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하루하루 버티는 마음으로 죽어라 노력했어요.”
상업고등학교 졸업 뒤 40년 가까이 일한 공기업에서 퇴직을 앞둔 최영숙(가명·59)씨는 회사 생활을 이렇게 돌아봤다. 두꺼운 코트로 교복의 학교 문양을 가리고 다녔지만 사회에 나와선 ‘고졸’을 가릴 수 없었다. 은행에 취직했지만 짬을 내서 야간대학을 다녔고, 1980년대 초반 대졸 공채로 공기업에 입사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곧 낙담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 다른 고졸 여직원들과 함께 남직원들의 자리를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도 업무 대신 커피 타기, 사무실 정리 등 온갖 잡무를 떠안는 고졸 여성 노동자들이 나온다. 1995년 직장이 배경인 영화가 연일 흥행(3일 100만 관객 돌파)을 이어가는 가운데 영화 속 ‘자영’(고아성)에게 공감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에는 ‘2020년의 자영씨’들이 ‘25년 전 자영씨’를 보며 “지금 나와 내 옆자리 여성들의 이야기 같다”고 쓴 관람평이 이어진다.
5일 <한겨레>는 20~50대의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자영씨’에 왜 공감하는지 물었다. 이들은 “영화 속 자영씨의 고군분투가 남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상고 졸업 후 40년 넘게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김정희(가명·59)씨는 입사 초반 남직원들과 동등한 처우를 받기 위해 사내 직급전환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난도가 상당한데다 임원들이 자의적으로 눈 밖에 난 여직원들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어 ‘고시’라 불렸다.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켜준다’며 고졸 여직원들의 ‘노력’만을 강조했던 영화 속 설정과 겹친다. 그는 “그동안 차별이 많이 사라졌다”면서도 “실적 좋은 여직원들이 승진하면 남직원들이 ‘역차별’이라고 투덜대거나, 커피 심부름 등 잡무는 여직원이 맡는 경향은 지금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대기업에 취직한 20대 여성들도 선배 세대와 정도만 다를 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토로했다. 박아무개(26)씨는 상고 졸업 후 대형 기계 회사에 들어갔다. 당시(2012년)는 정부가 고졸 채용을 장려하고 기업들도 고졸 공채를 확대하던 때였다. ‘5년간 일하면 대졸 사원과 같은 직급으로 승격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그는 “어린 여직원이란 이유로 책상을 닦고 과일을 썰게 하는 일이 잦았다”고 말했다.
8년을 다녀도 회사에선 줄곧 ‘여자애’로 불렸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여성들은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다. 2013년 상고 졸업 뒤 금융회사에 취직한 박아무개(27)씨는 “상사가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 쌓느라 힘든데 너 정도면 거저 취업했다’고 말할 때 큰 상처를 입었다”고 털어놨다. 2017년 대학 졸업 뒤 전자 회사에 취직한 오아무개(27)씨도 “영화처럼 원피스 유니폼을 입진 않지만 ‘여자는 꽃’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래처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직위 대신 ‘예쁜 애’로 소개됐을 땐 할 말을 잃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영화처럼 회사와 사회는 “차별은 없지 않냐”고 되묻는다. 지난 9월 대한상공회의소의 여성 노동자 300명, 기업 인사 담당자 30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 노동자들은 71%가 ‘회사 생활 전반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답했지만 인사 담당자들은 81%가 ‘성차별이 없다’고 답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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