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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코로나 시대, ‘등록되지 못한 자’의 슬픔을 나누다

등록 2020-05-17 09:05수정 2020-05-22 20:00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⑦ ‘회복하는 생활’의 책모임 ‘문학의 곳간’

김대성 평론가가 여는 책모임
책이 아니라 읽은 사람이 주인공
열개의 삶이 한자리에 펼쳐져

남성의 태생을 가진 여성인 나
여성의 태생을 가진 남성인 그
마스크 사면서 범죄자 의심받은
이야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3월28일 부산 중앙동 또따또가 예술 창작 공간 ‘회복하는 생활’에서 김대성 문학평론가가 여는 ‘문학의 곳간’ 3월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의 책은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다. 김비 제공
3월28일 부산 중앙동 또따또가 예술 창작 공간 ‘회복하는 생활’에서 김대성 문학평론가가 여는 ‘문학의 곳간’ 3월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의 책은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다. 김비 제공

문학평론가 김대성씨는 매달 부산에서 ‘문학의 곳간’이라는 모임을 연다.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권의 책을 읽고, 책 한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그 자리에 풀어놓는다. 이 모임이 특별한 것은 책이 주인공이 아니라 책을 읽은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책은 한권이지만, 그 자리에는 열개 남짓한 이야기가 모인다. 한달 동안 책을 읽었던 열개의 삶이 한자리에 펼쳐진다.

그래서 모임의 시작을 언제나 ‘사귐 시간’으로 시작하는데, 이때에는 손에 들린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묻는 말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듣는다. ‘그럭저럭 지내요’라며 스스로의 삶을 지우는 대답을 경계해선지, 주최자인 김대성씨는 매달 ‘사귐 시간’에 이야기할 주제를 미리 말해준다. 3월28일 열린 3월 모임의 주제는 ‘쉽게 중단될 수 있지만, 중단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이 지구를 휩쓸고 있는 재난 때문에 지난달 모임도 취소하고 말았는데, 우리의 삶에 중단되어서는 안 되지만 중단될 수밖에 없던 것들을 되새겨보자는 물음이었다.

이주민, 성전환자…‘등록되지 못한 자’

네살짜리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인이기도 한 한분은 ‘이주민과 함께’라는 이주민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 국적의 주민등록을 기초로 한 재난 지원 시스템 자체로 인해 소외되는 이주민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재난이 모두에게 불가피한 현실인데, 오직 한국 국적에, ‘등록된 자’만을 지원함으로써 배제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현실이 참담하다고 털어놓았다. 왜 항상 약자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지우는 사회가 되어가는 거냐며, 참혹한 요즈음이라고 했다.

‘등록된 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곁에서 듣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말을 보탰다. 그는 나와 같은 성전환자지만, 나는 남성의 태생을 가진 여성이었고, 반대로 그는 여성의 태생을 가진 남성이었다. 이제 서른을 눈앞에 둔 그는 마스크 하나 사러 가기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차라리 나처럼 남성의 태생을 가진 여성이라면 겉으로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남자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니 의심이라고 해봤자 고개 갸웃거리는 정도일 뿐인데, 겉으로는 남성의 모습을 하고 여자 신분증을 내미는 그는 번번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린다고 했다. 아직 호적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그가 마주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호적 정정을 하기 전에 나 역시 남자 신분증을 내밀면 대부분 남편분 게 아니라 본인 걸 달라는 말을 들었지만, 겉모습은 평범한 남성인 그가 여성 신분증을 내밀면 대놓고 수상한 사람이나 범죄자 취급을 하기 일쑤라고 했다. 같은 성전환자지만 정확히 반대편에서 스스로의 존재와 싸우고 있는 우리 둘 사이에, 성별은 다시 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그와 나는 개인적 재난 속에 살아남기 위해 애써왔지만, 범세계적인 사회적 재난 앞에 다시 또 우리의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록되지 못한 자’로 살아야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분명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호르몬 치료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육체에 부담이 될 테니 누구보다 스스로를 지켜내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 전부였다.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청년인 그는, 신분 확인이 필요 없는 일을 찾아야 하는 자신의 현재를 말하며 쓸쓸히 웃었다. 그래서 지난달부터 배달 일을 하게 되었다고, 몸으로 땀을 흘리며 뛰고 나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꿈꾸는 청년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서점을 운영해왔던 한 여성은, 서점 자체의 운영이 중단됨에 따라 고통스러운 자영업자의 현실을 견디며 살고 있다고 했다. 서점 문을 닫고, 그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삶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유치원 교사는 가족들과 같이 살아도 직장을 다니는 동안 가족과 제대로 저녁 한번 같이 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는 강제로 매일 가족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저녁을 먹고 자연스럽게 엄마와 가까운 데로 산책에 나섰는데, 이전에는 그래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

각자 서로 다른 균열이 생겨버린 일상이었지만, 같은 자리에 모여 털어놓으니 무릎을 맞대고서 대피소에라도 모여 앉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고 들어주고 응답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마음들이 어루만져진 느낌이었다.

&lt;회복의 꽃&gt; 김비, 디지털화.
<회복의 꽃> 김비, 디지털화.

무릎 맞대고 대피소에 모여 앉은 기분

잠깐 쉬었다가, 우리는 드디어 책에 관해 이야기했다. 좀 전에 서로 나누었던 재난 이후의 일상에 관한 고백과 어우러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다. 그날 읽은 소설집은 젊은 작가의 우울과 죽음에 관한 단편집이었고, 세심한 시선으로 무거운 시간을 통과하는 화자의 소설 속 일상에 관해 우린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기 같기도 하고, 블로그 글 같기도 한 화자의 내밀한 자기 고백에, 어떤 이는 자기 이야기를 적은 것 같아 정말 공감이 되어 좋았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소설적 상상이 충분히 펼쳐지지 않은 것 같다며 아쉽다고 했다. 지워진 이름과, 타자화와, 지역주의와, 소설 너머에 존재하는 흐릿한 인물들에 관해 다시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혔고, 김대성씨는 이 자리는 누가 어떤 의견을 내든 자유로울 수 있는 자리이니 옳고 그름은 없다고 중재해주었다. 누구든 말해도 괜찮고, 상대를 존중하는 말이라면 어떤 말이어도 괜찮으며, 들어줄 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억지로 떨어져 앉은 자리가 조금 더 어색해졌고, 네시간 가까운 모임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몇몇은 바삐 돌아갔고, 아쉬운 몇몇은 남아 뒷자리를 이어갔다. 맥주 캔을 부딪치며 최근에 마음을 무겁게 했던 소식들을 나누며 다 같이 분개했고, 법의 정의가 가해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현실에 함께 치를 떨었으며, 서로를 지켜야 하는 존재로서의 책임감에 관해서도 내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구경거리가 되지 않아도 되는 그 자리가 참으로 반가웠던 나와 그는, 성전환자로 살며 차마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고, 모두들 진심으로 공감해주었다. 그중에 여성 한분이, 그때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이슈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혐오의 말들이 퍼져갈 때, 자신도 같이 참혹해하고 분노했었다며 우리의 삶을 응원한다고 말해주었는데,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솜이불 위에라도 구른 것 같았다.

그날 우리가 예순세번째 문학의 곳간에서 읽은 책은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고, 모임이 진행된 공간은 부산 중앙동 또따또가 예술 창작 공간 ‘회복하는 생활’이었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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