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우리를 죽이고 조롱하고 다시 또 지우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희망, 희망, 희망, 희망,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겠다. 끝까지 살아남아 내 꿈을, 희망을 증명하겠다. 김비 제공
내 삶에 첫 꿈은 시시하게도 과학자였거나 선생님이었다. 과학자가 뭐 하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과학자였다. 매일 보는 제일 멋진 어른이 선생님이라 선생님이었다.
열살 남짓, 어린 나는 과학자라고 말할 때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의 얼굴에 성별을 그릴 줄 몰랐는데, 선생님이라고 말할 때는 머리카락이 긴 온화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머리 긴 온화한 사람이 꼭 여성일 필요는 없는 일인데, 나는 교단 앞에 선 꿈속의 나를 그리며 아마도 두근거렸을 것이다.
꿈의 자격이란 모두에게 있는 거란다, 너 역시 무슨 꿈이든 꾸어도 괜찮단다, 누군가 말해줄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그때 내 주위에는 꿈을 이룬 사람도 없었고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중성’이라고 나를 놀리는 아이들을 쫓아내며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했던 고마운 어른들이 있긴 했지만, 나의 꿈에 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드러내고 말하지 않았을 뿐, 그들 역시 나 같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꿈이나 미래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는 걸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 꿈에는 뿌리도 없었고, 뿌리를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사춘기 시절 나에게 꿈은 씹던 껌보다 못한 것이었다. 책상 아래인가 화장실 벽인가 어딘가에 붙여놓기는 했는데 그게 어디였는지는 상관없었다. 내가 씹던 껌이 ‘스피아민트’였는지 ‘쥬시후레쉬’였는지 언제 거기에 붙였던 건지도 관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있어.’ ‘궁지에 몰렸다고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아.’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는 성소수자 이야기를 언젠가 써야겠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열네댓살의 씹던 껌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그때의 나는 빈손이었기에 그나마 나 자신을 움켜쥐고 버틸 수 있었다.
스물 중반에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뭐 해 먹고살 거냐’는 물음 앞에 섰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라는 통속적인 한탄은 나 같은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성별로 나뉜 동질감의 동심원은 너무도 견고해 나 같은 존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고 뭐라도 되는 미래는 동심원의 한복판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허락된 말이었다. 가장 많이 뛰면서 가장 빨리 뛰어야만 가까스로 동심원을 따라 돌 수 있는 존재들에게는, 가혹하고 지독한 소용돌이일 뿐이었다.
그때 처음 글 쓰는 내가 찾아왔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게다가 성별마저 흐릿한 나는 치료를 시작하긴 했지만 수술까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내가 어딘가에 숨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떠올리니, 글을 쓰는 일이었다.
어차피 나 자신에게는 쓸모도 없는 세계를 지우고, 내 손으로 내가 만든 세계 속에 누군가를 살게 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글 쓰는 사람들 중에 가장 먹고사는 걱정이 덜할 것 같은 티브이(TV) 드라마 방송작가 교육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실제 방송될 가능성을 가늠하는 평가 앞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가장 마지막에 쓴 작품이 제 어머니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식의 이야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쓴 글들은 당시의 티브이라는 매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중에 한 작품을 성소수자 모임 게시판에 소설 형식으로 풀어 올렸는데, 바로 그것이 내 최초의 소설 습작이었다.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을 출판하고 저자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짝지가 그렸다. 그림 박조건형
글을 쓰게 되었지만, 내가 쓰는 글은 너무 어두웠다. 당연했다. 글이란 곧 쓰는 사람의 열매이니, 그 뿌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글을 쓰는 나는 드디어 내 꿈에 뿌리가 자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뿌리의 모양이나 색깔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는 일은, 끝을 모르는 길을 걷는 것과 닮았다. 헤매는 일이 아니라, 분명 걷는 일이긴 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고 땀 흘리는 나를 알지만, 어디에도 가닿지 않는 시간. 그래 원래 가닿으려고 쓰진 않았지. 다시 또 몸을 일으켜 걷지만, 아무도 나를 ‘걷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걷고 있을 뿐인데, 걷는 나는 그들에겐 제자리만 맴도는 나였다.
오직 1인분의 꿈밖에 꿀 줄 모르는 나는, 이 지독한 ‘순위 사회’에서 가볍게 떠밀렸다. 뿌리가 자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제 막 뿌리가 자란 내 꿈도 힘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십여년 동안 계속 쓰고 포기하고 다시 쓰고 포기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나는 끝내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다. 돈이나 벌면 되지 소설은 무슨…. 무수히 많은 문청들이 그러했듯이 ‘밥벌이’에 떠밀려 소설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가 과로로 쓰러졌는데, 혼곤한 정신으로 깨어나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딱 한 가지였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다시, 걷고 싶었다.
그때 처음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인, 아니 내가 주인공인 아침드라마 같은 소설 한편을 완성했다. 신랑의 감상을 인용하자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주인공이 마침내 이 사회의 경계를 넘어 앞으로 걸어 나아간 유치한 이야기를 쓰고서, 나는 참 행복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마감까지 일주일 남은 공모전 페이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응시자격은 ‘여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겠지만, ‘여성’임을 확인하기 위해 작품 표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야 한다는 단서까지 달려 있었다. 당시 호적 정정을 하지 않고 여성으로 살고 있던 나는 최근에 썼던 그 작품을 공모전에 보냈다. 표지에 뻔뻔스럽게도 남자 주민등록번호까지 적었다. 아마도 치기 어린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으리라.
전혀 예상도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수상 소식은 날벼락이었다.(관련기사
링크) 남자 주민등록번호를 표지에 단 작품이, 그해 단 한 편의 수상자를 가르는 목록에 가닿기 위해 얼마나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나중에야 해당 신문사 기자를 통해 들었다. 나를 불러 오직 ‘가능성’만을 언급하며 ‘계속 소설을 쓸 사람’이라고 심사위원 선생님이 내 부족함을 짚어주셨을 때, 나는 부끄러워 흙 속에라도 처박히고 싶었다.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신문사에서 시상식이 있던 날, 나는 처음 나를 그 자리에까지 밀어 올려주신 분들을 뵈었다. 여성으로 태어나지 못한 여성이었기에 당신들의 수고로움이나 불편함이 더해졌을 텐데, 그럼에도 너른 품을 증명하신 그분들의 마음이 바로 문학이었을까? 나는 시상식에서 조금 많이 울었고, 적어간 소감문을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본 상의 1회 수상자였던 박완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다가와 “아유, 축하해요.” 그 한마디를 다정하게 건네며 내 손을 끌어 잡아주셨을 때, 시간 속에 깊이 박혔던 내 안의 뿌리가 한꺼번에 들썩였다.
‘선생님, 저는 문학을 모르는데 어쩌죠?’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다. 내가 먼저 달려가 선생님 집 문을 두드리고 청하고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제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고 받은 상패. 김비 제공
소심하고 제 안으로 침잠할 줄밖에 모르는 나는 다시 또 시간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제 뿌리를 제가 뽑아 흐트러뜨리는 어리석은 자학을 이어가다가, 홑껍데기뿐인 여성의 삶을 틀어쥐고 안간힘을 쓰다가 형편없고 남루한 꼴이 되고 말았다. 파이고 깎인 흙바닥에 다 드러난 꼬이고 꼬인 뿌리는 꿈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어떤 동물의 배설물 같았다.
그런데도 아직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여전히 끝이 어딘지 모르는 길을 걷고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걷는다.
그래서 당신의 꿈이 이루어졌느냐고 묻는다면, 음… 글쎄… 나는 또 꽤 오래 머뭇거리게 될 것 같다. 써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 이제 내 꿈에 자란 뿌리의 빛깔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나는 그 위에 어떤 것을 피워올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쉰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제 꿈을 모르는 처지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꿈을 꾸는 일에 나이가 없다면 꿈을 모르는 일에도 나이는 없어야 하는 법. 나는 아직 꿈을 모르니 모르겠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글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양산 마을 카페 소소서원에서 진행한 ‘길을 잃어 여행갑니다’ 북토크에서 마을 분들이 선물해주신 꽃다발. 김비 제공
성소수자로서의 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대답은 간단하다. 결혼을 하고, 손가락질 걱정 않는 사랑을 하고, 원하는 학교에 가고, 제 모습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평가받는 그런 사소한 꿈 말고, 성소수자들에게도 더 큰 꿈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성별 동심원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저절로 이루어진 그런 꿈들 말고, 성소수자들 역시 평등한 꿈 위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존재의 차이가 꿈의 차별이 되지 않도록, 이 사회가 꾸는 꿈의 뿌리는 한쪽으로 기울거나 뒤틀리지 않고서 온전한 거목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시 또 동심원 바깥의 누군가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꿈들이 뽑혀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불과 며칠 사이, 세 사람. 나는 조금 울었고, 소리를 질렀고, 없는 가슴을 쳤다. 그깟 살덩이 하나를 근거로 혐오할 권리를 말하고 얄팍한 팩트 앞에 당당한 그들을 보니 몸이 굳는다. 꿈을 말하고 희망을 말했던 내 언어들이 무너져내린다.
추모의 말이 필요하단 걸 알지만, 나는 단 한 줄도 적어 내려가지 못한다. 징그럽도록 ‘정상’인 사람들의 사회 살인은 누가 단죄하나? 이십년 전 내가 수술할 당시의 사회는 인간의 기본값을 지키는 사회였는데, 지금 이 사회의 기본값은 도대체 얼마나 형편없어진 걸까?
오십의 나는, 무수히도 많은 이 나라 성소수자의 죽음을 목격한 나는, 다시 한번 희망을 적는다. 그토록 여러번 살을 도려내는 적의와 살의를 느꼈음에도 다시 또 희망을 적으려 한다. 이 사회는 우리를 죽이고 조롱하고 다시 또 지우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희망, 희망, 희망, 희망,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겠다. 끝까지 살아남아 내 꿈을, 희망을 증명하겠다. 그게 내가 믿는 이 나라 대한민국 성소수자들의 기본값이다.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