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주야,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재량 휴업일을 더한 9일 연휴 뒤, 누구보다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던 중학교 3학년 희주(가명)가 예고 없이 등교하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희주는 “선생님, 숨이 막혀 집을 나왔어요”라고 말했다. “저런, 심각한 문제가 있었구나? 일단 학교에서 얘기를 나눠보자.” 막상 통화하니 기다렸다는 듯 등교했다. “그간의 일을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연휴 전날 할머니가 저와 오빠를 위해 저녁상을 차려주셨는데 오빠가 불러도 나오지 않길래 먼저 조금 먹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오빠가 먹기도 전에 음식에 손을 댔다’며 야단을 치는 거예요. 화가 치밀어, ‘오빠가 먼저 먹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러시냐’고 따졌죠. 그러자 ‘남자와 여자가 같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수저를 식탁 위에 세게 놓고 제 방으로 들어왔어요. 퇴근한 부모님은 다짜고짜 용서를 빌라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도 잘못이 있다’고 항의했더니 ‘할머니는 옛날 분이잖아. 너를 힘들여 길러주시는데 그 정도도 이해 못 해?’라며 심하게 나무랐어요. 저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강력히 항의했고 엄마가 제 뺨을 힘껏 때렸어요. 제가 울며 소리 지르자 아빠가 손목을 잡아 바닥에 주저앉혔어요.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112에 신고를 했고 금세 경찰이 왔어요. 부모님은 ‘대화로 잘 풀겠다’며 경찰을 돌려보내고, ‘어떻게 부모를 신고할 수 있냐. 너같이 못된 자식은 상대하기도 싫다’며 방문을 쾅 닫고 함께 나갔어요. 그 뒤로 아무도 제 방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가족들이 없는 틈에 잠깐 나가 밥을 챙겨 먹었어요.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어요. 등교하지 않으면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결국 오지 않았어요.”
“저런. 그 마음이 어떠니?” “말할 수 없이 비참해요.” “그렇겠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니?”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차별적인 행동에 자주 대들어 엄마한테 심하게 꾸중을 듣곤 했어요. 이번에는 엄마가 저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니 아빠까지 나서게 된 거 같아요.” “집안에 네 편이 없었구나.” “네.”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제가 이토록 상처받는데, 부모님이 잘 중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는 감정이 많이 쌓여 있었다. 한참을 토로했다.
잠시 뒤 어머니와 통화했다. 어머니는 “어른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이가 어른에게 예의 없이 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번에 제대로 고집을 꺾지 못하면 희주는 영영 우리 사회에 부적응할 것”이라며 더 이상의 대화를 피했다.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돌아간다면 부모님은 너를 어떻게 대할 것 같아?” “다시 외면할 것 같아요.” 아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소리 내어 길게 울었다.
“많이 힘든 상황에서도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쉽게 굽히지 않는 넌 참 건강해”라고 하자 아이는 “주변에 얘기하면 대개 ‘어린 네가 부모의 비위를 맞춰야지’라고 해요. 그때마다, ‘내가 정말 나쁜 아이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이제는 마음이 편해요”라며 부은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사실 저희 엄마 참 불쌍해요. 할머니 성격이 워낙 강해서 늘 눈치를 보며 사셔요.” 속상한 마음을 다 털어놓고 공감받자 아이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엄마가 힘들어 보이니?” “네.” “이런 네가 있어 외롭지 않으시겠다.” “하지만 막상 대할 땐 짜증을 많이 부려요.” “미안한 마음도 있구나?” “네, 그렇다고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 불쑥 들어갈 용기가 나지는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엄마에게 안부 문자를 보낸 뒤 반응을 살펴볼게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날 저녁 아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며칠 뒤 어머니로부터 ‘아이와의 대화가 한결 편해졌다’는 장문의 감사 문자가 왔다. 아이가 먼저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은 폭력 사회에 젖은 기성세대에 비해 한층 높은 인권 감수성을 지녔다. 아이가 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한다면 곁에 있는 어른의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상대가 누구든 폭력을 거부하는 너는 진정 옳아. 정당한 폭력이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어”라는 확신을 주기 바란다.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