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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맙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늙어가겠습니다

등록 2020-08-22 16:28수정 2020-08-22 16:33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⑭ 어느 성소수자의 늙을 준비

성전환자 건강 별다르진 않아도
나조차 본 적 없는 나이듦 겪어

검진 모니터 특이사항에
이상한 이름 적히지 않았나
혈관 찔린 채 빨리 뛰는 심장
마음도 늙어갈 준비가 필요해
<병원에서 혈압 재는 짝지>, 펜드로잉 색연필 마커 채색. 박조건형
<병원에서 혈압 재는 짝지>, 펜드로잉 색연필 마커 채색. 박조건형

올해로 겨우 오십 나이를 늙었다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어느 순간 이전과는 달라진 몸 앞에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한번도 그래본 적 없는데? 우린 그제야 늙는다는 일이 증명서나 숫자의 자릿수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젊은 몸이란 새로 얻은 바퀴 같은 것일 뿐 필연적으로 닳아 없어질 숙명 앞에 있고, 남들보다 좀 더 건강한 몸이라면 ‘뽑기 운’이 좋았을 뿐 자랑할 일도 장담할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_______________
조심해도 피할 수 없었던 질병

나 같은 ‘트랜스젠더’ ‘성전환자’라고 하면 무언가 특별한 몸을 지니고 살 것 같지만, 다를 건 없다. 수술을 한 경우라면, 큰 수술을 겪은 몸이니 좀 더 각별한 관리를 해주면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고, 만성질환을 지닌 사람처럼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고 제때 필요한 약을 처방받으면 되는 일이다. 일부 혐오자들의 말처럼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할 일을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은 아니며, 보통 사람들처럼 늙어가는 몸 앞에 숙연해질 뿐이다.

성소수자라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못한 몸이었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 신경 쓴 면이 있긴 하다. 자학과 자해의 욕망에 시달린 것은 오히려 성전환 수술 전이었고,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면서 나는 내 몸을 누구보다 건강하게 지켜야겠다는 욕망이 더 커졌다. 보살펴줄 사람 없는 혼자뿐인 삶이었지만, 끼니때면 더 귀하게 내가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었고, 담배나 술은 최대한 삼갔다.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 않았고, 술은 필요한 경우에 한두 잔이었다. 워낙 허약해 피로를 많이 느끼는 몸이라 최대한 일고여덟 시간의 수면은 지키려고 애썼다. 원고 작업도 출퇴근하듯 낮에만 했고, 밤에는 최대한 몸을 이완시켜 평온한 저녁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애씀은 애씀일 뿐, 노력만으로 건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몇년 전에 알게 되었다. 평생 3개월마다 병원에 와야 한다는 의사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감염된 모친으로 인해 감염된 몸으로 태어났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간경화’ 진단을 받았을 때 꽤나 허망했다. 술로 살았던 아버지와 오라비도 받지 않았던 선고가 나에게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되어 다행이라는 말도, 약이 좋아져 예전보다 고생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성전환자들이 일주일에 하나씩 맞는 호르몬 주사를, 나는 한 달에 하나로 최대한 줄였던 건데.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되는 일들로부터 도망쳐 다니며, 최대한 이기적으로 삶을 살았던 건데.

최근 정기검진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찍은 모습. 김비 제공
최근 정기검진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찍은 모습. 김비 제공

6개월 주기로 받는 검진 때마다 공복은 어렵지 않았지만, 빈칸으로 남겨둔 여성용 문진표의 뒷면을 내보이는 일이 참 곤혹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정체(?)에 관해 말해야 할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가 꺾였다. 다른 말이 있으면 좋으련만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평생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겪은 시간과 삶은 뒤엉킨 외래어 뒤에서 너무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성전환자’라는 한국어는 그나마 덜 부대끼는 것 같은데, 사회적 시선으로나 바뀌었을 뿐 내가 정말 성별을 바꿨나, 지금의 나를 정의하기에 그 말 역시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것마저 상대가 한번에 알아들으면 다행이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목소리까지 높여 연거푸 말해야 할 때면 서로 얼굴이 굳기는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이번에는 여성 간호사가 왜 뒷면의 문진표는 작성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내밀었다가 나를 기억하는지 이내 거두어 갔다. 채혈실과 초음파실에 볼펜으로 표시를 해주며 그는 여전히 표정 없는 사무적인 얼굴이었지만, 나는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딱딱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웃는 그의 얼굴 앞에 마주 웃어줄 수 없을 것 같아 재빨리 돌아섰다.

내가 가져간 종이를 받아들고서, 채혈을 담당한 사람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고,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팔뚝을 걷고 채혈 의자에 앉으니 주사기를 든 사람이 다시 한번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고, 생년월일을 재차 확인했다. 왼손잡이라 왼쪽 팔뚝을 내밀었는데, 의사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남자는 왼쪽 팔 안쪽에서 혈관을 찾아내 정확하게 한번에 찔렀다.

“이제 주먹을 펴세요.”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뺀다. 피스톤을 끌어당기며 그는 나에게서 건네받았던 종이를 넘겨본다. 검진 순서를 적은 종이 어디에도 따로 적힌 표시나 글자는 없는데, 그의 눈이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은 나의 정체성을 읽고 있지 않을까, 그들 쪽으로 꺾인 모니터 너머에 내 특이사항은 기괴하고 이상한 이름으로 번쩍거리고 있지나 않을까, 혈관이 찔린 채로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뛴다.

초음파실 침대에 누우면 나는 그야말로 발가벗겨졌다. 여자 간호사는 익숙한 손길로 내 상의를 젖혔고, 하의를 골반뼈 위까지 끌어내렸다. 젖힌 상의를 다시 더 위로 밀어올려 브래지어 안쪽으로 말아넣는데… 아, 브래지어! 옆구리 쪽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브라톱을, 마지막으로 입고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걸치고 나왔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발가벗겨진 것도 모자라 추레한 꼴까지 들키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의사가 들어오고, 내 몸에 끈적하고 미끄덩거리는 것을 바르고 스팀다리미처럼 생긴 검진기를 갖다 대면, 나는 그야말로 목숨 달린 몸뚱이 하나가 된다. 나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 나는 읽지 못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내 몸 위에서 손을 움직이며 모니터를 읽는다. 배를 내밀어보라는 말에 배에 힘을 주고 불룩. 왼쪽으로 누워보라는 말에 미끄덩거리는 몸을 움직여 왼쪽으로 불룩.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 보라는 말에 말려들어가는 허리 아래 수건을 붙들고서 다시 오른쪽으로 불룩.

“배를 내밀라는 말이지, 허리를 내밀라는 말이 아니에요.” 의사가 말했을 때,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의 말대로 애써 배를 내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허리를 내민 것에 불과하다니. 미끄덩거리는 것으로 온통 뒤덮여 쓰다듬을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내 배를 생각한다. 애쓴다고 애썼는데, 소용없게 되어버렸구나. 그 속에서 너는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구나.

의사의 말대로 힘을 빼고, 배를 내밀어본다. 허리에 힘을 주지 않고 배를 내미는 법이 무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허리에 힘을 주지 않고 배만 내민다. 배만 내밀고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_______________
한 알의 약, 하루치 늙음 배당받는다

성전환자인 나 같은 사람의 늙음을 나조차 본 적 없어,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최근에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고, 어서 빨리 머리가 하얗게 세어 사시사철 눈 내린 머리칼을 갖고 싶은 것이, 나의 늙음을 준비하며 내가 마련한 최초의 꿈이다. 허리는 굽어지지 말았으면, 어깨도 쪼그라들진 말았으면, 주름으로 가득한 목덜미를 더 환하게 내밀고 다닐 수 있는 몸이었으면.

몸뿐이 아니다. 몸만큼이나 마음도 잘 늙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겠구나,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상념에 잠긴다. 누구에게든 환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가수 양희은 선생님처럼 ‘그래, 그럴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으면, 먼저 나서기보다 가만히 오래 지켜보며 말은 고르고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당당함과 부끄러움을 현명하게 가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후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항상 고민하는 사람이었으면.

오늘도 저녁 여덟시 반이 되면, 내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린다. 나는 또 한 알의 약을 먹고, 하루치의 늙음을 배당받는다. “고맙습니다, 또 열심히 늙어가겠습니다.” 중얼거리면서, 나는 겸허하게 하루치의 늙음을 준비한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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