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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재난 이후, 다르게 만나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

등록 2020-03-28 14:32수정 2020-03-28 16:20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⑤동네 드로잉 모임

조심스레 다시 시작한 드로잉 모임
서로 안위 확인할 거리에서 작업해

어떻게 새로운 만남, 거리 만들지
이전과 다른 상상이 필요한 시기

한참 대화 나누다 깨달은 익숙함
새 관계 방식은 성소수자로 나를
지키려고 되뇌어온 말들과 닮아
코로나19로 중단한 드로잉 모임을 이번달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했다. 경남 양산 동네 사람 몇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조용히 그림을 그리다 오는데, 마을 카페에서 열린 이번 모임에는 드로잉 작업을 하는 박조건형, 김비, 모임 회장(왼쪽부터 시계 방향)이 참석했다. 김비 제공
코로나19로 중단한 드로잉 모임을 이번달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했다. 경남 양산 동네 사람 몇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조용히 그림을 그리다 오는데, 마을 카페에서 열린 이번 모임에는 드로잉 작업을 하는 박조건형, 김비, 모임 회장(왼쪽부터 시계 방향)이 참석했다. 김비 제공

벌써, 한 달 넘게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나를 지키는 일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불필요한 문밖출입을 최대한 줄이는 것. 식료품은 될 수 있는 한 배송받고, 예정되었던 모임도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도 주로 집에서 원고 작업을 하는 터라 한 달의 가택 생활이 별다를 것 없을 줄 알았는데, 갇힌 마음으로 바라보는 창밖은 뿌연 먼지조차 달리 보였다.

갇힌 몸이라고 마음까지 가둬서는 안 되는 일, 지난달에 취소했던 드로잉 모임을 이번달에는 조심스럽게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연락이 왔다. 벌써 4년째 경남 양산에서 드로잉 작업을 하는 신랑과 모임을 시작해, 한 달에 한 번 마을 주민 몇 분과 모이는 자리. 멀리 가지 않고 마을 카페 한구석에 앉아 조용히 자신들의 그림만 그리다 오면 되는 자유로운 모임이다. 많아야 너덧 명,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우리 부부와 모임 회장님 한 분이 참석자의 전부였다. 서로들 무던히도 사람이 그리웠을 테니 일단 모임을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는데, 장소를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집 안에서 일주일, 예상치 못한 변화

고민 끝에 모임 장소를 결정했으니 설레는 마음만 챙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또 있었다. 한 달 동안 사용하지 않은 자동차의 배터리 방전. 다행히 신랑이 지난주에 사용했던 낡은 경차를 타고 나왔지만, 자동차 안에서 또 제대로 차를 관리하지 못한 서로를 두고 네탓내탓 툭탁툭탁.

나를 지키는 일이 스스로를 가두고 내 몸만 돌보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요즘 들어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걸맞도록 삶을 수정해야 하는지, 우리에겐 조금 더 적극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이토록 우울한 봄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새로운 일상을 꾸려야 한다.

모임에 참가하기로 했던 두 분이 약간의 미열 기운이 있어 단호히 모임 참여를 취소했고, 약속 장소에는 결국 우리 부부와 회장님 이렇게 셋. 두 달 만에 얼굴을 본 우리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마주한 서로가 참 반가웠다. 한 자리씩 떨어져 앉아 간단히 안부를 전하고, 회장님은 아예 널찍한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같은 장소에,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멀리 떨어져 서로의 안위를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자리에.

두어 시간 그림을 그리다가 쉬는 시간에 테라스에 나가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딸아이의 엄마인 회장님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 안에 갇힌 일상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열일곱 딸아이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 생활이 걱정스러웠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나흘 온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열불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일주일 잔소리를 마음속에 꽉꽉 눌러놓고 지냈더니,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는지 아이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던 책장 속 책들을 들춰보고, 초등학교 때 사놓고 처박아두었던 디지털 키보드를 꺼내어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 단 한 곡이라도 마스터하겠다며 뚱땅거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집에만 있으니 살이 찌는 것 같다고, 저녁마다 천변을 걷는 산책에 말하지 않아도 먼저 따라나서더라는 이야기.

“중학교 시기만이라도 좀 애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교육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린 너무 애들을 한방향으로만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더 많은 다양한 가능성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아이들인지도 모르는데….”

소통한다는 것에 관해, 새로운 시선으로 달라진 세계를 맞이한다는 일에 관해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전 모녀지간에 꽤 오래 같이 유럽 여행을 했을 때, 근사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올려다보며 이 시간이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그 아이와 나눴는데 이제 한동안 우리는 정말 국경 밖으로 쉽사리 나갈 수 없을 것 아니냐며, 정말 이런 때가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그녀는 침울해했다.

드로잉 모임은 각자의 그림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다 갈 뿐, 강제하는 규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비 제공
드로잉 모임은 각자의 그림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다 갈 뿐, 강제하는 규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비 제공

우리는 다시 의료진과 관계자들의 노고에 관해 말했고, 믿음과 불신 사이, 지키는 것과 가두는 것 사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서, 우리를 지켜나갈 포용하는 마음가짐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이 어딘가 익숙했다. 생각해보니, 그 모든 이야기는 성소수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내가 스스로를 지키려고 되뇌었던 말들과 다르지 않았다. 서류상으로 남성이었던 내가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늘 나만의 생각과 일상을 새롭게 개발해야 했다. 성별이나 정체성이란 사적인 영역일 뿐 오직 존중하고 존중받으면 되는 일인데, 항상 추궁을 당해야 하고, 대답을 강요받는 일상은 매번 곤혹스러웠다. 내 성별과는 상관없이 나 역시 그들처럼 이 사회 속에 필요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개인일 뿐인데, 너무도 쉽게 선을 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설명을 하는 일도 화를 내는 일도 결국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불편함이 되고, 두려움이 되고, 나는 또 그러한 감정에 짓눌리지 않도록 항상 촉각을 곤두세운 내가 되어야 하고, 웃는 얼굴을 마스크처럼 둘러쓰고 나가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사회적 거리 두기란 어쩌면 이 사회에 이전부터 꼭 필요했던 것인지도.

따스한 햇살과 거센 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그림을 그렸다. 나는 지난달에 신랑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그렸고, 신랑은 침대에 누운 나를 그렸으며, 그녀는 피카소의 작품을 모사했다. 그림 모임이라고 하면 당연히 서로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 모임은 각자의 그림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다가 갈 뿐, 그 누구에게도 강제하는 규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중하고 나누는 서로여야 할 뿐.

두려움 없이, 다시 봄의 자가격리

다음달에는 햇살이 좋을 테니 야외에서 만나 다시 또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헤어지자고 약속했다. 각별히 건강 조심하시라고, 우울해지지 않도록 많이 웃으며 지내라고 덕담을 전하고 헤어졌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굳었던 마음이 데워졌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티브이를 켜니, 총리의 담화 발표가 이어졌다. 다음달 초 아이들의 개학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앞으로 보름 동안 철저한 자가격리를 시행해달라는 부탁의 말씀.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사회의 이름 모를 아이들을 위해 다시 또 단단히 가택 생활을 다짐한다. 그 아이들의 미래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라며. 아무리 힘겨운 봄이 들이닥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우울해지지 않도록. 자가격리, 다시 시작.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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