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구체적 법리 설시 없고 구멍은 여전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하려면
① 행위가 직무상 범위에 포함돼야
수석부장 “재판 관여 권한 없다” 발뺌
② 지시로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해야
일선 판사 “내 의지로 선고·양형 수정”
직권남용 형식논리로 엄격 해석하면
‘권력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불신 커져
독일에선 법왜곡죄 최고 징역 5년
구체적 법리 설시 없고 구멍은 여전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하려면
① 행위가 직무상 범위에 포함돼야
수석부장 “재판 관여 권한 없다” 발뺌
② 지시로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해야
일선 판사 “내 의지로 선고·양형 수정”
직권남용 형식논리로 엄격 해석하면
‘권력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불신 커져
독일에선 법왜곡죄 최고 징역 5년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17. ‘직권남용’이라는 성긴 그물망
“다음주 대법원에서 국정농단 판결이 선고된다는데, 직권남용에 대한 법리가 구체적으로 설시되면 그 법리에 따라 (재판이) 진행될 필요도 있습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직권남용 법리를) 설시한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구체적 설시가 없다면 기존 논문이나 대법원 판결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한번 (관련 논문을) 검토해주세요. 우리도 검토해보겠습니다.”
가토 다쓰야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는 임성근(56·사법연수원 17기)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첫 정식재판 날인 2019년 8월23일, 이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송인권)는 손수 찾은 논문을 검찰과 피고인 쪽에 소개했다. ‘직권남용죄’의 판단 기준을 정리해둔 논문이었다.
직권남용죄(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그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할 때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 직권남용죄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현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물론 전직 사법부 수장까지 피고인석에 세운 죄목이지만, 직권이나 남용, 의무없는 일, 권리행사 방해의 개념이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재판부마다 판단이 엇갈렸다. ‘재판 개입’이란 전례 없는 사태를 심리하는 재판부로서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통해 직권남용 법리를 구체적으로 설시해주기를 바랄 만했다.
바로 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은 반년 가까이 흐른 지난 1월30일에야 나왔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김 전 실장 등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직권을 남용했지만 일부 문제 행위가 또 다른 범죄 구성요건인 ‘의무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엄격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기대한 만큼의 구체적인 법리 설시는 없었고, 그 결과 공직자 부당 행위를 포획할 ‘직권남용’이란 그물망에 빠져나갈 구멍은 여전히 커다랗게 남았다. 앞서 언급한 임 부장판사 재판은 일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지연 의혹 등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혐의 구조나 내용이 비슷해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예고편’으로 불리지만, 선고 결과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상태다.
대법원 판단에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못하거나, 더 강렬한 물음표로 남은 임 부장판사의 주장 세 가지를 짚어봤다. 재판부가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향방까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내겐 신성한 재판에 개입할 권한 없어”
“진행 중인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직무상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건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장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죠. (중략)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 사무의 구체적 사안에 관해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전혀 없습니다. 직무감독권이 있다 해도, 사법행정에 관한 직무감독권이 재판에 대해 지시,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는 될 수 없는 겁니다.”(임 부장판사 쪽 변호인, 2019년 8월23일 첫 재판)
일선 판사들의 판결에 ‘빨간 펜’을 든 임 부장판사는 도리어 재판은 신성하다고 강변하면서 그런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본인에겐 없다고 호소했다. 왜 임 부장판사는 유무죄를 따지는 자리에 ‘재판 신성불가침론’을 꺼내들었을까.
임 부장판사는 2015년 가토 다쓰야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의 이동근 부장판사가 보내온 판결 요약문을 직접 첨삭하고 수정했다. “대통령이 (명예훼손의) 피해자라고 해서 명예훼손죄를 ‘함부로’ 인정해서 안 된다고 하면 그쪽에서 약간 또는 매우 서운해한다.”(2015년 11월17일 임 부장판사가 보낸 이메일) 공인이든 사인이든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기존 판단은 공인인 박근혜의 명예는 훼손되지 않았어도, 개인의 명예는 훼손됐다는 판단으로 바뀌었다.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인사·평정권 등 사법행정 권한을 각급 법원장과 수석부장이 위임받아 행사하는데, 형사수석부장판사였던 임 부장판사가 이 권한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게 검찰의 시각이다.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하려면 피고인이 저지른 행위가 피고인에 주어진 이 직무상 권한에 포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남용할 직권이 없으면 자연히 남용도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임 부장판사 주장대로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다면 그는 단지 수석부장판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해서는 안 될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된다. 이 경우, 자신이 가진 지위에 기대 권한에도 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 죄질이 더 나쁘지만 직권남용으로는 그 행위를 처벌하기 어려운 모순이 생긴다. 임 부장판사는 ‘재판 개입을 해도 되냐, 안 되냐’의 당위적 주장을 끌어들여와 ‘재판 개입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판단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예를 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에게 다스 소송 법리와 처남의 상속세 절감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1심 재판부는 “대통령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에는 해당되지만,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관련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상속세 절감 방안을 검토하게 하거나, 다스 소송을 지원하게 하는 것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직무권한 밖의 일이라는 취지에서다.
이에 따라 ‘직권이 없으니 남용도 없다’는 형식논리로 빠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대법원은 그간 판례에서 “법률에 명시되지 않아도 법·제도를 종합적, 실질적으로 관찰해” 그 직무권한의 범위를 판단해왔지만 법리를 둘러싼 혼란은 계속됐다. 그럼에도 1월30일 대법원은 직무권한 의미에 관해선 판단하지 않았다. 한 판사는 “해당 재판부 외에는 누구도 재판에 관여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데, 임 부장판사가 그 직권을 기초로 해서 일선 재판부에 부당한 영향을 미쳤는지 따져봐야 한다. 인사·평정권에 대한 일선 판사의 두려움을 이용해 재판에 관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시가 아닌 내 의지에 따라 수정”
직권을 남용했다고 해서 바로 범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의 지시나 요구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결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1월30일 대법원이 강조한 지점이다. 대법원은 나머지 범죄 구성요건인 ‘의무없는 일’을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공무원일 때 그가 한 일이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한 하급자의 행위가 관련 법이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지까지 엄밀히 따져야 한다는 취지다.
임 부장판사 사건에 대입해보면, 임 부장판사의 요구에 따라 선고 내용이나 양형 이유를 수정한 일선 판사가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되는데, 그가 판결을 수정한 것이 과연 직권남용에서 말하는 ‘의무없는 일’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된다. 검찰은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상 독립(헌법 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을 위반해 일선 판사가 의무없는 일을 하게 됐다고 본다. 재판은 법원 밖의 압력뿐 아니라 법원 내부의 인사·평정권자로부터도 독립돼야 하는데, 대법원장부터 법원장, 수석부장에 이르는 사법행정권자의 지휘·명령에 일선 재판부가 영향을 받아서 안 된다는 대원칙이 깨졌다는 주장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심의관한테 재판 개입 문건을 작성하게 한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재판 개입을 당했다는 당사자가 정작 “나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소신껏 판결했다”고 답한다면 어떻게 될까. 앞서 임 부장판사 재판에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된 일선 재판부 재판장이 증인으로 나서 실제로 그렇게 답변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체포치상 사건을 심리했던 최창영 전 부장판사(현 변호사)의 지난해 10월23일 증인신문 내용이다.
“증인은 피고인(임성근 부장판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죠?”(임성근 부장판사 쪽 변호인)
“저랑 여러 차례 같이 일했고 친합니다. 그때 당시 제가 받았던 느낌은 ‘이 판결이 나가서 법원이 비난을 받는다기보다는 재판장인 제가 언론이나 여론에서 비난받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조언이라 생각했습니다.”
“민변 사건과 관련해서 절차 진행 과정이나 판결 선고, 판결문 수정 과정에서 재판상 독립을 침해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가토 다쓰야 사건을 맡았던 이동근 부장판사 또한 증인신문(지난해 9월9일)에서 “(간섭이) 지나치다, 관심이 되게 많네 정도는 생각했어도, 임 부장판사가 내게 (선고 내용 수정을) 지시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임 부장판사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권남용죄의 보호법익은 ‘국가 기능의 공정한 행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 “수석부장 조언은 참고만 했다”는 일선 재판부 재판장이나 법원행정처 심의관 개인의 증언은 결정적 변수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해선 안 되는 일을 했는지’ 규범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인사상 불이익을 입을까봐 어쩔 수 없이 원래 결론과 다르게 판단했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직권남용 성립이 어렵다는 상반된 분석도 있다.
“직권남용의 남용은 무조건 경계해야”
“헌법에서 천명하는 형사법의 대원칙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직권남용은 엄격하게 해석돼야 한다.”(1월30일 대법원 박상옥 대법관 별개의견) 형사처벌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직권남용의 남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건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직권남용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법 조항을 이용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보복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고,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을 초래하며, 직권남용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 검찰 권력이 비대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는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광범위한 해석도 문제지만 소극적 해석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형식논리에 갇혀버리면 권력을 사유화해 비위 행위를 저지른 공무원을 형사처벌할 길이 없어진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그럼 이 같은 불법행위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일반 시민을 향해 있던 형법의 그물망이 권력자의 책임을 묻는 수단으로 쓰이게 되니 법 해석과 적용에 소극적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다.
독일은 법관, 기타 공직자 또는 중재인이 법률사건을 지휘하거나 재판을 함에 있어 일방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법을 왜곡하면 1년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는 ‘법왜곡죄’로 법률가를 처벌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입법의 흠결로 생긴 처벌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직권남용은 필요 한도 내에서 적정하게 활용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2월14일 임성근 부장판사의 1심 선고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target="_blank">sol@hani.co.kr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9년 5월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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