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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묵은 김치와 무나물, 저녁까지 설레게 한 그 쟁반

등록 2020-09-19 10:49수정 2020-09-19 11:34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16. 성소수자 부부의 밥

아침은 간단히, 점심은 정찬으로
별다를 것 없지만 소중한 밥
서로의 ‘밥’ 이해에 소홀함 있어

앞집 할머니의 김치·무나물 쟁반 누군가와 ‘연결된’ 이로 살아야지
잠자리 머리맡에 그 마음 새겨
언젠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을 여니 앞집 할머니가 묵은 김치와 무나물이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분이 주고 가신 음식에 마음이 설렜다. 김비 제공
언젠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을 여니 앞집 할머니가 묵은 김치와 무나물이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분이 주고 가신 음식에 마음이 설렜다. 김비 제공

둘 다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우리 부부의 아침밥은 오전 10시쯤이다. 아침밥이라고 해봐야 별다르진 않다. 과일 두가지를 우유와 함께 믹서에 갈고, 토마토와 달걀로 스크램블을 하거나 잡곡빵을 구워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다. 과일 두가지는 냉동 블루베리를 기본으로 바나나를 섞거나 냉동 딸기를 섞는데, 우리 부부는 둘 다 ‘초딩 입맛’이기에 꼭 꿀을 넣어 간다. 맘 같아선 천연 벌꿀을 넣고 싶지만, 우리 집 가계에 그 정도는 과하다고 생각하기에 언제나 사양 벌꿀을 사다 넣는다.

김비씨 부부의 아침 식사. 과일 두가지를 우유와 함께 믹서에 갈고, 토마토와 달걀로 스크램블을 하거나 잡곡빵을 구워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다. 김비 제공
김비씨 부부의 아침 식사. 과일 두가지를 우유와 함께 믹서에 갈고, 토마토와 달걀로 스크램블을 하거나 잡곡빵을 구워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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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공존하는 자의 마땅한 감각

언젠가 달걀 파동이 났을 때 달걀 한판에 1만원이 넘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침 달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요즘 달걀 한판은 5천원 안팎이다. 5천원이 넘어가면 ‘왜 이렇게 올랐지?’ 아직 냉장고에 남은 달걀 개수를 헤아리며 다음에 살까 망설이고, 5천원 아래로 내려가면 두판을 살까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둔다. 언젠가 한번 3천원짜리 달걀 두판을 사왔다가 메추리알만한 달걀 크기에 ‘그러면 그렇지’ 싶었던 적이 있어서, 너무 싸다 싶으면 꼭 묶어놓은 달걀판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달걀의 크기를 가늠한다.

요즘은 토마토가 그렇다. 아무래도 지난여름 날씨 때문인지 토마토 가격이 자꾸 올라갔고, 한끼 먹을 토마토 양이 5천원에 육박하면서 마트에서는 차마 토마토 봉지를 카트에 담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상자째 사면 나을까 싶어 구입했더니, 상자 속 토마토는 너무 작았고 수분도 많지 않아 토마토의 감칠맛이 확연히 떨어졌다. 더 비싼 값을 주면 원하는 토마토를 사겠지만, 그러면 마트에 가서 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맛있는 거 먹으려면, 돈을 더 벌라’는 겁박 같아 사소한 순간에 불쾌해지고 만다. 무슨 짓을 해서든 돈만 벌면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이 사회의 이상향인가? 딱딱한 토마토 상자 앞에서, 내 마음도 조금 딱딱해진다.

점심은 하루 중 유일하게 완벽한 정찬으로 마련한다. ‘정찬’이라고 써도 되나 살짝 망설여지기도 하는데, 우리 두 사람 가계의 기준으로 정찬이니 다른 집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일단 점심은 꼭 밥을 챙기고, 가능하면 국이나 찌개도 챙겨 먹는다.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고기든 쌈이든 풍족한 한 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반찬은 나물류와 밑반찬들을 올리는데, 대부분 시장에서 사다 먹는다. 1만5천원어치를 사면 두 식구 일주일은 먹고, 호박죽도 이따금 사다 먹는데 밋밋한 식탁 위에 별미가 되기도 한다. 김치도 사다 먹는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김치를 담그는 가게를 알아놓으면, 일상이 든든해진다. 나물류 정도는 이따금 무쳐 먹기도 하지만, 솜씨 좋은 분들의 음식에 입맛이 길들어선지 대부분 남겨서 버리고 만다.

식사를 차리고 준비하는 일은 내가 하지만, 설거지는 항상 신랑이 한다. 신랑이 직장을 다닐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하나의 과정 중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공존하는 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울증이 심해 며칠이고 몇달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조차도, 그는 밥을 먹으면 설거지까지 끝내놓고서 방으로 들어간다. 마트에 같이 가는 일조차 처음에는 짐만 들어주고는 그만이었는데, 사다 놓은 짐을 풀고 정리하는 일 역시 또 다른 노동이 된다는 걸 알고는 지금은 사 온 물건을 정리하는 일까지 같이 한다.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

<반찬 고르는 우리>, 펜드로잉, 박조건형.
<반찬 고르는 우리>, 펜드로잉, 박조건형.

우리의 밥은 자연스럽고 온당한 삶의 기본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밥’을 이해하는 데 소홀할 때가 많다. 밥을 대신 차리거나, 인사치레로 밥에 관해 묻는다고 그 소홀함이 채워지진 않는다. 건강한 삶에는 ‘밥 한공기’와 같은 기준값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다양한 방식의 건강함이 있는데, 우린 너무도 획일적인 하나만을 생각한다.

가령 나는 왼손잡이라 밥과 국을 놓을 때 국을 왼쪽에 두는 게 편리한데, 사람들은 그건 틀린 거라고 말한다. 나에게 묻지 않고, 내 밥그릇과 국그릇을 내 앞에서 뒤바꿔 놓는 경우도 여러번이었다. 나를 생각해 그런 거라는 마음을 알지만, 내 손으로 밥그릇과 국그릇을 다시 나에게 편리한 위치로 바꿔 놓으면 눈앞에 나를 위해 마음 썼던 사람의 표정이 어쩔 수 없이 어색해지고 만다. 나는 죄지은 것 없이 죄지은 사람의 불편함을 떠안는다.

밥은 예의를 위한 것인가, 건강을 위한 것인가?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인가, 타인의 건강을 위한 것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누구나 알고 있다.

저녁상은 차리지 않는다. 마흔을 넘어가면서 그렇게 되었다. ‘허기’라는 당연한 몸의 생리가 당연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 과도한 저녁 음식이 오히려 내 몸의 병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저녁의 밥은 최대한 줄였다. 상도 차리지 않고, 우리는 집에 있는 음식 중에 가장 간단한 것을 접시 하나에 올려놓고 먹는다. 복숭아 두알이 되기도 하고, 고구마 두개가 되기도 하고, 두유 한잔이 되기도 한다.

달걀이나 견과류를 곁들여 샐러드를 먹으면 맞춤할 것 같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갖가지 방법으로 야채를 보관해보아도, 처음 사 왔을 때 그대로의 야채만큼 신선할 수는 없다. 매번 먹고 싶은 샐러드라면 좋겠는데, 먹어 치워야 하는 샐러드가 되어버리면 잠시 잠깐의 식사 시간도 부대낀다. 아파트 발코니에 야채를 키우기도 한다고 해서, 한동안 여러 정보들을 검색하다가 그만두었다. 씨앗을 심는 게 나으려나 모종을 심는 게 나으려나, 나 같은 ‘식물 바보’가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건가? 이리저리 복잡한 마음만 오가다가 샐러드는 이따금 한번씩만 먹기로 결론지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고 살 수 있나, 가난한 생이 끝내 가닿고 마는 진흙탕에 나를 내려놓는다.

언젠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장 난 초인종을 벌써 몇년째 고치지 않아 우리 집 문 앞에서는 누구든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그날의 문 두드리는 소리는 훨씬 조심스러웠다. 문을 여니 앞집 사는 할머님이 묵은 김치와 무나물이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있었다. ‘우린 이렇게 먹고 살아요.’ 한번도 그런 걸 받아본 적 없어, 나는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집에 있는 건강음료 두 상자를 같이 담아 쟁반과 그릇을 돌려드렸다. ‘앞으로 이렇게 나눠 먹고 삽시다.’ 그렇게 말해주셨는데, 그 짧은 순간 할머님이 전한 두 문장 덕분에 온종일 원고를 적을 수가 없었다. 별것 아닌 일인데, 두근두근 저녁때까지 마음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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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볼 일 아니냐는 푸근함

점심은 정찬으로 준비한다. 대신 저녁은 아주 간단히 먹는다. 김비 제공
점심은 정찬으로 준비한다. 대신 저녁은 아주 간단히 먹는다. 김비 제공

외출했다가 저녁에 돌아온 신랑에게 그날 낮의 일을 자랑했더니, 신랑은 아까 낮에 자신이 짐을 올려드려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는데 앞집 할머님이 김칫거리가 담긴 무거운 봉투를 들고서 쩔쩔매고 계셔서 집 앞까지 올려드렸다고, 아마 그래서 음식을 가져다주신 모양이라고.

그래서 그러셨구나 고개를 끄덕였지만, 설레던 마음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이어지고 이어진 마음이었다니 오히려 연결된 그 모든 것들이 더욱 예뻐 보였다. 살아남는 일에 짓눌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도 누군가와 ‘연결된’ 사람으로 살아야지, 그림일기를 쓰는 초등학생처럼 나는 잠자리 머리맡에 그 마음을 새겨 넣었다.

아주 오래되고 고리타분하게 들릴 게 분명한 말들 중에, ‘사람은 밥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의 중심은 ‘밥’에 있다기보다 ‘사람’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무엇이든,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일단 밥은 먹고 볼 일 아니냐고 묻는 그 말이 전하는 푸근함을, 나는 요즘 자주 떠올린다.

명절이 가까이 왔다. 이전에 없던,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명절이 될 것이다. 부디 이번 명절에는 가족 없는 사람도, 홀로 남겨진 사람도, 성소수자도, 성소수자 아닌 사람들도, 모두 서로에게 밥을 나눌 수 있는 며칠이 되기를 바란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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