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1일 오후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스무번째 도약, 평등을 향한 도전!’ 참가자들이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무지개색 대형 천을 펼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예전에 한 투쟁 현장에서 2000원을 주고 지도를 샀다. 전국적으로 고공농성을 하는 지역을 표시한 ‘고공여지도’다. 나도 이런 지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혼자 해본 적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생각은 대체로 이미 누군가가 실행 중이거나 실행했다. 나는 돈을 주고 구입해서 우리 집 냉장고 문짝에 붙여놓는 게 최선이다. 지도를 통해 농성 현장을 한눈에 보고 있노라면 세상 곳곳에 싸우지 않는 곳이 없으며 싸우지 않았던 시기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많은 싸움들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지도는 제국주의의 역사와 밀접하지만 위치에 따라 지도의 활용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1995년에 출간된 데이비드 벨과 질 밸런타인의 <욕망을 지도화하기>(Mapping Desire, 국내 미출간)는 섹슈얼리티와 지리학을 연결시킨 최초의 저작이다. 지리와 섹슈얼리티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특정 장소에는 어떤 몸들이 모이고 어떤 몸들은 배척당한다. 예를 들어 영화 <죽여주는 여자>와 <초미의 관심사>는 모두 이태원이 배경이다. 이 두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배우는 트랜스 여성 안아주이며 그는 극중에서도 트랜스젠더로 등장한다. 다양한 정체성이 모여 있는 이태원의 장소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때로는 몸이 장소를 따라 흐르며 역할을 수행한다. <걸캅스>에서 경찰인 두 주인공은 수사를 위해 이태원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옷을 사 입는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려 한다. 그다음 홍대 클럽으로 이동했을 때 젊은 경찰 조지혜(이성경)는 헐렁한 하와이안 셔츠의 옆구리를 묶어 몸을 드러내고 머리를 푼다. 조지혜는 비교적 그 장소에 위화감 없는 외관 덕분에 무사히 입장하지만, ‘호돌이’를 아는 세대인 박미영(라미란)은 클럽에 들어가지 못한다. 클럽 입구에 있던 ‘덩치1’은 그 ‘아줌마’에게 건너편 노래방으로 가라 한다.
이처럼 장소는 장애와 비장애, 인종, 계층과 세대만이 아니라 젠더에 있어서도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젠더, 공간, 장소의 관계는 일상을 지배하는 정치다. 어떤 장소에서 이성애자의 키스는 허용되어도 동성애자의 포옹은 허용되지 않는다. 몸과 장소의 관계는 비남성, 비이성애자, 장애인일수록 문제로 인식한다. 공간과 장소와 자신의 몸과 성 정체성 등을 굳이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지배하는 몸들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자리가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누군가에게 자꾸 자리를 정해주려 하거나, 당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묻는다. 거리와 해변이 당연히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인간의 눈치를 보며 구석진 거리를 배회하고 하수구에 숨어들며 수풀 사이에 웅크린 고양이들이 어쩌다 눈에 띄면 없애버리려고 하듯이.
‘지리는 중요하다’(Geography matters)라는 구호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들이 많이 활용했다. 인간에게 최초의 장소는 바로 여성의 몸이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들이 몸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게다가 여성의 몸 안에서 여성은 때로 추방당했다. 피지배 집단은 언제나 몸으로 인식되는 열등한 물질적 존재이다. 백인은 백인으로 보이지 않음으로써, 남성은 남성으로 보이지 않음으로써 보편적인 몸이 되며 이 보편을 기준으로 다른 몸을 타자로 만든다.
왜 지하철 안에서 다리를 얌전히 모으지 않고 한껏 벌리고 앉는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을까.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소변을 더 참지 못하는 인간이 아님에도 왜 노상방뇨 하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남성이 더 잘 보일까. 남성들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여성들보다 공간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듯 행동한다. 앤드리아 드워킨은 손상되지 않고 변경되지 않은 여성의 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남성이 그 공간과 장소를 차지하는 동안 여성은 ‘몸가짐’을 어릴 때부터 통제받기에 몸은 그 장소에서 가능한 한 보이지 않도록 변경된다. 즉, 이들은 몸에 갇힌 채 몸 바깥의 장소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일터가 아니라면, 여성은 늘 일터에서 타자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채용 면접에서 업무와 무관하게 여성에게 ‘군대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함으로써 ‘너는 남성이 아닌 몸이기에 이 장소의 타자’라고 알려준다. 또한 임신한 여성은 수시로 일터에 부적합한 몸이라고 여겨지는 경험을 한다. 정치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발전시킨 개념 ‘몸의 수치화’(Scaling Bodies)는 이처럼 몸의 차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는 여성들에게 여성들만 모여 있는 여성 ‘게토’에서 일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민자이며, 직업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계층이며, 여성일 때, 그중에서도 순종적이라는 이미지가 가득한 아시아 여성들은 미국에서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은 주로 아시아 여성들이 일하는 장소를 정확하게 겨냥한 사건이다. 어떤 몸은 그 몸 때문에 일터에서 차별을 겪거나 쫓겨나고, 여성 ‘게토’에 모인 몸들은 그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몸을 수치화하듯이 비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를 향해 ‘잘못된 몸’이라고 말한다. 변희수 하사의 싸움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구별에 대한 문제제기만이 아니다. 직업과 몸, 직업과 성별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남성들에게 군복무는 국가를 위한 개인적 희생으로 여겨지지만 그렇게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군대에 가지 않는 특권층의 불공정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장애인이나 여성보다 우월한 신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트랜스 여성인 변희수의 존재는 이러한 서열을 파괴하고 교란한다. 연예인 트랜스 여성들이 통념적 여성성을 드러냈다면 변희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군인으로 살아가길 갈망하며 무기를 아주 좋아하는 ‘밀리터리 덕후’였다. 공적 공간에서 그야말로 ‘젠더 위반자’인 그의 행보는 위반의 연속이고, 이를 달리 정의하지 못한 육군은 ‘심신장애’라 결론지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트랜스젠더가 정신질환 및 행동장애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이미 2019년 5월25일 세계보건총회에서 승인했다.
19세기 유럽에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 중일 때 여성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은 교외·가정에 머무르고 도시·일터는 남성의 장소였다. 싸우는 몸들은 항상 정해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위해 행진하고, 장애인들은 장소를 점거하며 이동권을 위해 투쟁한다. 퍼레이드는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퍼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동안 그 장소에서 동일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보여지는 시간을 확보한다. ‘보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보기를 거부하는 권력’ 앞에 존재를 드러내어 기존 질서를 교란한다. 반복되는 이 축제 행위는 폭력적 질서 속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가장 평화로운 방식의 저항이다. 거부당하고, 이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참여자로서 집단행동을 하는 시간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퀴어축제를 도심에서 해서는 안 된다’, ‘거부할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반대하지만 특화된 곳에서 따로 즐기라는 그의 발언은 여성과 남성을 구별할 뿐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의 언설과 똑같다. 나아가 19세기부터 20세기 민권법 제정까지 100여년간 이어진 미국의 분리 평등 정책(Separate but equal)을 떠올리게 한다.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는 속임수이다. 안철수가 말한 ‘특화된 곳’은 맥락상 게토나 다름없지만 그는 ‘명소’가 될 것이라 한다. 사람을 상품화한다. 다른 몸들에게 자리를 지정해주며, 몸과 장소성을 고민할 필요 없는 남성으로서 특권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서울퀴어축제는 2000년부터 매년 이루어진 행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성장했고, 이들은 ‘종북 빨갱이’에서 성소수자로 공격의 방향을 바꿨다.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증오는 오늘날 강력한 정치적 의제이다. 반공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 다양한 정체성들에 반대함으로써 ‘우리 편’을 결집시킨다. 그렇기에 홍준표가 2017년 대선 토론에서 “동성애에 반대합니까”라고 질문하거나, 현재 보궐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들은 퀴어축제에 대한 의견을 상대 후보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는 흔히 일곱가지 색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연에서는 정확하게 일곱가지 색이 아니다. 각각의 색깔 사이에 경계선이 정확하지 않다. 경계선에는 오히려 훨씬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조물주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성공회 사제이며 신학자인 패트릭 쳉의 <급진적인 사랑>의 발간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다. 퀴어 신학을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쳉의 글도 좋지만, 이 책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발간사에서 이미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장미가 민들레를 혐오하거나 멸시하지 않듯이, 모든 차이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며 존중받을 일이지, 결코 혐오나 차별의 조건이 아닙니다.” 우주의 다양성은 우리가 다 파악할 수도 없이 심오하며 거대하다.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우주로 인식한다면 그 안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은 결코 부정당할 수 없다.
퀴어 신학자나 페미니스트들은 성서에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큰 비중을 둔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경계 없이 넘나드는 몸이다. 구별하기 어려운 정체를 구별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 차별이 발생한다. 내가 생각하는 ‘환대’는 구별이 아니라 경계선 흐리기이다. ‘퀴어화’는 경계선을 넘나든다. ‘퀴어화’는 다른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환대이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신은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지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없으면 날마다 대면하는 세상의 추함과 부정의를 어떻게 견딜까. 신은 ‘아버지 하느님’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여성, 할머니, 고통당하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 속에 있을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처럼 내 몸과 내 이웃 사이에 경계를 흐리며, 신은 끊임없이 ‘트랜스’하고 있지 않을까.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 몸과 장소의 관계는 비남성, 비이성애자, 장애인일수록 문제가 된다. 동아제약 면접장의 성차별적인 질문,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 변희수 하사의 싸움, 퀴어축제를 도심에서 해선 안 된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말은 모두 젠더, 공간, 장소와 연관된 정치적 문제다. 이에 관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의 비평을 싣는다. ‘비평’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