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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당신은 몇 개의 가난과 싸우고 있습니까

등록 2020-07-11 09:33수정 2020-07-12 02:53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⑪ 가난한 당신에게 보내는 응원

보증금 60만원으로 24살에 독립
다락방 난로 켜던 그밤 못 잊어
여자 되려면 여자 옷 입고 와라
정신과의사에게 진료조차 거부당해

오십의 소설가, 한달 벌이 맴돌아
돌아보니 가난은 한 가지 아니야
그래도 내 생에 주어진 가난과
잘 싸웠다 스스로 칭찬하고 싶어
한동안 지역의 터미널을 찍으러 다녔다. 2006년 익산터미널 풍경. 김비 제공
한동안 지역의 터미널을 찍으러 다녔다. 2006년 익산터미널 풍경. 김비 제공
스물네 살 적에, 나는 본가로부터 독립해 나왔다. ‘독립’이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지만, 포기였고 도망이었다. 1994년 그때, 집을 나오며 오라비에게 받은 돈은 60만원이었다. 임진각이 지척에 보이는 남한 최북단 집에 난방도 되지 않는 다락방 월세 보증금이 60만원이었고, 나는 그러니 60만원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이 집에 손 벌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무엇이든 그 집 자식이었으니 콩 한 쪽이라도 재산에 대한 일정 지분이 나에게 있는 것이 당연한데, 나는 그렇게 60만원을 받아들고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다. 그깟 몇 푼으로 정말 혼자 살 수는 없겠지 싶었던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나 같은 것에게는 돈 몇 푼도 아깝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네 살 터울의 내 오라비는 그렇게 나를 내보내고는 그만이었다.

___________
그렇게 오래 학원에서 일하게 될 줄은

바닥에 난방도 되지 않는 낡은 양옥집의 다락방은 창고 같았다. 바닥에서 잘 수 없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호프집 사장님께 사정해 가불한 돈으로 침대 하나를 구했고, 석유난로 하나를 샀다. 창고 같던 방에 오렌지색 난롯불이 켜지고 순식간에 데워지던 그 혹독했던 겨울의 하루를 나는 잊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코밑이 시커메지고 목이 따끔거렸지만,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내 삶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아 설렜다.

시급 1300원이었던 생맥주 나르는 일을 계속하며 나는 신경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치료는 거부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별 정정을 하기에 내가 충분히 여성스럽지 않다는 것.

도대체 여자답다는 둥 남자답다는 둥 그따위가 뭐냐고 지금이야 누구든 따져 물을 수 있겠지만, 여자가 되고 싶으면 여자 옷을 입고 와보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분했고, 억울했고, 조롱이라도 당한 기분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리 지르는 일뿐이었다.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에게 매달리며 싸우다가 나는 끌려나왔다. 병원 대합실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남자로 살려는 그때까지의 노력이 내 삶을 옥죄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정당한 치료를 받으려는 것뿐이었는데, 내 모든 고민과 결심은 단박에 뭉개져버렸다. 세상 모든 절망이 나에게로만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살아남겠다는 의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지도 못한 채 ‘살아남는다’는 그 의지 하나만 품고서 병원을 나왔다. 당신들 보란 듯이 내가 멋지게 살아남아 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때, 내 안에 어떤 불이 켜졌다고 나는 기억한다.

졸업했던 대학교의 교수님 연락으로 나는 시청각 교육실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수도권 남부 지역에 있던 학교 앞에 월세 8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참으로 오랜만에 바닥이 데워지는 방에 누울 수 있게 되었다. 40만원이 채 되지 않던 조교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갈 수 없어, 나는 두 달만 학원 강사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생활비가 모자라 쓰던 카드값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집에 손을 벌리기는 싫었다. 내 삶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기로 한 다짐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흉내를 내던 목소리를 되새기며, 머리 긴 남자 선생님으로 학생들 앞에 섰다. 내성적이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내가 가르치는 일이라니, 나는 두 달만 이를 악물고 버티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달만 하자고 다짐했던 그 일을, 나는 십오 년 동안 하게 되었다. 강사 일을 하던 중에 티브이(TV) 출연도 하고, 수술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원래의 직장인 학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누구보다 힘 있게 자신의 삶을 꾸려야 할 나 같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누리집도 만들고, 열심히 인터뷰도 했다. 인권운동가는 아니었지만, 너무도 간단히 지워져버리는 삶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야 했다. 획일화되어 읽히는 모든 것이 만든 오류를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다. 돈을 버는 일은 돈을 버는 일이었고, 내가 바랐던 멋진 삶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돈’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나에게는 고작 돈과 관련된 것일 수는 없었다.

<돈 타령하는 짝지>. 박조건형, 펜드로잉
<돈 타령하는 짝지>. 박조건형, 펜드로잉
2007년에 여성동아 장편소설상을 받고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내 삶에는 또 다른 화두가 생겼다. 다른 소설가 선생님들 앞에서 받은 상의 무게는 너무도 묵직했다. 내 삶의 궁지가 밀어올린 소설들은 내 안에 침잠한 것들뿐이라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소설만 썼지만, 내가 쓴 건 또 다른 부끄러움일 뿐이었다. 나는 완벽히 실패했고, 더 깊은 궁지에 내몰리고 나서야 다시 소설 한 권을 세상에 낼 수 있었다. 자신의 근원을 찾아 전국의 터미널을 돌아다니는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 읽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실패했다.

어느새 마흔이 가까웠지만, 나는 여전히 월세방을 전전하는 무명작가 처지였다. 가족과 같이 살려는 노력도 수포가 되고, 나는 가족을 꿈꾸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가족’이란 말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고 나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와 가족이 되어도 좋고, 가족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과거를 헤아리는 일도 미래를 꿈꾸는 일도 그즈음의 나에겐 모두 허망한 일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나는 지금도 그 사람과 산다. 서로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고, 동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먹고산다.

이제 나이 오십, 소설가니 작가니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글쟁이로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나아져 이렇게 청탁 일도 들어오고, 글쓰기 수업도 하며 살고 있지만, 생계는 여전히 한 달 벌이에 머물러 있다. 미래니 노후 대비니 오십인 지금 나이에도 여전히 까마득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티지, 아프면 아픈 대로 주저앉고 말지, 가난이 선물한 끈질긴 생명력이 여전히 나에겐 제일 큰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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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가난, 마음의 가난, 관계의 가난

언젠가 한 방송사에서 “트랜스젠더로 성공하셨는데…” 어쩌고 인터뷰를 청해 왔을 때,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여전히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삶을 어떻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내가 실패한 삶인가, 머뭇거리게 된다. 성공을 돈이나 명예로 한정 짓는다면 나는 분명 실패인데, 한해 한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쌓다보니 과연 실패이기만 한가, 자문하게 된다. 수술에 호적 정정에 결혼까지,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이라면 나는 분명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시선으로 보자면 명백히 실패했고, 한 인간으로서 보자면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내 생에, 돈이나 권력 말고 다른 빛나는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말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이 당연해져버린 시대가 되었다. 차별받지 않는 삶, 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행복이 보장된 삶, 똑같이 당당한 삶. 내가 온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은 누군가에겐 이미 저절로 얻게 된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생에 주어진 가난과 잘 싸웠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려 한다. 돌아보니 가난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몸의 가난, 마음의 가난, 관계의 가난, 어떤 가난과 나는 이미 싸워 이겼고, 여전히 싸워야 할 가난도 남아 있다. 그렇게 우린 이미 모두 각자의 가난과 싸우고 있다. 힘들 내시라. 여기 가난한 한 사람이, 가난한 당신에게 응원을 보낸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2016년 부산 플랜비문화협동조합의 ‘수영성 마을 기록 프로젝트’에서 수영동 드로잉북 <수영을 걷다>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최근 몇 년은 이런 예술인복지재단의 파견지원사업에 참여해 생계에 보탰다. 김비 제공
2016년 부산 플랜비문화협동조합의 ‘수영성 마을 기록 프로젝트’에서 수영동 드로잉북 <수영을 걷다>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최근 몇 년은 이런 예술인복지재단의 파견지원사업에 참여해 생계에 보탰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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