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⑭ 어느 성소수자의 늙을 준비
성전환자 건강 별다르진 않아도
나조차 본 적 없는 나이듦 겪어
검진 모니터 내 특이사항에
이상한 이름 적히지 않았나
혈관 찔린 채 빨리 뛰는 심장
마음도 늙어갈 준비가 필요해
⑭ 어느 성소수자의 늙을 준비
성전환자 건강 별다르진 않아도
나조차 본 적 없는 나이듦 겪어
검진 모니터 내 특이사항에
이상한 이름 적히지 않았나
혈관 찔린 채 빨리 뛰는 심장
마음도 늙어갈 준비가 필요해

<병원에서 혈압 재는 짝지>, 펜드로잉 색연필 마커 채색. 박조건형
조심해도 피할 수 없었던 질병 나 같은 ‘트랜스젠더’ ‘성전환자’라고 하면 무언가 특별한 몸을 지니고 살 것 같지만, 다를 건 없다. 수술을 한 경우라면, 큰 수술을 겪은 몸이니 좀 더 각별한 관리를 해주면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고, 만성질환을 지닌 사람처럼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고 제때 필요한 약을 처방받으면 되는 일이다. 일부 혐오자들의 말처럼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할 일을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은 아니며, 보통 사람들처럼 늙어가는 몸 앞에 숙연해질 뿐이다. 성소수자라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못한 몸이었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 신경 쓴 면이 있긴 하다. 자학과 자해의 욕망에 시달린 것은 오히려 성전환 수술 전이었고,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면서 나는 내 몸을 누구보다 건강하게 지켜야겠다는 욕망이 더 커졌다. 보살펴줄 사람 없는 혼자뿐인 삶이었지만, 끼니때면 더 귀하게 내가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었고, 담배나 술은 최대한 삼갔다.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 않았고, 술은 필요한 경우에 한두 잔이었다. 워낙 허약해 피로를 많이 느끼는 몸이라 최대한 일고여덟 시간의 수면은 지키려고 애썼다. 원고 작업도 출퇴근하듯 낮에만 했고, 밤에는 최대한 몸을 이완시켜 평온한 저녁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애씀은 애씀일 뿐, 노력만으로 건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몇년 전에 알게 되었다. 평생 3개월마다 병원에 와야 한다는 의사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감염된 모친으로 인해 감염된 몸으로 태어났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간경화’ 진단을 받았을 때 꽤나 허망했다. 술로 살았던 아버지와 오라비도 받지 않았던 선고가 나에게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되어 다행이라는 말도, 약이 좋아져 예전보다 고생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성전환자들이 일주일에 하나씩 맞는 호르몬 주사를, 나는 한 달에 하나로 최대한 줄였던 건데.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되는 일들로부터 도망쳐 다니며, 최대한 이기적으로 삶을 살았던 건데.

최근 정기검진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찍은 모습. 김비 제공
한 알의 약, 하루치 늙음 배당받는다 성전환자인 나 같은 사람의 늙음을 나조차 본 적 없어,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최근에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고, 어서 빨리 머리가 하얗게 세어 사시사철 눈 내린 머리칼을 갖고 싶은 것이, 나의 늙음을 준비하며 내가 마련한 최초의 꿈이다. 허리는 굽어지지 말았으면, 어깨도 쪼그라들진 말았으면, 주름으로 가득한 목덜미를 더 환하게 내밀고 다닐 수 있는 몸이었으면. 몸뿐이 아니다. 몸만큼이나 마음도 잘 늙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겠구나,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상념에 잠긴다. 누구에게든 환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가수 양희은 선생님처럼 ‘그래, 그럴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으면, 먼저 나서기보다 가만히 오래 지켜보며 말은 고르고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당당함과 부끄러움을 현명하게 가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후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항상 고민하는 사람이었으면. 오늘도 저녁 여덟시 반이 되면, 내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린다. 나는 또 한 알의 약을 먹고, 하루치의 늙음을 배당받는다. “고맙습니다, 또 열심히 늙어가겠습니다.” 중얼거리면서, 나는 겸허하게 하루치의 늙음을 준비한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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