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사찰 등 각종 문건을 작성하게 하고 재판 정보를 빼낸 혐의를 받는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중복가입한 전문분야 연구회 탈퇴 등에 관한 안내 말씀.’
2017년 2월13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장 명의의 공지가 올라왔다. ‘전문분야 연구회의 구성 및 지원에 관한 예규’를 보면, 법원 내 연구모임에 중복 가입할 수 없게 돼 있으니 여러 곳에 가입한 판사는 한 곳만 남기고 탈퇴하라는 내용이었다. 국회나 감사원에서 중복 예산이 지적됐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로 꼽혔다. 이 조처는 판사들의 반발로 일주일여 만에 중단됐다.
법원에는 연구회가 15곳 있었다. 중복가입 탈퇴 조처는 그중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인권법연구회는 인권과 관계된 법을 연구하는 판사들의 연구모임이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우리법연구회를 필두로 한 진보적 성향의 판사들이 인권법연구회에 대거 참여한다고 파악했다. 박상언 판사(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가 2016년 3월 작성한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이라는 문건에서 이 공지의 내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건에서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자 정리는 “전문분야 연구회 전반에 관한 개편 방안 중 특정 연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돼 있는데 ‘특정 연구회’는 바로 인권법연구회를 지칭했다. 문건은 “연구회 전반에 대한 기술적 개선작업(중복가입자 정리)을 명분으로, 실질적으로는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제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중복가입자를 정리하면 인권법연구회 회원 수가 절반 이상(431→204명)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180도 달랐던 ‘외관’과 ‘실질’
2011년 생긴 인권법연구회는 당시 법원행정처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연구회 밑에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만들어 인사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등 사법행정에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 법원행정처 간부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2017년 3월 연세대 법학연구원과 함께 인권법연구회가 법관 독립성 강화를 위한 인사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공동학술대회를 계획하자, 법원행정처는 더 다급해졌다. ‘전산정보국장 명의의 중복가입 해소 조처(4월 초)→국제인권법 회장의 (인사모에 대한) 문제제기(중순)→엔터테인먼트법연구회 등 대안 연구회 발굴(하순)→명망 있는 선배 법관 대거 탈퇴(5월 초순)→인사모 자연스러운 소멸 유도’(‘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 문건 중에서)라는 로드맵을 세우고, 첫 단계였던 중복가입 해소 조처를 ‘예산, 예규’를 빌미로 실행했다.
지난달 1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재판(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에 증인으로 출석한 임효량 판사는 이 같은 조처를 ‘블랙리스트’에 빗대어 이해했다. 임 판사는 당시 대법원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에게서 전문분야 연구회 개편 방안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법원행정처에 발령 난 이탄희 판사(현 변호사)에게 “중복가입 해소 조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것이다. 블랙리스트 프레임에 들어가면 끝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 판사는 그때 그 의미를 법정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문제가 됐을 때였습니다. 국가의 재량 범위 안에서 지원금과 보조금 지급을 결정한다지만, 실질적으로 특정 문화예술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게 제가 이해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프레임입니다. 공식적인 외관에서는 문제 될 게 없는데, 실질적으로는 특정 문화예술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형태였습니다. 중복가입한 전문분야 연구회 탈퇴 공문의 경우도, 겉으로 내세웠던 외관과 실질이 달랐습니다. 예규를 따라 중복가입 금지를 시행한다는 외관은 문제가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외관’과 달리 ‘실질’은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조처였다는 점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닮았다는 얘기다. 그 밖에 해외연수 선발 과정에서 불이익을 주거나, 출장 기회를 제공해 당근책을 제시하는 것도 모두 ‘사법행정’의 탈을 쓴 인권법연구회 와해 대응책 중 하나였다.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 문건의 일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갈무리
양승태 대법원은 법관의 사법행정 참여를 독려하면서도, 이를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인사·평정, 법원 예산, 사법제도 연구 등을 통틀어 사법행정이라고 한다. 판사가 독립돼 재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틀’인데, 그 권한이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 소수에게 쏠려 있어 문제로 지적돼왔다. 양승태 대법원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사법행정 참여 기회를 판사에게 부여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를 관리·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사법행정위원회가 그렇다.
2016년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행정에 판사들의 의견을 반영한다며, 회의체 기구의 일종인 ‘사법행정위원회’를 꾸렸다. 겉으로 보기에, 대법원장에 집중된 권한을 일선 판사들에게 민주적으로 분배한다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사법행정위원회 추천권을 부여받은 고등법원장이 ‘특정 성향’의 판사를 배제하도록 꼼꼼히 설계했다. 2016년 3월 김민수 판사(당시 기획조정실 심의관)가 노재호 판사(당시 인사총괄심의관실 인사심의관)의 검증을 거쳐 작성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문건을 보면, 후보자 64명의 성향이나, 활동 연구회, 경력 등이 정리돼 있다. 이런 식이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상징성 보유. 진보 성향 법관들에게 어필.”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이나 선을 넘는 편은 아닌 것으로 보임.”
사법행정위원회 실무지원단 간사를 맡기도 했더 임효량 판사는 사법행정위원회의 운영은 자율적이었다면서도, 그 진정성에는 의문을 가졌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당시 간사로 일하면서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위원회와 관련해 법관의 사법행정 참여에 얼마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가졌던 이유가 있나요.”(검사)
“정말 참여를 원하면 더 오픈된 방식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경험한 바로는 위원 구성도 사전 조율하려는 시도로 보였고, 안건도 너무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안건이 올라오면 곤란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특히 임종헌 차장이 많이 하는 것으로 보여서 사법행정에 법관의 의견을 반영한다면 좀더 열린 마음으로 하면 좋지 않나 싶었습니다. (내용보다) ‘외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습니다.”(임 판사)
“‘특정 성향 법관이 (사법행정위원회) 논의를 주도하면, 법관의 의견 대립의 장, 특정 성향 법관의 주장 발표의 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기재가 문건에 나옵니다. 특정 성향의 법관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법행정 방향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법관을 표현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외적으로 법관의 의견을 수렴해서 사법행정을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 안건을 선정하려 한 것 같은데, 법관들과 소통하려는 외관만 취했다는 의미입니까.”
“일련의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의 핵심 실무를 맡았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인사모’ ‘CJ’ ‘강경대응 주문’
그간 인사권을 비롯한 ‘사법행정’ 권한이 한곳에 집중돼, 법관 사회의 관료화를 낳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보수적이고 정적인 법관 사회에도 ‘사법제도 개혁’을 요구하며 파열음을 내는 판사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이런 ‘비판적 의견’을 드러내놓고 견제·억압할 수는 없었던 당시 법원행정처는 ‘사법행정’의 외피를 두른 각종 조처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사들이 모여 더 나은 사법제도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에서는 이런 조처에 법원행정처장(박병대·고영한)과 차장(임종헌),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규진) 등 사법행정 라인이 관여한 정황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에게 보고된 정황도 있다. 법원행정처 지시에 따라 인권법연구회를 제어하려 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업무일지가 그렇다.
2017년 1월23일 작성된 메모 ‘14 : 30 인사모 CJ 보고(강경대응 주문)’가 한 예다. CJ(Chief Justice)는 대법원장을 뜻한다. 이 전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인사모 활동내역 보고서를 박병대 처장에게 보고하니, 대법원장도 아셔야 한다고 해서 대법원장에게도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박병대 전 처장은 인사모를 사법행정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모임으로 파악한 것 같다. 인사권이나 재판부 사무분담은 예민해서 윗분들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2015~2017년 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 상황을 지속적으로 체크해 실장회의에 공유했다.
그러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임종헌 전 차장이 이를 주도했을 뿐, 관련 혐의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한 발짝 떨어져, 일련의 조처는 오히려 사법신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권법과 관련 없는 사법제도를 연구하는 게 설립 목적에 맞지 않고, 우리법연구회와 같은 정치 편향 집단으로 비쳐 사법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게 이들이 들고 있는 근거다.
27일 증인으로 나온 노재호 판사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의 신문 내용에 이 같은 인식이 잘 드러난다. 노 판사는 2016년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 문건을 작성하고, 법원 인사관리시스템에 “사법제도는 연구회 전문분야인 국제인권법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이러한 소모임(인사모)은 부적절하다”고 적은 바 있다.
“인사모의 존재가 인권법연구회 설립 취지나 법관의 정치적 중립 측면에서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나요.”(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
“만약 전문분야 연구회가 아닌 별도 모임으로 연구해야 한다면 학문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가 당연히 허용돼야겠지만, 인사모의 주된 내용은 사법제도인데 (인권법)연구회 설립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증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법원행정처의 비공식적인 분위기로 알게 된 것인가요.”
“문건을 인사실에서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존 기획조정실 검토자료를 확인했을 텐데, 그런 문건들을 보고서 그렇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피고인의 주장에 귀 기울인다 해도, 연구 주제의 적합성을 왜 법원행정처가 판단하는지, 설사 정당한 조처였다면 그럴듯한 외관은 왜 꾸민 것인지, ‘정치 편향’의 판단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사수하고자 했던 ‘사법행정’은 무엇이었을까. 임효량 판사는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사법행정은 법관의 재판을 서포트(지원)하고 재판을 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법행정이 그 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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