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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헌법이 ‘말잇못’…차별적 복장 규정, 2021년엔 변할까요?

등록 2021-01-01 16:10수정 2021-01-02 17:16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지난 6월 저비용항공사 에어로케이는 국내 항공사 최초로 ‘젠더리스’ 유니폼을 도입했다. 에어로케이 제공
지난 6월 저비용항공사 에어로케이는 국내 항공사 최초로 ‘젠더리스’ 유니폼을 도입했다. 에어로케이 제공

“170㎝를 넘어야 하니 구두 굽으로 키를 맞추세요.”

대학생 때, 주말마다 예식장에서 결혼식 진행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첫 출근 전날 복장 규정을 들었습니다. 하이힐을 신을 수밖에 없었죠. 구두 속 발이 퉁퉁 부어터질 것 같이 아팠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종이 가방을 갖고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됐죠. 운동화를 챙겨 다닌 겁니다. 어느 날, 급하게 투입된 또 다른 행사장에서는 상의로 명치까지만 가리는 ‘크롭탑’을 받기도 했습니다. 팀장과 한참 실랑이한 끝에 민소매를 받쳐 입었지만, 동료와 복장이 달라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국판 ‘구투 운동’(차별적 복장 규정을 고발하는 운동)을 취재한 사건팀 이주빈입니다. 제가 복장 차별을 경험한 뒤 10년이 지나도 문화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삼 깨달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매해 여성들의 일터 복장에 대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2018년, 임현주 <문화방송>(MBC) 아나운서가 지상파 여성 앵커 최초로 안경을 끼고 ‘뉴스투데이’를 진행해 관심을 받았습니다. 2019년에는 대한당구연맹의 한 여성 심판이 ‘보기 좋다’는 이유로 치마를 입으라는 심판연맹위원장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업무 배제를 당해 논란이 됐습니다. 2020년에는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많은 누리꾼에게 언어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앵커가 최초로 안경을 쓰고 방송을 진행한 게 겨우 3년 전이라니 놀랍지 않나요? 오래전부터 남성 앵커들에게 안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지난 구투 기사에는 여성 사례를 주로 다뤘는데, 여성이 받는 차별 사례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투 운동을 돕는 박지영 변호사(법무법인 주원)는 10건 중 1건 정도가 남성의 제보라고 했습니다. 여성 제보자들 대부분이 20~30대 초반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강요받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들은 치마와 구두, 화장에 대한 강요를 비롯해 손톱, 머리카락의 색과 길이까지 세세히 통제받고 있습니다.

물론 남성도 과도한 규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 변호사는 “염색 규제, 넥타이 강요 등 남성들도 복장 강요로 괴로움을 겪는 사례가 접수됐다”고 말했습니다. 2014년에는 턱수염을 기르던 기장이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한달 업무 배제와 감봉 처분을 받고, 이듬해에는 한 남성이 대머리라는 이유로 채용을 취소당했습니다. 각각 대법원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복장 규제에 “사기업의 당연한 권리”라며 “싫으면 일을 그만두면 되잖냐”는 의견도 나옵니다. 하지만 ‘밥벌이’를 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투 운동 제보자 대부분이 신원을 밝히길 극도로 꺼렸다고 합니다. 특히 대기업 소속은 제보를 아예 취소해달라고 말할 만큼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업계에 소문이 나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한 겁니다. 저는 아르바이트였는데도, 복장에 대한 항의 뒤 비슷한 일을 다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박 변호사는 과도한 복장 규제는 헌법이 금지하는 사항이라고 말합니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제10조),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제32조 3항),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제32조 4항)고 나와 있습니다. 또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는 합리적 이유 없이 고용(채용·배치·승진 등)에서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일이 계속되는 이유는 법이 선언적 의미에 그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좀 더 명확한 법률이 필요합니다. 2018년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근로시간·교육·훈련·배치·승진 등 근로조건에서 성차별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근로자에게 성별 등을 이유로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복장의 착용을 요구하는 등 작업조건이나 작업환경에서 성차별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성별에 의한 차별·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지만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활동하는 노동자 누구나 편하게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사회. 또 회의가 많은 국회의원처럼 오래 앉아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헐렁한 원피스가 허용되는 사회. 모두가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2021년에는 가능할까요?

이주빈 사건팀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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