며 “가해행위와 (후유증 같은) 손해 발생 사이에 시차가 있다면, 잠재하고 있던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때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김씨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2016년 6월을 소멸시효 시작점으로 본 것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한국젠더법학회장인 최은순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 관련 장기소멸시효 계산법을 바꾼 거의 최초의 판결 같다”고 평가했다. 소송대리인인 김재희 변호사에 따르면, 그동안 법원은 성폭력 범죄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발생까지 10년이 넘는 시차가 있을 경우, 사건 발생일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 후유증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화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피해자들도 2012년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성폭력 관련 소멸시효를 개선하기 위한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종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동 성폭력에 대한 소멸시효 기산점은 법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으므로 입법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프랑스와 독일은 아동기 성폭력을 당한 경우, 피해자가 성년이 된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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