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무수히 많은 선택 앞에 선다. 어떤 선택은 너무도 사소해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어떤 선택은 너무 선뜩해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 한쪽으로 마음이 쏠려 있지 않다면 선택은 어느 쪽이든 최소한의 만족을 보장하는데, 선택 앞에 선 나는 항상 무기력하고, 쪼그라들고, 형편없게만 느껴진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선택을 해놓고도,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내 삶에도 잊지 못할 선택들이 있다. 그 맨 처음은, 열네살 때였다. 아직도 나는 그 밤의 눅눅한 어둠을 기억하는데,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렸던 모친은 숨소리를 죽여가며 미닫이 방문을 밀어 열었다.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아버지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고, 맨발로 대문 밖으로 도망쳤던 모친은 짐가방 하나를 들고 문풍지가 뜯겨진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고양이 걸음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잠든 아홉살짜리 동생을 가만히 안아주고, 모친은 그 옆에 누운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팔을 뻗어 모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는데, 퉁퉁 부어 찌그러진 그의 눈이 어둠 속에 나를 내려봤다. 어떤 불안이 내 몸을 와락 덮쳐왔는데, 나는 그저 ‘엄마…’ 하고 중얼거린 게 전부였다. 짐가방을 움켜쥔 모친이 내 팔을 뜯어내고 방문을 나설 때까지, 나는 바보처럼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나는 선택 앞에서, 나를 가로막은 무언가를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20년 4월 ‘바람 불던 오후’ 제주에서. 김비 제공
선택이 아니라 결심이 필요했을 뿐
가지 말라고 외쳤어야 했는데, 엄마를 따라 나가 울며불며 매달려 온 동네 사람이 깨어나도록 가면 안 된다고, 우릴 버리고 가지 말라고 악을 써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나는 쌔근쌔근 잠이 든 동생 쪽으로 돌아누운 게 전부였다. 그 후로 내 모친을 다시 만나는 데 십년이 더 걸렸고, 내 인생의 그 십년은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뭐 이런 생이 다 있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운 앞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내 삶의 가장 깊은 나락이었다.
잊을 수 없던 두번째 선택은, 남자로 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이십대 중반 때 일이다. 떠밀리듯 선택한 공부가 아닌 다른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먹고서, 나는 어느 예술대학교에 학부생으로 다시 시험을 치렀다. 단 5명을 뽑는 시험에 수백명의 응시자가 모였고, 나처럼 적지 않은 나이에 응시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세번의 시험을 거의 실기시험으로만 합격자를 가렸는데, 운이 좋았는지 나는 2차까지 합격하고 3차 면접만 남겨놓고 있었다. 오롯이 한 시간이 넘는 면접만으로 최종 합격자를 가리는 그 시험장에 온 2차 합격자는 모두 여덟명. 다섯명의 합격자와 세명의 불합격자가 가려지는 자리였으니 합격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불합격된 셋 안에 있었다.
한 시간 가까운 단독 면접 자리에, 나는 남자 흉내를 내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나를 들키면 안 된다는 믿음이 되어, 나는 철저하게 나를 숨기는 데만 그 한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그때 내가 솔직하게 혼란의 한가운데 있던 나를 드러냈다면 나는 합격했을까? 그곳에서 새로운 진로를 찾았다면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살고 있을까? 더 행복한 삶일까, 더 못한 삶일까?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선택은, 최초의 호르몬 주사를 앞에 두고서였다. 책상 위에 주사기와 황색 액체가 든 앰풀을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망설임은 아니었다. 다만 이 치료를 통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미 남들보다 허약한 몸이었고, 오랫동안 받아야 하는 호르몬 치료를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살고 싶어 치료를 결정했는데, 오히려 그 치료가 내 삶을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는 역설 앞에, 나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엔 조금의 의심도 없었고, 이대로 최악의 결과가 초래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다. 선택이 아니라 결심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치료를 시작하고, 비로소 나를 옥죄었던 몸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나는 무척이나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나 역시 가난한 청년이었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니 꼭 수술이 아니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산다면,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다. 내가 욕망한 것은 특정 성별의 몸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태어난 통합적 의미로서의 ‘성별’과 내가 원하는 삶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일이었고, 그것이 특정 성별에 가까운 것이라 그런 방식의 치료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가난한 삶이었으니, 성전환수술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진 몸으로부터(정확히는 생식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이 선물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한국방송’(KBS)의 한 피디가 연락을 해왔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성전환수술을 진행하고, 그 과정과 삶을 시청자분들과 함께 공유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편견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어달라고 했다. 예상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 어떤 선택 앞에, 나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피디는 테이블 건너편에 있었고, 나는 한낮의 햇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 햇살의 빛깔을 기억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온기는 지금도 내 몸에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두려워만 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꽤 재미있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십여분 동안의 짧은 고민 끝에 승낙했고, 그렇게 나의 성전환수술 과정은 지상파 방송을 통해 나왔다. 내 보잘것없는 삶을 공유하는 일이 정말 이 사회에 도움되는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인으로서 나에게 수술은 최선의 결정이었던 셈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삶을 두고 간단하게 ‘여자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이 선택이었나, 명쾌한 두 글자의 단어 앞에 머뭇거리게 된다. 물론 치료도 수술도 선택이었지만,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그때 나를 가로막았던 막다른 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벽 앞에, 살아남고 싶은 한 인간이었다. 나를 가로막은 무언가를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뛰어넘을 필요 없는 것을 혼자만 넘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했지만, 막다른 길을 기어올라 나만의 길을 만들어 나아가야 했던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일은, 선택일 수 없었다.
2020년 4월 ‘바람 불던 오후’ 제주에서. 김비 제공
버튼 하나로 번쩍이는 그것 앞에서
주어진 육체를 훼손했다느니 삶을 망가뜨렸다느니 타인의 삶을 두고 여전히 혐오의 말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지만, 똑같은 육체의 일부일 뿐인데 오로지 생식기에만 집착해 있을 수 없는 일 취급하는 것은, 대를 잇는 ‘생식’을 한 개인의 삶보다 우선시하는 우리의 아둔함일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생식기의 생김이 다르더라도, 개인은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해 살아갈 자격이 있으며, 이후의 책임 또한 개인이 지면 된다. 국가가 가부를 가릴 일도 아니며, 타인이 옳다 그르다 평가할 일은 더더욱 아닌 것이고.
평생의 선택이 시소를 옮겨 타듯 간단한 것이면 좋으련만, 우린 자주 피할 수 없는 선택 앞에 선다. 도망치고 싶고, 내 몫이 아니라고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버튼 하나로 번쩍거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뿐이다. 눌러야 하는 시간을 결정하는 일, 누르는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결심하는 일, 어떤 태도로 이후의 결과를 감당할지 준비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몫이란 그게 전부다. 자학하지도 말고, 괴로워하지도 마시라. 당신은 살아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다시 또 선택 앞에 설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그때 그 선택의 가치는 충분하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