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복희씨가 사는 제주도 집에서 찍은 모습. 김비 제공
오늘은 무수히도 지워지고 또 지워졌을, 한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려 한다. 70여년 전, 배다른 자식으로 태어나 배다른 동생 다섯을 건사하고, 가난한 가계의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한국전쟁 상이용사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갔던 여자, 박복희씨.
너랑 나랑 둘이 살자
그녀 나이 열여섯, 처음 본 남자를 따라 집을 나서야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함께 살아야 할 남자가 한쪽 손이 없고, 한쪽 눈이 없는 사람이란 걸 뒤늦게야 알고서 참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박힌 총알 파편 때문에 며칠에 한번씩 발작으로 거품을 물고 뻣뻣하게 굳어가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 발작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 나날이 술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서 매일 두려움을 삼키며 하루하루 안간힘으로 살아내야 했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의 뼈는 남자의 집에 묻어야 한다는 어불성설을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믿고 살던 시대, 그녀에게는 스스로의 여린 몸조차 제대로 지킬 곳이 없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를 서방이라고 믿고 버텨야 했던 복희씨. 도망치기도 여러번, 붙들려 오고 다시 붙들려 오면서,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았다. ‘사랑은 지랄!’ 때늦은 자식의 물음에 그렇게 일갈하던 복희씨다. 무엇으로 낳았든 어쨌든 낳은 자식이었으니 최선을 다해 애써 키우며 살다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외로움에 폭력에 못 이겨,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식새끼들을 버리고 집을 나서야 했던 복희씨.
둘째인 내가 혼자서 큰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복희씨는 몇날 며칠 소주잔을 들이켜며 울었다고 한다. 더 이상 사내로 살 수 없어 계집으로 살아가겠다는 수술을 해서가 아니라, 셋 중에 제일 허약하고 건강하지 못했던 것이 혼자서 그 큰 수술을 버텨내야 했던 것 때문에. 모든 것이 그것들을 버리고 집을 나온 내 탓은 아니었을까, 복희씨는 가슴을 치며 울고 또 울었다. 못난 어미 탓이 아닌가, 땅을 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런데 수술 뒤에 다시 만난 둘째는 한번도 본 적 없던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안심이 되었던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이야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내 새끼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 되는 일이지, 복희씨는 자신이 버렸던 둘째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세상의 모든 편견을 넘어서며 딸이 된 아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애초부터 아들이 아니었던 게지, 사람이 잘못 태어날 수도 있는 게지!’ 당신이 먼저 목소리를 높이며 둘째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복희씨는 이다음에 너랑 나랑 둘이 살자, 둘째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도 혼자되고 너도 혼자되면, 그때는 서로 기대서 둘이 알콩달콩 살아보자고. 또 다른 버려진 가시나 하나 데려와 서로 의지가 되어주며, 그렇게 살아가자고.
그런데 둘째에게 날벼락처럼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평범한 보통 남자와 결혼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복희씨는 결혼 소식이 놀랍기도 하면서, 재가한 남편 자리의 시퍼런 서슬에 짓눌려 제대로 된 뒷받침 하나 해주지 못하고, 얼굴마저 제대로 볼 수 없는 현실이 그저 한스럽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둘째의 살림에 보탬이 되면 좋으련만, 움켜쥔 것 없어 어미 노릇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한스럽기만 했다. 사내라는 것들은 만나는 것들마다 어쩜 그리 뻣뻣하고 드세기만 한지, 서방 자리, 마누라 자리 따지며, 하늘땅 가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뒤늦게 다시 만난 자식새끼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재가했지만, 그 자리 역시 고통스럽고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언젠가 당신이 버렸던 자식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또 버티고 버티는 나날들이었다.
비로소 다시 혼자가 되었던 칠십 즈음 어느 날, 복희씨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둘째와 그 사위를 그제야 만나게 되었다. 초라한 몰골이 사위에게 부끄러웠지만, 그럼에도 둘째가 같이 사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꼭 보고 싶었고, 또 확인하고 싶었다. 설마 둘째마저 당신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복희씨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 남자를 만나고 다짐이라도 받아야 되겠다 싶었다.
선한 눈매와 둥글둥글한 인상. 뻣뻣하거나 드세지 않고 둘째와 좋은 친구처럼 곁에 있어줄 사람. 그 역시 상처가 있어 우울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 위로하며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 복희씨는 그를 보자마자 ‘박 서방’이라고 불렀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서로 위하며 제발 재미있게 살거라!’ 노래를 불렀다. ‘잘 부탁허네, 잘 부탁해!’ 박 서방의 큰 손을 붙들고서, 따가운 여름 제주 햇살에 새카맣게 탄 눈가를 찍어냈다.
이제 혼자되었으니, 복희씨는 마음껏 가고 싶은 데를 다녔다. 둘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햇살 잘 드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자그마한 아파트단지 둘째의 집으로 들어서니, 벽 한쪽을 차지한 커다란 텔레비전이며 책장이며 소파에 에어컨까지, 사는 모양이 제법 그럴듯했다. 당신 없는 집을 어렸을 때부터 돌봤던 것이 둘째라는 걸 건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서툴고 엉망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24평 작은 아파트는 꽤나 깔끔했다. 작업실처럼 꾸민 베란다도 둘러보고, 음식 재료들을 선반에 정리해 한곳에 몰아 놓은 것도 확인하며, 복희씨는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를 위하며, 무조건 재미있게 살아야 해!’ 그 말만 반복했다.
둘째가 동네 목욕탕이나 제대로 다닐까, 복희씨는 제일 큰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둘째를 채근해 나섰다. ‘아유, 좋다! 아유 좋아! 우리 딸, 우리 큰딸!’ 목소리를 높이며, 둘째 앞에 든든한 지킴이로 큰 목욕탕을 휘젓고 다니다가 욕탕 턱에 머리를 부딪혀 뚝뚝 피를 흘렸던 복희씨. 소스라치게 놀라 둘째는 그녀의 상처를 살폈고, 다행히 눈이 아니라 이마 한가운데 작은 상처로 남은 째진 자국일 뿐.
복희씨는 반창고 하나를 훈장처럼 이마에 붙이고서 놀란 둘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제발 조심 좀 하시라고요!’ 잔소리를 하는 둘째에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냐?’ 하시며 복희씨는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고 다시 또 목욕탕을 휘젓고 다녔다. ‘엄마, 욕탕에는 들어가면 안 돼요!’ 둘째의 걱정에, 가죽만 남은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걱정 말어!’ 껄껄 웃어버리고 마는 우리 복희씨.
나의 생애 가장 위대한 여성
인간의 역사 위엔 존경받고 기억되어야 할 여성이 무수히 많은 걸 알지만, 나의 생에 가장 위대한 여성은 단 한 사람, 복희씨였다. 자식 버리고 도망친 년, 지독하고 뻔뻔스러운 년, 사람들은 편협하고 부당한 말들로 그녀의 역사를 난도질하려 하겠지만, 딸이든 아들이든 그녀의 자식으로서 나는 오늘 그녀의 생을 다른 이름으로 대문짝만하게 기록하려 한다.
아들의 생으로도, 딸의 생으로도 변함없이 나에게 가장 위대한 여성, 복희씨. 모성으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이 지독한 현실과 온몸으로 맞섰던 한 사람이기에 찬사받아 마땅한, 나의 복희씨. ‘어머니’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 속에, 나와, 당신이 지워버렸던 그 이름.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