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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를 ‘보통 사람’ 취급하지 않는 티브이 보며, 그래도 웃네

등록 2020-11-07 09:39수정 2020-11-07 10:02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19. 티브이에게 하는 부탁

65인치 화면으로 글 쓰고 다른 삶 시청
모두 똑같은 네모 속 ‘단 하나의 가족’
현실의 삶 왜곡하는 것 같아서 답답

억지로 웃게 하는 가짜 즐거움 대신
‘고립이 생존’인 시대에 위안 되고
소외된 곳 비추며 ‘진짜 삶’ 조망하길
2015년에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찍은 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기 쉽지 않은 누군가에게 티브이는 ‘바보상자’가 아닌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통념과 ‘정상’ 개념은 이따금 불편하고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비 제공
2015년에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찍은 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기 쉽지 않은 누군가에게 티브이는 ‘바보상자’가 아닌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통념과 ‘정상’ 개념은 이따금 불편하고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비 제공

티브이(TV)를 가리면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 있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티브이 화면 속에 등장하는 것들이 거짓일 리 없다고 믿었다. 큰 일은 큰 일대로 작은 일은 작은 일대로 사람들의 감정은 티브이가 전하는 소식에 따라 요동쳤다. ‘티브이에 나왔다’는 것만큼 힘있는 말도 없었고, 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이상 작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일이 마을의 자랑이던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 우리는 변하거나 사라진 것들에서 그리움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운 것들 중에, 티브이는 없는 것 같다. 골목에 내어놓고 앉아서 햇살을 쬐던 의자 하나, 이가 빠진 그릇 하나까지 문득문득 그리워진다는 고백까지 들은 적은 있는데, 우리의 일상을 같이한 물건들 중에 티브이는 유독 ‘문젯거리’ 취급만 받아왔다.

‘바보상자’란 말을 낙인처럼 붙이고서 빈둥거리는 누군가 반드시 끌어안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쓸모없는 것. 집 안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가족 모두의 시간을 빨아들이는 몹쓸 것.

나는 이따금 그런 방식의 사유가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닌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기 쉽지 않은 누군가에게 티브이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문밖에서 삶을 찾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 총천연색으로 어디든 데려다주는 저 네모난 상자 하나는 유일한 출구이자 세상과 연결된 통로일지도 모르는데, 하나의 통념만을 간신히 넘어선 문장 하나가 절대 깨져서는 안 되는 진리로 여겨지는 ‘정상’ 개념은 이따금 불편하고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나는 티브이를 글 쓰는 데 쓴다. 이렇게 말하면 티브이에 관해 쓰거나 자료 찾는 용도로 쓸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다른 작가들이 타자기나 노트북을 글 쓸 때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티브이로 글을 쓴다. 태블릿 피시를 케이블로 연결하고 65인치 티브이에 미러링(작은 휴대기기 화면을 큰 화면으로 보이게 하는 것)을 해, 화면을 나누어 한쪽에는 음악을 반복 재생하는 영상을 띄워놓고서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를 이용해 소파에 앉아서 쓴다.

이유는 두 가지다. 노안 때문에 더 이상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편안한 상태로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노안 안경도 맞췄는데,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아무런 방해나 부대낌이 없어야 글을 쓸 수 있는 내 습관 때문에 눈에 걸려 있는 안경 하나마저 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글을 쓰다가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생각과 문장을 곱씹는 경향이 있는데, 그때마다 안경을 벗고 다시 쓰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주 동안 끙끙 앓다가 누군가 케이블을 연결해 태블릿 화면을 커다랗게 티브이 화면으로 옮겨놓은 것을 보았다. 내가 가진 태블릿으로 시도해보니, 거대한 화면에 시원하게 쏟아진 활자 덕분에 노안임에도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글을 쓸 때 내 자세 때문인데, 나는 자판을 책상에 올려놓고 쓰지 않고 무릎에 올려놓고 쓴다. 점심 한 끼 챙겨 먹고 방구석에 두 다리 쭉 뻗고 벽에 기대앉은 사람처럼 온몸을 이완시키고 앉아 글을 쓴다. 어떤 작가분들은 가장 정돈된 자세에서, 혹은 모든 것이 지워진 고요 속에서라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뒹굴거릴 수 있는 가장 이완된 몸으로 오히려 조금은 시끄러워야 글을 쓴다. 의도치 않게 나이 오십에 나는 최첨단 기기들의 작동 방식을 활용해 글을 쓰는 셈이다.

글을 쓸 때 태블릿 피시와 연결해 모니터로 이용하는 티브이. 김비 제공
글을 쓸 때 태블릿 피시와 연결해 모니터로 이용하는 티브이. 김비 제공

티브이 속 이성 가족의 정상성

글을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티브이는 성소수자인 나에게 비성소수자들의 이성 가족 중심 사회를 구경하는 반투명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른바 ‘리얼다큐’라는 이름이 붙은 반만 진짜인 관찰 프로그램들을 보면, 똑같은 이성 가족도 구성원에 따라 공존의 방식이 참으로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티브이는 여전히 똑같이 생긴 단 하나의 창 너머로, 그 모든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의 기준으로만 넘겨 보려는 것 같다. 행복하고 즐거운 가족을 전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이해하긴 하겠는데, 저런 시선이 이성 가족을 올바르게 보여주는 일일까, 오히려 이성 가족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까, 티브이 너머에서 나는 조금 안타깝고 답답해진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지금의 청년들은 너무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성 가족의 정상성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먼 옛날의 기준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누군가 참고 견디고 한쪽이 무너진 채 억압되어 있어야, 안정적이고, 일상적이고, 또 평화롭다고 말한다. 이성 가족은 오직 ‘남녀’의 결합일 뿐 결코 ‘녀남’의 결합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아이 없는 가족의 삶은 너무도 가볍게 지워져버리고 만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든 ‘현실을 보라’고 반론을 제기할 텐데, 솔직히 티브이 화면 속에 등장하는 그런 한가로운 ‘정상성’ 속에 사는 이성 가족이 얼마나 될까? 각자의 방식으로 이성 가족 역시 나름의 생존을 모색하며 살아남으려는 것이 현실인데, 그것을 오로지 연민의 대상이나 발버둥으로만 매도하는 티브이의 태도는 정말 바람직한 걸까? 박탈감만 주고 마는 ‘먼 나라’ 가족들의 현실을 보여주며 정말 ‘올바른 가족 관계’를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건지, 시청률이 곧 출산율이나 혼인율이라고 믿는 건지, 나는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다른 방식의 가족이 공유하는 풍경

그 많은 가족들 중에 왜 성소수자 가족, 장애인 가족은 없는 거냐는 그 단순한 불합리를 따져 묻기도 전에, 나는 티브이 속에 등장하는 이성 가족의 기이한 ‘확신’ 역시 좀 걱정스럽다. 그 어떤 성소수자도 이성 가족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저 이성 가족들 중 누군가 분명히 성소수자로 살게 될 텐데, ‘사랑 충만한’ 이성 가족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믿는 이 이성애 사회의 태도가 좀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삶을, 청년들의 삶을 ‘당연함’이란 틀 안에 가두고 억압하려는 그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착찹해지고 만다.

누군가에게는 ‘판타지’라는 말을 듣겠지만, 나는 언젠가 티브이 속에 서로 다른 방식의 가족이 다 같이 모여 각자의 삶을 나누는 풍경을 상상한다. 성소수자 가족과 비성소수자 가족이 같이 모여 서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족’이라는 공존의 의미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일 말이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존을 이루어가는 서로를 통해 배우고 깨우치며 같이 성장하는 그런 티브이 말이다. 장애인 가족과 비장애인 가족이 생활을 꾸리기 위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몸을 쓰는 풍경을 발견하고, 같이 공감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가족을 억압했던 물건들, 구조물의 높이들, 그리고 그걸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기대고, 뜨거움을 나누는지 보여주는 그런 티브이 말이다.

무수히 여러 번 자본의 논리로, 정치의 논리로 티브이의 초심은 훼손되었지만, 그럼에도 잃지 말아야 하는 ‘존재의 이유’ 한 가지는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풍경을 담는다는 그 한 가지일 것이다. 경쟁과 욕망을 부추기거나 억지로 웃게 하는 가짜 즐거움 말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고립이 곧 생존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그럼에도 잃지 말아야 할 공존의 기본값을 일깨우는 역할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전에는 놓치고 말았던 소외된 자리에 눈을 두고서, 한쪽 눈만 뜨고 바라보던 삶의 풍경을 새롭게 조망하는 책무를 이제는 다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나를 ‘보통 사람’ 취급하지 않는 티브이를 보며 그래도 즐거움을 찾으려 애쓴다. 우리를 외면하고 없는 존재 취급했던 그것을 향해 박수 쳐주고 같이 웃어준다. 언젠가 이쪽을 돌아봐주겠지, 우리 쪽을 향해 웃어주겠지,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시선으로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그날을 2020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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