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0월26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범으로 기소된 피고인 이민걸, 이규진의 범죄사실과 (저의 공소사실이) 일치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 사건에서 증인으로 증언하는 경우, 검사가 그 증언 내용을 제 형사사건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12월3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사법농단 재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전 실장과 검사 양쪽의 요청에 의해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지난달 19일 정당한 사유 없이 증인 소환에 불응해 과태료 300만원 처분을 받은 뒤다. 재소환 끝에 법정에 증인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증언을 거부했다. ‘검사 혹은 피고인 쪽의 질문→임 전 차장의 증언 거부→재판장의 허용’만 반복됐다. 형사소송법(제148조)은 증인 본인이 공소 제기를 당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을 사실이 알려질 염려가 있을 때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증인신문이 진행된 4시간 동안 그의 입을 열기 위해 몰아치듯 질문한 건 검사가 아닌 공범 이 전 실장의 변호인이었다.
이 전 실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 전 차장 등과는 공범으로 묶여 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 시절 예산, 운영, 정책 결정 등 ‘법원 살림’을 담당하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2015년 8월~2017년 11월)을 지냈다. 2015~2017년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등에 개입하고, 눈엣가시였던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와해하려 했다는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임 전 차장과 별도로 재판을 받는다.
이 전 실장의 변호인은 간곡한 ‘부탁’으로 신문을 시작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당시 법원행정처가 마치 헌법 유린 단체처럼 인식되고 있다. 지시와 논의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묻히면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 사법부 구성원의 자긍심과 명예를 위해서라도 진실 발견에 도움을 달라.’ 그리고 송곳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재구성해본 주요 신문 내용이다.
“(통진당의 우회적 재창당을 사전 억제하기 위해 자치단체의 행정소송을 기획하는 문건을 언급하며) 법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당시 집권당과 정부의 성향에 맞춰 소송을 부추긴다는 엄청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우병우입니다. 증인이 독자적으로 행정처 실장과 처장, 대법원장 모르게 진행한 이유는 증인 개인의 이익과 연관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유가 뭡니까?” (이 전 실장 쪽 변호인)
“답변이 유죄 증거로 채택될 수 있어 증언 거부합니다.” (임 전 차장)
“(인사모에 관한 거리낌을 확산시키거나 경쟁 연구회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한 문건을 살펴보며) 증인은 이인복 대법관의 후임으로서 증인의 입지에 장애가 될까 봐 국제인권법연구회 폐지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6년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에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는 상황에서 검토한 것은 대법관 임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같은 이유로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증인은 2017년 대법관 제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차장 자리를 유지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 낸 반대 의견을 제어해, 민정수석과 좋은 관계를 가져서, 대법관 제청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까?”
“동일한 이유로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검찰은 사법농단 의혹을 양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 전 차장, 이 전 실장 등에 이르는 조직적 범죄로 바라본다. 특정 재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대법원장의 기조를, 법원행정처 수뇌부가 공유·실행해, 대법원장의 의사를 실현하는 구조다. 그러나 변호인 질문의 전제는 이렇게 추측된다. ‘이 사태는 차기 대법관 자리를 눈앞에 둔 임 전 차장이 자신의 과욕을 주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이는 사법농단을 단순히 임 전 차장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는 일부 판사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018년 9월12일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월5일 이 전 실장 재판에서는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쟁점 공방이 진행됐다. 검사는 ‘주요 재판의 결론에 따라 사법부가 받을 비난, 다른 기관과의 관계 등을 예측해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은 사법행정상의 목적을 위해 재판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이는 직무권한의 위법한 행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전 실장 쪽 변호인은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부의 이해관계, 재판에 대한 평가, 국회에서의 질의를 대비해 ‘중요 재판의 결론을 미리 예상해보자’는 접근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방향이 대외관계에서 유리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재판부에 힘을 넣어보자 생각할 수도 있겠죠. 특히 저는 ‘특정인’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검사님은 그 ‘특정인’의 생각과 그가 지시한 검토를 대법원장, 행정처장, 행정처 실장들 전부로 확대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단순하죠. 대법원장을 처벌하는 게 수사 결과가 좋다는 평가로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으니까요.”
변호인은 그 특정인이 누군지 밝히진 않았다. 유무죄를 다투거나 양형을 따질 때 그 특정인을 방패로 삼으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전 실장 등의 재판이 2년 가까이 진행됐고, 지시·명령의 구조와 나눠 맡은 실행 행위는 더욱 선명해진 상태다.
통진당 재판 개입 의혹만 해도 그렇다. 이 전 실장은 2015년 12월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이 진행될 때, 김광태 당시 서울고법 재판장에게 연락해 국회의원 지위에 대한 판단 권한이 헌재가 아닌 법원에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건넸다. 그리고 이러한 법리가 정리된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을 건네려고 시도했다. 이 전 실장의 법정 증언이다. “차장님 주재 회의에서 ‘자료 읽어보고 재판해야 하는 것 아니냐’ 했던 것 같습니다. 김광태 재판장은 초임 (때 나와 함께) 우배석, 좌배석이었고 가까운 사이니까 제가 물어보겠다 했던 것 같습니다.”(2020년 5월22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증인신문) 2016년 2월 이동원 부장판사(현 대법관)로 재판장이 바뀌었지만 그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2016년 3월3일 친분을 이용해 식사 자리를 마련한 이 전 실장은 문제의 법원행정처 문건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1심 재판부가 통진당 의원들에 대한 헌재의 의원직 상실 결정을 법원이 심리·판단할 수 없다며 소 각하 판결하자, 임 전 차장, 박병대 전 처장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재판부에 관련 문건을 전달하자는 대책을 마련하고 항소심 개입을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상태다.
“중남미 어느 국가에서 대통령을 역임한 가난한 노정객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국민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한 말을 제 상황에 빗대어 한 말씀만 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 남에 대한 증오를 심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타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면서 갖게 된 가장 큰 교훈입니다.”
12월3일 증인신문을 마무리하는 오후 4시, 검사와 피고인 쪽의 뾰족한 질문에 증언거부권을 행사하며 끝까지 버틴 임 전 차장은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법정을 떠났다. 재지정된 증인신문 기일에 출석했다는 이유로 300만원의 과태료 처분은 취소됐다. 이 전 실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심상철·방창현 부장판사에 대한 결심공판은 오는 1월21일 진행된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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