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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32년 시암혁명, 92년 방콕항쟁, 그리고 2020년 타이시위

등록 2020-10-24 17:30수정 2020-10-24 17:34

[토요판] 특집
입헌군주제와 타이 민주화

해외유학파들 결집으로 시작해
‘타한 스아 4’ 앞장서 이뤄내고
쁘라차티뽁 국왕이 받아들인
입헌군주제 ‘1932년 시암혁명’

‘노란표지서류’ 사건 등으로
군부 정치개입 등 곡절 계속
시암혁명 영웅 흔적 지워지고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커져

새 국왕의 권위, 군부 장기집권
의심하는 시민들 거리로 나서
민주화의 상징 사남루엉 집회
옛 시암혁명과 일체감 느껴져
2020년 9월17일 타이 방콕 사남루엉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손가락 세개를 들어올리고 있다. 이 동작은 최근의 타이 민주화 시위를 상징하는 행동이 됐다. 사남루엉 광장은 타이 민주화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EPA 연합뉴스
2020년 9월17일 타이 방콕 사남루엉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손가락 세개를 들어올리고 있다. 이 동작은 최근의 타이 민주화 시위를 상징하는 행동이 됐다. 사남루엉 광장은 타이 민주화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EPA 연합뉴스

▶ 타이에 있는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현재 타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대규모 시위를 분석했다. 군부의 장기집권에 맞서고, 왕실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되묻는다는 점에서 최근의 시위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활동해온 정 기자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두라만 와힛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들을 인터뷰했다.

“이제 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움직일 바퀴를 끼울 때가 왔습니다. 세상은 바삐 돌아가는데 쁘라차티뽁 국왕 아래 우리 조국은 너무 오랫동안 게을렀습니다. 펜을 들고 우리의 사명을 종이에 옮겨 그 말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행동이 되도록 합시다. … 파리의 호텔을 찾아가서 내 지시를 기다리기 바랍니다.”

1927년 2월, 파리정치대학 출신 쁘리디 파놈용의 편지를 받은 타이 사람들이 프랑스 파리 한복판 5구의 한 호텔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쁘리디 파놈용을 비롯한 유학생 셋, 쁠랙 피분송크람 대위를 포함한 군인 유학생 셋, 파리 주재 타이 외교관 시리랏차마이뜨리, 그렇게 일곱은 조국 타이의 정치개혁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닷새짜리 난상토론 끝에 본보기 삼았던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타이의 사회적 조건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맹 농민이 주류인데다 귀족한테 기댄 중산층이 겨우 움트는 현실 속에서 대중봉기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었던 탓이다. 결국 이들은 군사쿠데타를 통한 정치개혁을 결의했다.

회의를 마친 일곱은 스스로 푸꼬깐(주창자)이라 부르며 전위 정당 카나랏사돈(인민당)을 띄웠다. 그리고 ‘인민권력’ ‘국가안보’ ‘국가 경제계획과 복지’ ‘평등’ ‘인권과 자유’ ‘교육’을 6대 강령 삼아 쁘리디 파놈용을 의장으로 뽑았다. 이 작은 모임이 타이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방콕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1932년 6월 성공한 무혈쿠데타

그해 타이로 돌아온 쁘리디 파놈용은 쭐랄롱꼰대학 교수 겸 법무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관료와 시민을 인민당으로 끌어들였다. 귀국 뒤 소령으로 진급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부를 파고들어 파혼폰파유하세나 대령을 비롯한 신망 높은 고참 장교들과 손을 잡았다. 입헌군주제를 앞세운 인민당 핵심 조직원은 머잖아 102명으로 불어났다.

1932년 6월23일, 타이 방콕에 어둠이 내렸다. 도심을 가르는 짜오프라야강에 닻을 내린 해군 함정이 내무장관으로 실권을 휘둘러온 보리팟 수쿰판 왕자의 궁을 향해 포를 겨냥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신투송크람차이 대위가 이끄는 해군 500여명이 두싯왕궁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같은 시각, 육군 대위 쁘라윤 파몬몬뜨리가 이끄는 요원들은 전신국을 접수해 왕궁과 정부 사이의 통신선을 차단했다.

6월24일 새벽 4시,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타한 스아 4’(호랑이 군인 넷)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파혼폰파유하세나 대령이 두싯왕궁을 포위하는 사이 송수라뎃 대령은 왕실 경호대인 제1기갑연대를 접수한 뒤 탱크와 무장 차량을 왕궁으로 보냈다. 쁘라삿피타야윳 대령은 기갑연대 사령관을 체포해 감금했고, 이어 제1보병연대를 장악한 릿티아카네이 대령이 병력을 이끌고 두싯왕궁에 닿았다.

새벽 6시, 두싯왕궁 광장에 동이 텄다. 탱크에 오른 파혼폰파유하세나 대령은 구경 나온 시민들을 향해 절대왕정의 최후를 선언했다. 아침 8시, 권력을 쥔 왕자들을 비롯한 고위 관료 40여명을 체포하고 작전을 종료했다. 그리고 정오가 채 되기 전 방콕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유일하게 저항하던 제1군 사령관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인 이 군사작전은 무혈쿠데타로 기록되었다.

“나를 입헌군주로 방콕에 초대한 당신들 편지를 받았다. 평화를 위해 쓸데없는 유혈사태와 혼란을 막고 나라를 잃지 않고자, 나는 이미 스스로 이런 변화를 고민해왔다. 나는 기꺼이 헌법 아래 봉사할 것이고, 그 헌법 제정에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그날 후아힌의 여름왕궁에서 휴가를 즐기던 쁘라차티뽁(라마7세) 국왕은 ‘타한 스아 4’가 푸꼬깐(주창자) 이름으로 보낸 전보에 화답했다. 이틀 뒤인 6월26일 국왕은 방콕으로 되돌아갔다. 타이 현대사의 최대 전환점인 이른바 ‘1932년 시암혁명’이었다. 수코타이왕국으로부터 694년 동안 대물림한 타이의 절대왕정은 그렇게 반나절 만에 막을 내리고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갈아탔다.

그즈음 쁘라차티뽁 절대왕정은 와치라웃(라마6세) 전 국왕이 대물림한 재정적 어려움과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겹친데다,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놓고 다투어온 영국과 프랑스의 압박이 방콕에 쏠리면서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회적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미 400명을 웃도는 해외유학파 관료들 사이에는 유럽식 현대화와 민주주의 요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쁘라차티뽁 국왕은 전보에서 밝혔듯이 정치·경제적 개혁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던 셈이다.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우리는 이념청소를 보고 있다”

6월17일 임시헌법에 따라 국왕 쁘라차티뽁 국왕은 인민당이 추천한 중립적 성향을 지닌 마노빠꼰 니띠타다를 초대 총리로 임명했다. 이어 신성불가침 조항을 놓고 인민당과 국왕의 줄다리기 끝에 12월10일 타이 왕국의 첫 헌법을 공표했다.

이어 1933년 경제난국 돌파를 위해 쁘리디 파놈용은 국정장관으로서 세제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식 국가경제개발 계획을 짰다. 이른바 ‘노란표지서류’(Yellow Cover Dossier)였다. 그러나 쁘라차티뽁 국왕은 서명을 거부하며 쁘리디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노란표지서류 사건은 이내 인민당의 내분으로 이어졌고 시암혁명을 이끌었던 송수라뎃을 비롯한 군인들이 무장한 채 인민의회에 난입했다.

4월1일 마노빠꼰 총리는 인민의회를 해산하고 제한적인 비상사태 선포를 통해 입법부와 사법부를 중지시켰다. 마노빠꼰 총리는 곧장 반공법을 제정해 시암공산당(타이공산당 전신) 중앙위원들을 체포한 데 이어 언론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짓밟았다. 위협당한 쁘리디는 4월12일 프랑스로 망명했다.

정변이 꼬리를 물었다. 6월20일, 이번에는 시암혁명의 줏대였던 파혼폰파유하세나 대령이 ‘노란표지서류’ 사건으로 불거진 ‘조용한 쿠데타’에 대한 역쿠데타로 마노빠꼰 총리를 몰아냈다. 9월 들어 방콕으로 되돌아온 쁘리디는 학자로서 탐마삿대학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섭정(1941~1945년)을 거쳐 1946년 총리를 했던 쁘리디는 타이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공산주의자’ 낙인이 찍혀 어둠의 역사에 가려버리고 말았다.

갓 태어난 입헌군주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변 속에서 걸음마를 뗀 셈이다. 이어 쁘라차티뽁 국왕이 입법 거부권과 왕실 재정 불간섭(면세)을 요구하면서 다시 혼란이 일었다. 1935년 3월2일, 인민당이 끝내 그 요구를 거부하자 타이 현대사의 첫 입헌군주 쁘라차티뽁은 왕위를 물러나 영국으로 떠났다. 곧장 인민의회는 스위스에 살고 있던 아홉살 먹은 아난타 마히돈(라마8세)을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 설립 과정에서 쁘라차티뽁 국왕의 역할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2017년 타이 헌법 전문은 ‘쁘라차티뽁 국왕이 자비롭게 허락한 헌법’을 강조해놓았다. 물론 전문에서 입헌군주제 설립의 줏대였던 시암혁명 관련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시암혁명은 역사에서 외톨이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제 사라지는 실정이다. 두어 해 전부터 시암혁명의 영웅이자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인민당 기념물들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1932년 시암혁명 선언지를 가리키던 명판, 국방연구소에 세웠던 쁠랙 피분송크람 동상, 방콕 군부대에 세웠던 인민당 주역 동상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이 정체불명 역사 지우기는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등장하고부터 벌어진 일이다. “우리는 역사유적의 소멸을 통한 이념청소를 보고 있다.” 건축사학자 차뜨리 쁘라낏논타깐 말을 귀담아들어볼 만하다.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입헌군주제 88년, 군인 출신 총리

입헌군주제가 빚은 또다른 논란은 군인정치다. 애초 대중봉기나 의회 대신 군사쿠데타로 입헌군주제의 길을 닦은 타이 현대사는 고질적인 쿠데타 전통을 대물림했다. 1932년 무혈쿠데타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뒤 지난 88년 동안 헌법에 손을 댄 쿠데타만 20번이었고, 군인이 정치를 말아먹은 기간만도 59년이었다. 그사이 스쳐간 총리 29명 가운데 군인이 16명이었다. 불완전한 타이 입헌군주제의 어두운 속살이다.

“타이에는 타이식 정치사와 타이식 민주주의가 있다.”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 정부를 몰아낸 쿠데타 주모자 손티 분야랏깔린 육군총장이 했던 말이다. 이게 타이 군 지도부의 뇌 속으로 대물림해온 이른바 ‘군인의 지분’이다. 굳이 입에 올리진 않지만 1932년 시암혁명을 군인들 손으로 이뤄냈다는 뜻이다. 지난 30년 동안 타이 정치판을 취재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군 지도부 가운데 쿠데타를 부정하며 이 “타이식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지 않은 인물이 쳇타 탄나짜로 전 육군총장(1996~1998년) 딱 하나였을 정도다.

1946년 6월9일 아난타 국왕이 의문스레 총상을 입고 사망하자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라마9세)이 왕위를 이었다. 재위 기간 70년으로 세계 최장기 기록을 세운 푸미폰 국왕은 입헌군주제 아래서 절대왕정에 버금가는 권위와 권력을 지녔던 독특한 경우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1970년대 정변을 통해 서서히 그 권력을 키워나갔다고 볼 만하다. 특히 1973년 탐마삿대학 민주화운동을 학살 진압한 군인 독재자 타놈 낏띠카쫀 총리가 싱가포르로 망명한 뒤, 그 후임으로 산야 탐마삭 총리를 비롯한 세 총리를 푸미폰 국왕이 직접 지명했다. 여기가 바로 오늘날까지 입헌군주의 정치 개입 논란을 낳은 출발지이기도.

그러다 1990년대 들어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절대성을 띠기 시작했다. 1992년 방콕민주항쟁을 그 계기로 볼 만하다.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독재자 수찐다 크라쁘라윤과 시위를 이끈 짬롱 시무앙 전 방콕 시장이 국왕 앞에 무릎 꿇고 경청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전국에 퍼져나갔고, 이내 수찐다 총리가 퇴진했다. 그로부터 푸미폰 국왕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시민 사이의 인기가 곧 권력의 바탕이 되었던 셈이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거의 신격화되었다. 그에 따라 입헌군주에 대한 반발이 서서히 고개 들기 시작한 것도, 불경죄(왕실모독제)가 강력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도 모두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비판적인 연구자들마저 타이 왕조사에서 푸미폰만큼 사회적 영향력과 존경을 받았던 국왕은 흔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2016년 10월13일 푸미폰 국왕 서거에 이어 장남 마하 와치랄롱꼰이 국왕을 승계했다.

그렇게 입헌군주제로 갈아탄 타이 현대사가 이제 88년째를 맞았다. 여전히 타이 정치판은 군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지난 여섯 달 동안 타이 사회는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쁘라윳 짠오차 총리 퇴진을 외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올봄부터 교내 시위로 몸을 달군 탐마삿대학 학생들이 9월 들어 거리로 뛰쳐나와 시민사회와 연대하면서 불길을 댕겼다.

특히 지난 9월19일 방콕 민주화운동 성지인 사남루엉 시위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날은 꼭 14년 전인 2006년 손티 분야랏깔린 전 육군총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기도 했다. 방콕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12만㎡ 광장은 본디 퉁프라멘이라 부른 왕실 화장터인데 1855년부터 통사남루엉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람들은 그걸 줄여 사남루엉으로 불러왔다. 왕궁과 탐마삿대학을 낀 이 사남루엉은 타이 현대 정치사의 전환점이 된 1973년 십시뚤라(10월14일)와 1976년 혹뚤라(10월6일)라는 두 차례 탐마삿대학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다. 그로부터 사남루엉은 프사파타민(검은 5월)이라 일컫는 1992년 방콕 민주항쟁을 비롯해 크고 작은 시위대의 심장 노릇을 해왔다.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1932년 시암혁명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왕실 차량 통행 방해를 빌미로

2014년 쁘라윳 짠오차 육군총장 쿠데타 뒤 첫 대규모 시위였던 이날 사남루엉에는 3만 군중이 몰려들었다. ‘탐마삿시위연합전선’이란 이름을 내건 시위대가 비록 ‘사남루엉 정족수 10만’을 채우진 못했지만 타이 사회를 크게 흔들며 심상찮은 앞날을 예고했다. 여기서 사남루엉 정족수 10만이란 건 의회 권력과 맞먹는다는 뜻이고, 그 힘으로 정부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다는 해묵은 전통이다.

이날 사남루엉 시위대는 쁘라윳 총리 퇴진과 헌법 개정을 앞세웠지만, 그보다는 왕실 개혁을 외친 대목이 크게 눈길을 끌었다. 사남루엉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시위대는 20일 오전 왕실을 보필하는 추밀원으로 행진했고, 왕실 터인 사남루엉에 ‘사남랏사돈’(인민광장)이란 명패를 심었다. 내 기억에 여태 그 어떤 시위대도 공개적인 장에서 왕실 개혁을 외치며 왕실 상징에 손댄 적이 없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타이 시민사회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언론과 학계도 저마다 몸을 사리며 비판적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들을 모아 보면 “시민 정서를 무시한 채 지지자들마저 쫓아버린 급진적 시위 전략이고 유아적 발상이었다” 쯤이 될 법하다.

정부 쪽에서도 곧장 반응이 왔다. 21일, 경찰은 최대 15년 형을 매긴 헌법 제112조 불경죄(왕실모독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시위 지도부 4명을 고발한 데 이어, 방콕시와 문화재국은 사남루엉 문화재 훼손죄로 시위 지도부 10명을 고발했다.

이 사남루엉 시위는 역사의 기억을 되살려놓은 셈이다. 88년이 지났지만 그 논란거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지고 보면 이날 사남루엉 시위 지도부가 외친 왕실 개혁의 고갱이는 어려운 경제 사정에 왕실이 고통을 함께 나눠 달라는 예산 절감이었다. 이건 왕실의 권위에 도전한 정치적 개혁을 요구했다기보다 국왕을 향한 탄원에 가까웠다. 88년 전 쁘라차티뽁 국왕과 인민당이 왕실 예산을 놓고 부딪쳤을 때도 그랬듯이.

그러고 보니 올해 시위는 전에 없이 1932년 시암혁명과 일체감을 드러내는 낌새다. 앞선 6월24일, 민주기념탑에서 입헌군주제를 끌어낸 시암혁명 88주년 기념식을 치른 시민운동가 40여명도 그 혁명의 주체였던 ‘카나랏사돈’이 그려진 옷을 몸에 걸치고 나와 민주화 투쟁을 다짐했다. 그 뒤 이들은 ‘카나랏사돈 2563’(인민당 2020)으로 이름을 바꿨고, 지난 10월15일 지도부 넷이 체포당하고부터 랏사돈(인민)으로 바꿨지만.

이어 10월14일 민주기념탑 시위에서는 일부 참가자들이 경찰 저지선을 넘어 왕실 차량 통행을 방해하면서 말썽이 났다. 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 쪽으로 왕실 차량을 선도한 경찰을 의심하는 눈길도 적잖지만, 아무튼.

하루 뒤인 15일 쁘라윳 총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왕실 차량 통행 방해를 빌미 삼은 건 말할 나위도 없다.

타이 민주화 시위대가 지난 10월18일 방콕 도심의 승전기념비 주변에서 우의를 쓰고 우산을 든 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시위대는 정부의 비상칙령을 무시하며 4일째 집회를 강행했다. 연합뉴스
타이 민주화 시위대가 지난 10월18일 방콕 도심의 승전기념비 주변에서 우의를 쓰고 우산을 든 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시위대는 정부의 비상칙령을 무시하며 4일째 집회를 강행했다. 연합뉴스

시민이 선택할 시간이 다가온다

10월22일 현재, 100여명에 이르는 시위 지도부가 체포당한 상태지만 방콕과 치앙마이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위가 비록 정치조직화를 외치고는 있지만 대안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는 아직 가늠하기 이르다. 다만, 이번 시위가 정부의 진압 강도와 군부의 움직임에 따라 충돌할 가능성은 여전히 안고 있다. 다른 말로 정변의 밑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군부를 눈여겨보는 까닭이다.

한편 탁신의 전 아내 폿짜만 나 뽐펫이 조종해온 프어타이당은 의회 내 투쟁 전략으로 바꿔 대중 시위와 거리를 둬왔다. 지난 16년 동안 친탁신 레드셔츠와 친왕정 옐로셔츠의 다툼으로 피로도가 쌓인 시민사회의 눈치를 본 결과다. 2014년 쿠데타 뒤 찍소리 없이 사라졌던 레드셔츠가 동력을 얻기 힘든 까닭이다.

여기에 신세대가 줏대로 나선 시위 현장 분위기도 전과 다르다. “이번 시위는 구닥다리 정치판에 기대지 않고 혼자 서야 우리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탐마삿대학 학생 뻬나빠 말마따나 기성 정치판에 대한 불신은 프어타이를 비롯한 야당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시위를 보는 마음은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지난 16년 동안 왕실을 비롯한 토호자본과 탁신으로 상징되는 신흥자본의 대리전에서 승자는 오직 자본가일 뿐이라는 본질을 확인한 탓이다. 그 대리전에 동원된 이들은 아직도 먹고살기 힘들어 아우성치고 있다. 이번 시위가 과녁을 오롯이 겨냥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타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 “다이양시에이양”이란 게 있다. 뭔가를 얻고자 하면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민의 선택이 남았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장마가 끝물로 접어든 방콕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온다.

타이/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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