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앞줄 왼쪽 둘째)와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들의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자료가 배포되는 동안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사라졌다면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까. 성폭력은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들로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마땅한데, 당사자의 진술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애당초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행위 자체가 부적절한 걸까.
9일 세상을 떠난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런 질문에 ‘가능하다’고 반박했던 이다. 그는 인권변호사 시절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뛰어들어 ‘가해자 없는 진상규명’의 지평을 넓혔다. 이미 대다수의 가해자가 세상을 떠나고, 남아 있는 가해자와 전범국가마저 사실을 왜곡하는 발언을 일삼을 때에도 변호사 박원순은 ‘확실성’보단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했다. 흩어진 진술을 기계적으로 수집하는 걸 넘어 피해자의 증언을 경청함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고 공동체에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 있다고, 박 시장은 주장했다.
그런 그가 이제 ‘가해자’의 자리에 섰다.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쪽은 “4년여간 발생한 권력형 성범죄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고 책임 있는 행보를 보여달라”고 지난 13일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박 시장의 지지자들 일부는 피해자 쪽의 공론화가 그 자체로 ‘사자명예훼손’이며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호하기 위한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소송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피해자 구제나 재발방지책 마련 등 사법 바깥의 영역에서까지 전능하진 않다.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 되레 피해자를 입막음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조직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뿌리 깊은 차별 구조, 해결 시스템 부재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해결 노력이 시급하다.
피해자 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간 피해자는 공적 시스템 안에서 믿음을 배신당하길 거듭했다. 서울시 내부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땐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후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경찰을 찾았지만 고소 사실이 박 시장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의혹이 있다. 결국 그는 얼굴을 가린 채 직접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피해자의 고백을 막는 일은 그에게서 마지막 회복의 기회조차 앗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호소를 직시해 추모를 선도해야 할 박원순 시장 장례위원회는 1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로 한 피해자 쪽에 “재고해달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냈다. 피해자를 향한 협박과 비난이 비등한 상황에서 장례위가 피해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은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4일엔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의 호소 내용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건의 진위를 명백히 따지기 위해서라도 피해자의 진술은 어떠한 편견이나 2차 가해 없이 경청돼야 한다. 이는 ‘허위 사실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한 명의 복합적인 인간으로서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에도 필요한 일이다. 고인이 생전에 ‘피해자 증언의 신빙성과 이를 통한 진실 규명의 가능성, 연대의 힘’을 믿었던 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 우리는 ‘가해자’로 명명되리라 예상치 못했던 이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자리에 서 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버겁고 가혹하게 여겨질수록 그가 믿었던 ‘가능성’의 힘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박윤경 I 사건팀 기자
yg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