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초기 가두방송을 했던 고 전옥주(본명 전춘심) 선생의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16일 광주항쟁 당시 앞서서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19일 광주 5·18민주묘지에 잠든 그는 <화려한 휴가>에 등장하는 박신애(이요원)의 실제 모델로 때로 ‘5·18의 꽃’으로 불렸다. 그는 5·18 여성동지회를 만들어 투쟁했던 여성들과 연대한 연결된 몸이었고, 폭력의 목격자이며 저항의 참여자로서 말하는 몸으로 살아왔다. ‘비평’은 매달 마지막주에 싣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진압군으로 참여했던 남성의 죄의식을 다룬 <박하사탕>은 순수했던 청년이 폭력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타락하고, 스스로 그 타락을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준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가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폭력에 참여한 사람의 평범성과 죄의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끔찍한 국가폭력의 역사에 발을 담그게 되는지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트라우마에 관객이 감정이입하도록 이끈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계엄군의 폭력에 가담했던 기억으로 자괴감과 자기연민 사이를 오간다. 그는 형사가 되어 역시 공권력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영호는 운동권 학생들을 고문하며 점점 더 적극적으로 폭력의 주체가 된다. 고문하던 손은 아내를 구타하는 손이 된다. 주로 흰옷을 입고 등장하는 영호의 첫사랑 순임은 타락한 자아가 그리워하는 순수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순임의 죽음은 영호가 붙들고 있던 순수했던 과거의 종말이다.
나는 하루에 박하사탕 1000개씩 포장하는 노동자 순임과 영호와의 결혼생활을 끝낸 홍자가 살아가는 인생이 더 궁금하다. 여성들은 순수한 첫사랑, 사랑하지 않는 아내, 정부, 하룻밤 자는 여자, 무고하게 희생되는 학생 등의 역할이다. 어디까지나 주인공 영호와의 관계 속에서 단편적으로 보이는 인물일 뿐, 그들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사진작가를 꿈꿨던 영호의 시각으로, 영호의 손가락이 만든 사각 틀 안에서 보이는 인물일 뿐이다. 그렇기에 남자로 인한 사랑의 상처는 있을지언정 역사의 상처는 찾을 수 없다.
계엄군과 시민군, 어느 쪽의 기억도 대체로 남성 중심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진보의 역사 한복판에 언제나 우상호가 있었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내 청춘은 역사도 경력도 되지 못했다”는 한 여성 활동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을 다룬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에 나오는 양은영의 구술 기록이다. 언제나 절반의 진실이 공식적 기억을 점유해왔다.
광주에서의 폭력을 기억하기에 미쳐버린 영화 <꽃잎>의 소녀는 목격자이지만 ‘미친년’이기에 신뢰받을 수 없는 화자이다. 그의 말은 중얼거림, 울부짖음, 헛소리라는 형식에 갇히고, 말을 할수록 ‘미친년’이 된다. 그보다는 소녀를 찾아 다니는 소녀 오빠의 대학생 친구들인 ‘우리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그 소녀가 보고 경험한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제대로 해석되지 못한 채 많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남성·학생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은 알려지고, 유관순 ‘누나’나 수많은 ‘어머니’처럼, 혹은 통일의 ‘꽃’ 임수경처럼 가끔 여성들은 예외적인 꽃이 된다. 광주항쟁 당시 앞서서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 선생도 때로 ‘5·18의 꽃’으로 불린다. 지난 16일 그가 세상을 떠났고 19일 광주 5·18민주묘지에 영면했다. <화려한 휴가>에 등장하는 박신애의 실제 모델이다.
2018년 5월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광주5·18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전옥주 선생. 연합뉴스티브이 화면 갈무리
영화 <김군>은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넝마주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름조차 모르는 사진 속의 한 남성을 두고 지만원은 ‘광수 1호’, 북한이 내려보낸 특수부대원이라고 주장했다. 영화는 그가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다. 그 과정에서 그가 김군이라 불렸고, 넝마주이였음이 드러난다. 결코 영웅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진 수많은 ‘김군’들이 있을 것이다.
2012년 출간된 <광주, 여성>은 항쟁에 참여한 여성들 중에서 19명의 이야기를 모았다. 살아 숨 쉬는 생명만 보면 밥을 해서 먹이던 여성들이 있었고, 부상당한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를 치료한 간호사들이 있었으며, 두드려 맞으면서도 이미 죽은 몸에 수의를 입히며 모르는 몸들을 돌보던 여성들이 있었다. 총탄이 날아드는 한복판에서 열심히 사람들을 모으던 목소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함께 피 흘리고, 피를 나누었다. 그중 한 사람이 전옥주이다. 그는 광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구두닦이, 거지, 넝마주이, ‘술집 아가씨’ 등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인물들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
전옥주는 광주에 도착해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목격하자마자 이를 알리기 위해 행동했다. 마이크를 들고 버스와 트럭을 타고 광주를 누비며 적극적인 목격자이자 전달자로 활동했다. 그의 가두방송은 앞장서서 묵살에 저항한 행위다. 그는 군인을 잡은 시민군에게 풀어주라고 말하는 설득의 목소리였으며, 동시에 계엄군에 맞서도록 시민들을 독려하는 목소리였으며, 왜 무고한 시민에게 폭력을 자행하는지 따져 묻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항쟁 이후에는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는 거짓말에 대항해 이를 증언하는 목소리였다. 전옥주는 1989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했다.
1989년 2월24일 국회에서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는 전옥주 선생(맨 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항쟁의 ‘목소리’였던 사람을 추모하는 발언들 속에는 ‘고문’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말하던 주체적 입을 폭력의 피해자가 된 수동적 몸으로 전시한다. 주로 1996년 <신동아>에 실린 ‘전옥주 충격고백 수기’를 바탕으로 한다. 당시 <신동아>의 표지 제목 아래에는 “간첩조작 성고문도 버텨냈다”고 적혀 있다. 수기의 본문에는 항쟁 당시 전옥주의 감정, 진실을 알리겠다는 의지가 표현돼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참상, 거대한 불의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과 분노가 솟구쳐 나를 어떤 지점으로 끝없이 휘몰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을 피해자화하려는 남성적 응시는 이러한 서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 몸이 무엇을 했는가보다는 그 몸이 어떻게 ‘당했는가’를 중심으로 여성을 재현한다. 이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폭로하는 운동인 ‘미투’를 초기에 언론이 ‘나도 당했다’고 번역하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행적보다 그가 마지막 순간 어떻게 죽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듯이, 저항하는 여성을 기억하는 방식은 유난히 몸의 피해에 집중한다. 특히 여성이 겪는 성고문은 듣는 남성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다른 방식의 권력을 확인시킨다. 고통받는 ‘그 몸’과 다른 몸이라는 확인 덕분이다. 그렇기에 꼬박꼬박 “여자로서 견디기 어려운”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정작 전옥주의 구술에서 그를 더 힘들게 했던 ‘진짜 고문’은 출소 후에도 지속되는 빨갱이라는 오명이었다. 사면받았지만 늘 감시를 받았고, 취업을 하기도 어려워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고,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그 상황이야말로 ‘고문’이었다.
5·18과 여성 관련 연구도 초창기에는 여성의 피해를 다뤘으나 점차 여성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참여했는지에 집중했다. 민주화와 여성, 국가폭력과 소수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재구성해야 할 사실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기억은 마음속으로 그때 그 일을 소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설명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렇게 기억의 재구성은 언제나 저항이며 정치적 행위다.
목소리는 몸을 벗어나 존재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역사는 약자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묵살은 잠잠히 죽인다는 뜻이다. 여성의 주체적 경험이 지식화하거나 역사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이들을 피해자의 위치에만 한정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전옥주는 5·18 여성동지회를 만들어 투쟁했던 여성들과 연대한 연결된 몸이었고, 폭력의 목격자이며 저항의 참여자로서 말하는 몸으로 살아왔다.
<광주, 여성>에 담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내가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개념을 전복시켰다. 과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누구의 감정일까. “어떤 방식으로든 5·18에 참여한 여성들에게는 ‘더불어 죽지 못한 죄의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관심은 오롯이 삶”이었다는 편집자의 말처럼 실제 이 여성들의 구술에는 온통 연결에 대한 갈망, 새로운 배움에 대한 희망, 증언하고자 하는 의지 등이 곳곳에 있었다.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옥주 선생이 2018년 5월18일 광주5·18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에서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왼쪽 셋째)과 만나 인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 아래는 광주항쟁을 목격하고 증언한 바버라 피터슨. 광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실제로 전옥주는 “그해 5월 광주에서 내가 얻은 건 슬픔과 공포만은 아니었다”며, 그는 “살아 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생존자들의 증언에서도 충분히 이런 의지를 발견한다. “말이나 하고 죽어야 쓰겄다”(방귀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런 일도 좋은 일이제”(김동심), “그때 당시에 여성들이 얼마나 큰 힘이었나 하는 것”(이정희),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글 쓰는 것인데, 가만히 앉아서 글 쓰는 것은 울화통이 터져서 밖으로 나갔어…여성운동 52년, 민주화운동 35년, 봉사활동 55년, 인권운동 35년, 이렇게 해왔어”(송희성), “나는 우리 삶과 자연과 우주를 사랑하는 그런 것이 취미예요”(오경자), “내가 날마다 버섯들하고 대화를 해요”(정숙경), “5·18에 대해서도 써보려고 했는데, 그게 기회가 안 맞아떨어졌어요”(이현옥), “옛날에 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는데 지금은 닭이 많이 울어야 달걀이 나온다. 여자가 힘을 써야 되는 시대가 왔지”(정순덕), “재미있게 같이 어울리면서 사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에요.”(정미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 증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성운동, 지역운동 등으로 삶을 확장하며 동지를 끌어모으고 새로운 투쟁을 조직하는 여성들도 많다. ‘피해자’라는 하나의 정체성만 가지고 살아온 게 아니다.
게다가 이들의 증언은 남성들과는 다른 형태를 띤다. 국가폭력에 저항하던 이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 겪는 경험도 함께 말한다.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경우는 ‘여자라 못 배웠다’, ‘내 딸은 이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 못 낳았다고 구박받았다’ 등등의 내용을 분노와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90년대에는 좀 나아졌을까.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지’였어도 결혼 후에 성역할에 갇히는 쪽은 여성이다. “남편은 집행위원장 하면서 평양도 두번 가고 금강산도 네번이나 갈 때, 저는 한번도 못 가고 집에서 애를 봤어요.” 명지대학교 총여학생회장 출신 양은영은 함께 운동하던 남성과 결혼 뒤 마주한 현실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머지않은 훗날 이름조차 상실하리라는 것을”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고. 막연한 어머니로 용해돼버린 개개인의 이름들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
전옥주 선생은 광주의 기억을 담은 구술록 <광주, 여성>에서 “상대의 말이 듣기 싫어도 마지막까지 경청해줄 수 있는 게 민주화”라는 소신을 밝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화가 무엇일까. ‘화’(化)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모양이 변하는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하는가. “상대의 말이 듣기 싫어도 마지막까지 경청해줄 수 있는 게 민주화”라는 소신을 지니고 있다는 전옥주 선생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항쟁 당시의 가두방송만이 아니라 평생 말하기에 대한 신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민주화는 끊임없는 증언을 통해 탈락된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현재를 바꿔가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서 증언하리라.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