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부수석 등 7명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상고심 판결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 적폐수사의 ‘만능키’로 쓰인 직권남용죄에 대해 첫 판단을 내놨다. 대법원은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라는 범죄 구성 요건을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며 직권남용 적용 범위를 좁혔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이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를 받아 업무를 수행했어도 해당 업무가 절차적·통상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로 검찰은 수사할 때 하급자의 행위가 법령상 의무에 위배되는지 현재보다 정밀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받게 됐다.
■ “원심의 ‘의무없는 일’ 법리 오해·심리 미진”
30일 대법원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상고심 선고에서 11명의 대법관이 특정 문화·예술 인사들에 대한 지원 배제 등이 유죄라고 본 원심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하급자의 ‘의무없는 일’과 관련한 14개의 유죄 혐의 중 2개를 심리 미진으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2심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직원들에게 각종 명단을 송부하게 하고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게 하는 등 특정 문화·예술 인사들을 배제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과 함께 이들에게 지시한 14개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의 직권남용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시를 받은 하급자가 한 ‘의무없는 일’에 대해 개별적으로 위법한 행위인지 엄격히 따질 것을 요구했다. 직권남용죄의 구성 요건 중 하나인 ‘의무없는 일’에 대한 법리해석을 명확히 하라고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른 공무원, 부서 또는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앞서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기소된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에서도 비슷한 논리로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서 검사에게 적용된 인사 원칙이 인사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실무 담당자가 ‘의무없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날 판결에 대해 박정화·민유숙·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경제적 지원에만 머물고 창작행위와 내용에 간섭하지 않는 지원’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대·박상옥 대법관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해야 한다고 별개 의견을 냈다.
■ 직권남용 검찰 수사 앞으로 어떻게?
이번 대법원 판결로 검찰의 직권남용 수사도 더 정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상급자의 직권남용이 증명되어도 하급자의 행위가 법령에 어긋나는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유죄를 받아내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이전의 직권남용 사건은 사례 자체가 적고 상급자의 지시와 하급자의 행위 모두 위법성이 명백해 논란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의 ‘적폐수사’가 여러 건 진행되면서 직권남용죄 적용이 잇따르고 ‘직권’이나 ‘의무없는 일’의 해석에 따라 판결 결과가 엇갈리면서 일관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관여된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마 의혹 사건이다. 검찰과 조 전 장관 쪽은 민정수석의 재량권의 범위와 특별감찰반원들의 행위가 법령상 의무를 위반한 위법 행위인지를 놓고 다투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은 검찰이 하급자가 하는 행위를 모두 의무없는 일로 의율하는 것을 제한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검찰이 무죄 가능성에 대비해 공소장 변경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앞으로 검찰이 직권남용으로 기소하기 위해서는 의무없는 일을 한 상대방이 지켜야 하는 법령상 의무가 무엇인지 그 사람이 지켜야 하는 원칙, 기준, 절차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우리 고한솔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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