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선진대안포럼 ‘더 나은 대안 더 좋은 사회’
<선진대안포럼> 대토론회 2부 선진을 향한 대안
<한겨레> 선진대안포럼이 마련한 신년특집 대토론회 2부에서는 미래를 향한 구체적 대안 모색의 길을 고민했다. 진보개혁진영 내부를 성찰한 대토론회 1부(<한겨레>2일치 4·5면)에 이어 계속된 토론에서 참석자들은 ‘진보의 성장 담론’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올 한해 동안 계속될 고민의 중요한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23일 한겨레신문사 대회의실에서 ‘성찰과 대안’을 주제로 7시간 동안 열린 특별대토론회 가운데‘ 진보 지식사회에 대한 성찰과 대안’, ‘진보개혁 진영 운동 전략’ 부분을 발췌해 싣는다.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 고민해야
홍성태=나는 식민지적 학문풍토의 영향을 강조하고 싶다. 서구에서 수입한 추상적 거시담론이 한국처럼 쉽게 유행하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 세상에 없다. 프랑스나 미국에서는 한 줌의 집단에서 통용되는 사변이 이곳에서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와 특징에 관한 구체적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예컨대 제도의 문제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자면 황우석의 경우도 결국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점에서 황우석 사태는 10년 전에 일어난 삼풍붕괴사고와 아주 유사하다. 제도가 있는데 작동하지 않았다. 또 다른 예로 공사 문제를 들 수 있다. 공사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이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한국 사회를 형성하고 작동하는 강제적 규범과 구체적 제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너무나 미흡한 것이다.
외국의 사변적 거시담론을 수입해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식민지적 학문풍토 속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 전체적으로 당연히 성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사회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단순히 연구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그 사회의 성찰성을 높이는 핵심요소이다. ‘학문의 식민성’이라는 뿌리깊은 학문의 병폐를 바로잡는 과제와 사회적 성찰성을 높이고 이 나라를 성숙시키는 과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잠깐 교육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한국 교육운동에서 공교육 정상화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먼저 학벌문제가 있다. 공교육 정상화만으로는 학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학벌문제는 학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를 학벌로 만드는 ‘사회적 보상의 병적인 차별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뜯어고치는 것만으로 학벌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병적인 차별적 보상을 뜯어고쳐야 한다. 예컨대 지방대는 원서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극단적 차별체계를 고쳐야 한다. 학벌문제의 개혁은 교육을 넘어선 한국사회의 운영방식을 바꾸는 문제다.
또한 공교육 정상화는 보통 학교 정상화를 뜻하는데, 이렇게 되면 교육의 소수자 문제를 망각하는 게 된다. 교육개혁을 학교개혁과 등치해서는 안 된다. 고등학생만 해도 2-3만명에 이르는 ‘학교 부적응자’의 문제가 있다. 그 중의 한 친구는 ‘학교 밖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은 이런 친구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학생들이 현재의 획일주의, 국가주의, 경쟁주의, 학벌지향 학교에 가는 것을 너무나 괴로운 일로 여기고 있는 데도 그렇다. 공교육 정상화는 공교육 다양화를 뜻해야 한다. 학교는 하나의 교육제도일 뿐이다. 문화적 다원화의 시대에 맞게 공교육 다양화를 이루어야 한다. 홈스쿨과 대안학교는 필연적 추세다. 다양한 유형의 학교와 학습방법을 인정하고 각자의 처지에 맞는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이 절실하다.
조현연=추상화 담론은 부정될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기본적 역할이며 능력이다.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문제는 그것이 대중과 소통하고, 현장과 소통했느냐다. 지식인들이 이념으로 먹고 산다면, 대중들은 자기 이익으로 먹고 산다. 그리고 대중들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서만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의미있는 역사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널리 선전하는 것이다. 좋은 사례들을 발굴하고 적극 홍보하는 것은 언론을 포함한 지식사회가 해야 한다. 조직화로 이어지는 운동의 주체 형성 관점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대중들은 왜 저항하고 참여하는가, 왜 참여하거나 저항하지 않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급식조례제정이나 브라질의 참여예산제 등이 대중들 스스로 참여한 역사적 경험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병권=지식사회, 진보적 지식사회의 무기력과 관련된 제일 큰 문제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 나는 그 현장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사회 운동이 일어나는 현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인들 자신의 삶의 현장이다.
첫째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실제로 과거에는 많은 재야 운동 단체들, 학술단체들이 있었다. 80년대에는 정말로 많은 지식인들이 현장에 침투했다. 지금은 반대 의미로 대학으로 편입됐다. 침투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편입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다. 지식인들이 현장에서 떠난 것이다. 그리고 기능적 지식인들이 되어갔다. 항상 정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인가만 고민하지, 근본 물음은 안 던진다. 현장의 치열함과 분리돼 있는 것이 문제다.
둘째, 지식인들의 자기 삶으로부터 분리가 심각하다. 다른 대상에 대해선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는다. 자기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지식생산도 개인적으로 하고, 소비도 학회 영역 등 제한돼 있다. 국가기관이나 언론기관이 던져준 것을 단순히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은 단순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성 복원이 답이다. 사회운동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현장성을 가져야 한다. 연구하고 교육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식인들이 운동을 구성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에 대해 말하는 지식인보다 운동하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생산에 대해서 말이다. 다수적 권력에 맞선 소수적 지식인들의 공동체 구성을 적극적으로 사고했으면 한다. 연구와 교육의 상상력을 대학 체계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조희연= 지식 생산의 대학화에 대한 지적이 있는 듯하다. 지식 생산은 대학만 하는 게 아니라, 80년대 대학 외부의 학술 운동도 했다. 그게 소실돼 가고 있다. 재야적 지식인들이 제도권 지식인이 돼가면서 이런 현상이 있다. 대학 지식인들의 개인주의화, 보수주의화라고 할 수 있다. 진보의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진보는 자기 혁신, 자기 희생하면서 대중의 과제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희생의 에토스 같은 게 없어져 가고 있다. 또 하나는 정책적 지식 생산이 활성화 돼야 한다는 점이다. 말이라든지 이념으로만 말할 수 없는 구체적 지식 생산이 정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진보가 문제제기형 집단에서 대안적 집단으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정책적 지식생산이 확장 못 돼 문제다.
정책적 지식생산이 창조해야하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북유럽이 어떻다 하는, 이런 수입형 지식생산만으로는 우리 사회 지식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나도 느낀다. 지식 생산자로 가는 병목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경험들을 보편화 이론화하는,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다른 나라에서 못 배우는 것을 창조하는, 창조적 지식생산으로 가는 병목지점에 서 있다. 우리 안의 보편성도 얘기하는 게 내 개인적 화두다. 창조적 지식생산으로 가는 병목지점을 돌파해야한다.
신정완=대학환경이 많이 변했다. 70~80년대 진보적 지식인들은 상당히 지사적이었다. 정치적 폭압 탓이었고 개인적 헌신성도 컸지만 대학환경이 굉장히 느슨해서 이러한 지사적 지식인의 형성에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이제 대학도 조직으로서 합리성, 효율성, 수월성을 추구하면서 일반 직장과 큰 차이가 없어져가고 있다. 큰 대학은 옛날부터 보수적이었고, 작은 대학은 연구기능 수행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대학 내부 지식인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한국 지식사회 전체 차원에서 자원의 재분배를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노동 문제의 구체적 현안에 대해서는 현장과 직결된 조직에서 일하는 지식인들이 더 많이 안다. 많은 사회적 현안과 관련해서 교수들은 서론에 대해서만 말하고 말기 일쑤다.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의 경우에도 대체로 사회공학적 지식이라기보다는 광의의 인문학적 지식을 연마한 분들이다. 비판과 성찰에는 익숙하지만 구체적 대안을 말하기는 힘들다. 문제의식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사이에 괴리가 있다. 앞으로는 대학 외부에 있는 지식인들에게 기회가 더 넓어지는 게 적절한 역할분담일 수 있다. 예컨대 신문사 같은 곳에서도 대학 외부에 있는 현장형 지식인들에게 더 많은 지면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은 사회공학적 지식에 더 눈 떠야 한다. 교수들의 경우에는 중기적 대안 개발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나 노동조합 등 조직에 묶여있는 지식인들은 현안은 잘 알지만, 조직의 이해관계에 묶여 있는 측면도 있고 중장기 대안을 탐구할 여유도 없기 때문에, 교수들은 이 부분을 메워줄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교수들이 대학 외부의 지식인들로부터 배울 게 더 많은 것 같다.
박명림=유럽의 선진국들이 사회발전을 위해 탈냉전 전후에 제일 심혈을 기울인 것이 교육개혁이다. 좋은 시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개혁은 좋은 사회를 위한 알파요 오메가다. 좋은 교육 없이 좋은 사회는 불가능하다. 가장 먼저 진보적 지식인은 지식이 갖는 근본적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헌신성이다. 즉 인간문제, 사회문제의 개선을 위한 ‘사회적 지식’의 문제다. 현실에 대해 희망, 비전,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둘째는 구체성과 책임성이다. 지식인은 추상적 유토피아를 말해서는 안된다. 이제 저항과 비판을 넘어 창조와 건설을 위한 현실적 구체적 유토피아를 말할 때다. 따라서 지식인의 자기책임성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회, 특히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책임있는 정책대안을 제공하는 문제다.
셋째가 소통성이다. 사회와 지식 사이의 쌍방향 소통이 중요하다.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높은 전문성 역시 중요하다. 쌍방향 소통성을 생각한다면 이제 진보의제의 확장을 생각할 때다. 사민주의 같은 옛날 사고는 안 된다. 발전국가, 법치국가, 복지국가, 민주국가를 포괄하는 사회국가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회국가 의제를 심화시켜, 자유, 소수자, 평등, 인권 등 고전적 진보의제를 놓치지 않으면서, 행복, 좋은 사회, 삶의 안정, 평화 등 새로운 의제와 정책영역을 개척해야한다.
넷째는 민주성이다. 즉 지식사회 구성의 문제이다.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인문적 비판적 사유가 차단될 때 지식의 사회헌신 기능은 현저히 약화되며,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발전 역시 어려워진다. 근대성, 민주주의, 이성, 탈근대 등을 말하고 있지만 연고주의, 학벌, 폐쇄적 전공주의, 보수성 등을 보면 근대화와 민주화가 가장 늦은 게 한국 지식사회가 아닌가 한다.
다섯째는 의제설정 능력이다. 한국에서 주요 사회의제와 학문의제는 정부와 언론에 의해 창출된다. 개혁의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 지식사회의 새 동력은 이제 사회 전체를 위한 의제 설정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지금 지식의 가장 본질적인 역할을 고민해야할 때이다.
박태균=학문의 보수화, 그리고 학문의 자기만족 시스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더 이상 사회와의 소통, 사회에의 공헌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식인들 하나하나의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우선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전문성을 갖추면서 우수한 연구와 교육을 쏟아낼 수 있는 자질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의 분야에만 머물러 있었던 좁은 학문 분야를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의 개발이 중요하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전문성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자가 되어야만 그 활동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이 교육인데, 이것은 학문 후속세대와 관련되는 것이다. 진보적인 학자들을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조직적이기 이전에 개인적 차원에서 수행해 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점차 대학원생들의 관심이 신자유주의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점은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후속세대를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울러 많은 분야에서 싱크탱크의 조직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진보와 함께 ‘전문성’, ‘현실성’, 그리고 ‘대중성’이 요구된다. 예컨대 탈민족주의 담론은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현실성’과 ‘대중성’에서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문제가 충족되지 못할 때에는 새로운 대안은 그저 또 다른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의 문제 중 하나는 인재 풀이 없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 동안 진보가 충분한 인재풀을 제공할 만큼의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희연=지식 생산의 대학화에 대한 지적이 있는 듯하다. 지식 생산은 대학만 하는 게 아니라, 80년대 대학 외부의 학술 운동도 했다. 그게 소실돼 가고 있다. 재야적 지식인들이 제도권 지식인이 돼가면서 이런 현상이 있다. 대학 지식인들의 개인주의화, 보수주의화라고 할 수 있다. 진보의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진보는 자기 혁신, 자기 희생하면서 대중의 과제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희생의 에토스 같은 게 없어져 가고 있다. 또 하나는 정책적 지식 생산이 활성화 돼야 한다는 점이다. 말이라든지 이념으로만 말할 수 없는 구체적 지식 생산이 정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진보가 문제제기형 집단에서 대안적 집단으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정책적 지식생산이 확장 못 돼 문제다.
정책적 지식생산이 창조해야하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북유럽이 어떻다 하는, 이런 수입형 지식생산만으로는 우리 사회 지식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나도 느낀다. 지식 생산자로 가는 병목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경험들을 보편화 이론화하는,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다른 나라에서 못 배우는 것을 창조하는, 창조적 지식생산으로 가는 병목지점에 서 있다. 우리 안의 보편성도 얘기하는 게 내 개인적 화두다. 창조적 지식생산으로 가는 병목지점을 돌파해야한다.
김호기=진보진영과 지식사회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지식사회의 역사성이다. 냉전분단체제는 지식사회, 특히 대학사회 안에서 진보적 담론을 몰아냈고, 보수가 주도하는 담론이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했다. 87년 이후 진보 담론은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그것이 기존의 제도화된 대학사회 안에서 재생산되기는 어려웠다. 민주화 과정에서 대학사회를 주도한 것은 보수 담론이라기보다 오히려 탈정치화된 실용주의 담론이었으며, 이는 특히 세계화 시대에 더욱 강화돼 왔다. 진보 담론이 후발 주자의 불이익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내재된 지나친 추상성으로 인해 점차 학생들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져 가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돼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청년실업에 대해 진보진영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가.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진보진영의 주요 지지그룹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전문성의 강화가 요구된다. 사회운동과 자본주의 비판을 넘어서서 현안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 담론의 강점은 전체 사회의 비판과 성찰이라는 거대 담론에 있으며, 이런 거대 담론은 ‘질주하는 세계’로 특징지어지는 세계화 시대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거대 담론은 절반의 담론이기도 하다. 나머지 절반은 구체적인 대안 제시로 채워야 하며, 진보적 대안을 갖고 보수와 생산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이제까지 진보개혁세력의 취약점으로 지적돼 온 외교, 안보, 성장, 기업 등에 대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정책들을 개발하고 이를 추진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앙드레 고르가 이야기했듯이 ‘경영학적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의연히 맞서는 동시에 권력을 진보적으로 운영하는 이중 전략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전문성의 강화가 이뤄져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진보 진영을 신뢰하고 기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정리/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공공성 무기로 자본과 싸움 나설때
진보개혁 진영 운동 전략은
조희연=신자유주의와 포스트 민주화시대 진보운동의 재구성이라는 과제가 있다. 상황을 87년 체제에 대한 일면적 평가만으로 봐도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라는 양면이 있다. 민주화와 세계화가 운동에 미치는 효과가 있다. 일종의 중심적 정체성, 패권적 정체성을 민족국가의 정체성으로 상대화시키는 측면 있다. 운동은 그것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운동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지금의 진보운동의 특징은 단일중심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보다 운동진영 내부의 위계성이 약화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새로운 연대성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이 필요하다.
진보운동의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운동의 정치조직이 발전하면서 관료화, 관성화, 기득권화된 측면이 있다. 노조 간부가 돈 먹는 질서가 정당화할 수 있고, 억울한 측면이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회사와 타협적 관계에서 기득권 갖는 지점이 있다. 이런 진보운동 내적 문제 성찰하고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결국은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개발독재와 싸우는 과정에서 진보의 경계가 고착화되어 있다. 노동운동을 염두에 두면 신자유주의 맥락에서 노동자들을 주체적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가져오는 노동계급 해체적 이질화가 있다. 외국인 노동자/ 국내 노동자, 정규직/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 역사는 부단히 노동계급의 자기구성이 있다. 민족국가의 노동자 계급 정체성에서 신자유주의의 노동자 계급 정체성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민족국가를 뛰어넘는 형태의 진보진영을 재구성해야 한다.
제도화는 민중의 성취에 의한 것이 있다. 그러나 딜레마가 있다. 예를 들면 국가유공자 범주라는 것이 훨씬 상대화되거나 해체돼야 한다. 국가신화의 근거가 되는 측면 있다. 문제는 과거에는 호국유공자 형태였는데 이제는 민주유공자 형태로 국가주의 강화하는 지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를 운동이 새로운 의제로 고민해야될 지점이 있다. 의도하지 않은 건데, 국가인권위는 인권운동의 성취물이다. 인권운동의 급진화 통해 전진시켜야 하는 과제다. 제도화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최근에는 진보진영 핵심담론이 공공성이다.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지만 자본공화국이 돼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영역에서, 공공성 담론을 갖고 자본과 힘겨운 싸움을 전방위적으로 새롭게 해야 하는, 자본과 사회주의적 싸움이 아니라 공공성 매개로 한 자본과의 싸움이 있어야 하고, 이 점은 자본이 자기축적기반 강화한 뒤에는 자본의 전사회주의적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 로스쿨도 그런 것이다. 잔여 영역들을 친자본적 논리로 재편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평준화 해체 문제도 그렇다. 계급적으로 불평등화된 시장질서와 불일치하는 개발독재 시절 확립된 평등주의적 교육질서를 재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장불평등과 조응하는 형태로 교육 재편할 것을 요구하느 것이다. 우리는 공공성, 민주주의 담론 확장해서 자본공화국을 민주적으로 규율하는 게 새로운 의제 아닐까 한다.
신정완=앞으로 진보적 사회운동이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보수세력과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동안 공공성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교적 설득력이 약했던 것은 주로 중간계층이 제기한 담론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고 본다. 공기업 노동자, 교사, 교수 등 그동안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계층이 새로이 시장의 압력이 강화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공공성 담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해온 사람들이 훨씬 많다. 공공성 담론이 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더 하위계층의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언하는 집단과 발언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집단 간에 어느 정도 괴리가 있었다.
그리고 공공성 문제와 관련하여 시장은 반공공성, 국가는 공공성을 대변한다는 식으로 단순 도식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시장이냐, 어떤 국가냐, 시장과 국가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시장과 국가의 상호작용을 정교하게 사회공학적으로 바라보아야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고병권=앞에서 진보진영의 핵심 담론을 ‘공공성 강화’에 두시는 것에 약간 드릴 말씀이 있다. 사유화라는 자유시장경제의 압력 아래서 공공적 가치를 제기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선 ‘공·사의 영역’과는 다른 제도-비제도, 혹은 제도-제야의 맥락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90년대 들어 ‘재야’라는 말이 갖는 중요성이 사라졌지만(재야 세력들의 제도권 편입으로.), 재야에는 여전히 많은 운동들이 있고 운동세력이 존재한다. 특히 많은 소수자들이 재야에 있다. 지식인들이 재야에 분명히 다가가야 한다.
둘째, 공공영역이란 사실 상식의 영역,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중첩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편견이 심한 영역이기도 하다. 공론장에는 항상 암묵적인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식적 규칙들의 폭력 때문에, 배제되는 것이 소수자다. 우리는 우리의 보편 권리를 그들에게도 인정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답변이다. 그것은 ‘우리의 규칙’을 그들에게도 적용해줄 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영국에서 ‘시민결합법’이 만들어졌다.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합법화된 것이다. 어떤 시민권이 그들에게도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민권 자체는 문제삼지 않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합법화된 결혼에 대해서만 우리가 가족을 인정하고, 의료보험 같은 제도를 연계시키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의 권리를 우리가 인정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인정된 권리에 한해서만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앞서 몇몇 선생님들이 자본과 권력이라는 체계의 요소가 우리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는 것을 우려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생활세계야말로 오염되고 왜곡된 영역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김명인=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관련을 어떻게 맺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90년대 초반까지는 혁명을 통한 권력 획득과 그를 통한 총체적 사회변화를 추구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완연히 소수파일 것이다.
그 외에는 두 방향이 있을 것이다. 국가권력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국가영역과 교섭하고 참여하고 생산적 긴장을 가지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기존의 공공성 규칙을 보수적 점진적 수용을 통해 감내하는 상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종의 탈국가적이고 무정부주의적 저항운동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긴장이 있어야 한다. 한쪽만 취할 경우, 문제가 된다. 어쩌면 탈국가, 탈민족적 추동력이나, 개인화의 추동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고도의 전략일 수 있다. 탈국가, 탈권위, 탈공공 등의 운동이 총자본에 유리한 국면으로 포섭되어 들어가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경계하면서 국가나 사회 영역, 이런 것들의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힘과 세계화 국면에서 그것이 갖는 긍정적 측면을 어떻게 잘 결합시키는가 하는 데에 넓은 의미의 운동이나, 진보적 힘들이 추구할 방향이 있지 않을까 한다. 국가사회에 대한 참여전략과 이탈전략 사이에는 굉장히 긴밀한 새로운 차원의 통합과 협력이 있어야 한다.
김호기=국기업과 투쟁해야할 영역이 있고 공존해야할 영역이 있다. 국민들이 진보진영에 불만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는데, 혹시 진보진영이 너무 투쟁만 강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자면, 일종의 이중전략이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운동의 급진성이 중요하다. 운동은 제도가 아니라 운동일 따름이다. 운동은 끊임없이 제도 혁신을 모색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운동의 급진성은 계속 유지되거나 강화될 필요가 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 운동은 적절한 사례다. 동성애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소수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운동은 정부와의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도 구축해야 한다. 21세기가 과거와 다른 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는 사적 영역에 속한 문제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상품화 전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늘날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과 중첩돼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회운동은 정부와의 적극적인 거버넌스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친정부라는 비판을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계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21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정치질서이자 참여민주주의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인적자본의 문제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인적 자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 문제는 성장동력과도 연관돼 있는데, 어느 나라이건 물적, 제도적 자본 못지않게 인적 자본이 핵심 자원을 이루고 있다. 문제는 우리 인적 자원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수 인력 해외 유출, 기러기 아빠로 상징되는 조기유학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중국은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협인데, 중국 이공계 인력 육성 전략을 보면, 과연 언제까지 우리가 우수한 인적자본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가 현재 대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교육정책이다. 평준화 모델이 수용된 것은 개발독재 시대의 산업화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 산업화에서는 평균화된 인적 자본,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인적 자본의 투입이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화 시대에 이런 평준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모델인가. 이에 대해서는 활발한 토론과 새로운 교육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요청된다. 개인적으로는 교육정책에서 공공성을 주로 하되, 과도한 규제가 있다면 완화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립형 사립고 등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도 전향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교육정책은 흔히 ‘3불 정책’으로 대표된다. 고교평준화 유지, 본고사금지, 기여입학제 금지가 그것이다. 이 이슈들은 사안별로 성격을 달리하는데, 개별 사안에 따라서 교육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인적 자본의 경쟁력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고교평준화는 유지돼야 하지만, 대학본고사는 자율이라는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기여입학제는 허용돼서는 안되는데, 계급사회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서 어떤 것은 강경하게 유지하고, 어떤 것은 온건하게 재검토하며,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풀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홍성태 상지대 사회학
조현연=추상화 담론은 부정될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기본적 역할이며 능력이다.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문제는 그것이 대중과 소통하고, 현장과 소통했느냐다. 지식인들이 이념으로 먹고 산다면, 대중들은 자기 이익으로 먹고 산다. 그리고 대중들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서만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의미있는 역사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널리 선전하는 것이다. 좋은 사례들을 발굴하고 적극 홍보하는 것은 언론을 포함한 지식사회가 해야 한다. 조직화로 이어지는 운동의 주체 형성 관점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대중들은 왜 저항하고 참여하는가, 왜 참여하거나 저항하지 않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급식조례제정이나 브라질의 참여예산제 등이 대중들 스스로 참여한 역사적 경험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병권 대표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
박태균 서울대 역사학
공공성 무기로 자본과 싸움 나설때
진보개혁 진영 운동 전략은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
김명인 인하대 국문학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