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⑨슬기로운 사랑 생활 11년째
배제도 부정도 않는, 그냥 사랑 이야기
‘전 여친들’과 다른 나를 동네방네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닌
그가 ‘미쳤나?’ 싶었지만, 참 좋았다
허무하도록 간단했던 혼인신고 날
나는 두 팔 올려 환호성을 질렀다
이 권리가 불가능하다니 성소수자
친구들 생각에 옆구리가 묵직했다
⑨슬기로운 사랑 생활 11년째
배제도 부정도 않는, 그냥 사랑 이야기
‘전 여친들’과 다른 나를 동네방네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닌
그가 ‘미쳤나?’ 싶었지만, 참 좋았다
허무하도록 간단했던 혼인신고 날
나는 두 팔 올려 환호성을 질렀다
이 권리가 불가능하다니 성소수자
친구들 생각에 옆구리가 묵직했다

2016년 혼인신고를 하고 손가락에 서로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겼다. 신랑의 손가락에는 김비의 ‘날 비’ 자를, 신부의 손가락에는 박조건형의 ‘세울 건’ 자를 한자로 새겨 넣었다. 김비 제공
동자승 같은 첫인상 이 사람을 만날 즈음, 나는 사랑 따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수술을 하고 호적정정까지 했지만, 의지할 수 있는 부모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 몸처럼 사랑 또한 내 것이 아니겠구나 포기한 때였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았어도 나이 마흔은 혼자 사는 즐거움을 알게 되는 나이니, 사랑은 구차하거나 간략한 것에 불과했다. 사랑 없이 사는 삶을 계획하면서, 나는 오히려 좀 더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과의 만남도 솔직히 말하면 좀 가벼웠다. 내 책을 읽었다고 했고, 나는 고맙다고 했고, 그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고, 나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니 언제 시간이 맞으면 영화나 같이 보자고 했지만, 내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는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가벼운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열심히 내 홈페이지 속 사진들을 찾아봤다고 했는데, 나도 그의 블로그를 딱 한번, 아니 두번인가 찾아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확인만 했을 뿐이었다. 그가 남긴 글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너무도 다른 얼굴이어서, ‘신기하네’ 그렇게 생각한 게 전부였다. 게다가 그는 부산 옆 양산에 살고 있다니 부산도 몇번 가본 적 없는 경기도 거주민인 내가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어떤 이름의 사랑이든 모든 사랑이 마찬가지이듯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고, 우린 서울에서 같이 만나 영화를 봤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스님’ 같았고, 민머리에 솔기가 다 뜯긴 털모자를 쓰고 있어 너무도 검소한 차림이라 더욱 그랬다. 행색뿐만 아니라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도 어딘지 동자승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래서 나는 오히려 쓸모없이 경건해졌던가, 하여간 뭐 그랬다. 우리가 본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브로큰 임브레이스>였고, 영화를 보고 나오니 비가 내렸다. 둘 다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산 때문에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게 좀 그래서 나는 우산을 같이 쓰자고 했고, (신랑은 지금도 이 시점에 내가 먼저 자신의 팔뚝을 ‘휘감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정말 결단코 경건한 마음이었을 뿐) 그저 카페에서 오래도록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뿐 아니라 서로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신랑이 자신에 관해 말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보였고, 우리는 서로 손의 크기를 쟀다. 남자 태생이라 내 손은 유독 컸는데 신랑의 손은 나보다 훨씬 컸고, 신랑의 손에 내 손을 올리고 아마도 나는 ‘우와!’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즈음 경건한 마음이 좀 희미해졌나, 하여간 뭐 그랬다.

<꽃 새>, 김비, 디지털화
행복한 사랑 생활 하시라 고맙게도, 그 사람과 지금도 같이 산다. 만난 지는 11년째, 같이 산 지는 6년째다. 2016년 초겨울 혼인신고를 하러 시청에 간 날, 정말 너무도 허무하도록 간단했던 혼인신고를 하고 나오던 날, 나는 두 팔을 들어올려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간단한 절차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당연히 허락되어야 하는 국민으로서의 이 권리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니, 다른 성소수자 친구들이 생각나 옆구리가 묵직했다. 반지 대신, 우리는 손가락에 서로의 이름을 새겼다. 가난하기도 했고, 반지를 끼는 불편함이 싫기도 했고,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의 사랑도 조금 특별한 의미가 되기를 바랐다. 강연자로 나선 자리에서 그러다가 헤어지는 날이라도 오면 어쩌냐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러면 나는 양손 손가락을 쫙 펴고서 ‘나에게는 아직 아홉개의 손가락이 남아 있다’며 의뭉스러운 웃음을 보여드린다. 듣고 계신 분들도 박장대소하며 웃고, 나도 웃고, 왁자지껄하게 모두가 같이 웃는다. 대부분 비성소수자였을 강의 참여자분들께 행복하게 잘 사시라는 덕담을 받고, 나 역시 그분들께 행복한 사랑 생활 하시라고 말해드린다. 사랑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어떤 사랑이어도 마찬가지다. 궁지에 몰릴수록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어야 할 것 같지만, 살아보니 한발 물러날 때 길이 보인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아야 할 것 같지만, 잃어버린 길도 길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냐는 해답 없는 물음에 삶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서로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어려운 시기를 버티어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잠깐이지만, 우리의 사랑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당신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사랑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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