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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6년 만의 미투’ 최말자씨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요

등록 2020-05-08 20:19수정 2020-05-09 02:0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74)씨가 6일 오후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를 하기 위해 부산지방법원(연제구 거제동)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오연서 기자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74)씨가 6일 오후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를 하기 위해 부산지방법원(연제구 거제동)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오연서 기자

지난 4월30일 부산여성의전화에서 최말자(74)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56년 전 자신이 당한 성폭력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고 싶다는 최씨는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과거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했습니다. 엿새 뒤인 지난 6일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최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재심청구서 접수를 위해 법원 청사로 들어가던 최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속이 후련해요.” 사건이 발생한 지 꼬박 56년이 된 날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사건팀 오연서입니다. 지난 한주 독자들의 관심이 가장 뜨거웠던 사건 중 하나는 성폭력 피해자 최씨의 ‘56년 만의 미투’ 아닐까 싶습니다. 최씨는 18살이던 지난 1964년, 모르는 남자의 성폭력에 저항하다 이듬해 법원으로부터 유죄(중상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만든 한국 사회에 대한 최씨의 고발에 많은 이들이 함께 분노했습니다. 최씨 사건의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국민청원 글에는 8일 현재 8천여명이 동의했습니다. 한 독자는 자신이 받은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최씨의 재심 청구 비용에 보태고 싶다며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연대의 목소리에 최씨는 “나의 목소리를 같이 내주고, 56년 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이 후련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아버지는 최씨가 딸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학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최씨는 “방문을 잠그고 굶으면서 투쟁을 해도 아버지가 눈도 깜빡 안 했다”고 어렸을 적을 회상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꿈은 63살에 비로소 2년제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펼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뒤 들어간 방송통신대에서 최씨는 ‘한국사’, 그 가운데서도 여성 인권 역사를 다룬 수업을 들으며 흥미와 동시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인 자신을 보호하지 않은 56년 전의 한국 사회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여성 인권이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와 결혼해라.” “가시나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 최씨가 검찰 조사에서 들었던 말들입니다.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위 집에 들릴 수 있었다.” “범행 장소까지 간 것은 최씨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다.” 당시 최씨 사건의 판결문에 적힌 말들입니다. 검찰은 성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와 결혼할 것을 종용했고, 법원은 피해자인 최씨가 성범죄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최씨는 56년 전 자신의 사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억울함과 한도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대학 졸업을 앞둔 2018년, 뉴스에서 서지현 검사, 김지은씨 등의 ‘미투 고백’을 보며 용기를 얻은 최씨는 사건의 재심 청구를 결심했습니다.

최씨의 억울함이 재심을 통해 풀릴 수 있을까요. 최씨의 변호인단은 수사기관의 위법했던 수사가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검찰이 구속 이유와 변호인 선임권, 진술거부권도 고지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최씨를 감금했다”는 겁니다.

억울한 건 강압적인 수사뿐만이 아닙니다. 최씨는 인터뷰 중 “(사건의)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는 판결 때문에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범죄의 원인은 성폭력을 하려던 가해자에게 있는데, 왜 이에 저항하려던 피해자의 행위에만 책임을 묻냐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자신을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상해 사건의 가해자라고 규정한 사법부의 ‘가해자 중심적인 판결’에 대한 최씨의 분노가 담겼습니다. 최씨의 변호인단인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가 “이 사건을 ‘강제키스 혀 절단 사건’이 아닌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행 사건’이라고 부르자”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법원은 56년 동안 최씨를 가해자라고 규정한 판결문을 피해자라고 고쳐 써 이제라도 최씨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사건의 판결문을 다시 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지난 6일 재심 청구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최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법기관이 변해야만 우리 여성이 보호를 받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저 같은 여성이 많이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억울한 상처를 혼자만 끌어안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성범죄 피해자들을 숨어 살게 만드는 법원의 가해자 중심적인 판결이 더는 나와선 안 됩니다. 최씨가 56년 만에 용기 내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연서 사회부 사건팀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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