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찢긴 펼침막을 바라보며

등록 2021-04-02 21:35수정 2021-04-03 02:3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미래당 오태양 서울시장 후보가 찢긴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태양 후보 누리집
미래당 오태양 서울시장 후보가 찢긴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태양 후보 누리집

“모든 사람들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서울.”

코앞으로 다가온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소수자청 신설을 약속한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오태양 미래당 후보인데요, 양심적 병역거부와 청년운동을 벌여온 오 후보가 ‘성소수자 자유도시’를 슬로건으로 내건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자신이, 20년 전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으로 감옥에 갇히며 젊은 시절 철저히 소수자로 살았기에 지금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거두는 것이 시대정신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 후보가 앨라이(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인 협력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행보를 환영하는 성소수자들이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ㄱ씨(25)는 “성소수자 인권 보호를 전면에 내세운 후보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이라는 이유로 펼침막이 찢기고 표를 잃는 위험에 놓이는 직업 정치인이 공약 1순위로 성소수자 옹호 정책을 내놓았다는 건 의미 있는 도전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3월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었습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트랜스젠더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최근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 극작가 이은용, 음악 교사이자 정치인 김기홍, 군인 변희수를 추모했습니다. 저는 <한겨레> 젠더팀에서 성평등에 관한 기사를 쓰는 기자인데요, 많은 사람이 성평등을 말하지만 그 흔한 ‘평등’이란 단어에서마저 성소수자는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의 성별만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세상의 인식 속에서 다양한 성정체성이 배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사람을 자꾸 없다고 하니까, 제발 ‘눈에 보이도록’ 세상에 드러나게 하자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입니다.

얼마 전, 트랜스젠더인 임푸른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부위원장이 당사자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트랜스젠더들이 가족이란 안전망을 잃은 뒤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경험을 하나둘씩 털어놨다는 것이죠. 임 부위원장은 “사회복지 현장 어디에도 트랜스젠더의 자리가 없다고 느낀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당사자들은 더욱 음지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20대 초반의 트랜스 남성(FTM) 두 분의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10대 때 가족한테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했지만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고 결국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문제는 지정된 성별(법적 성별)이 여성이어서 이들은 결국 여성 청소년 쉼터로 보내졌습니다. 스스로 남성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요? 여성들과 함께 기거하고 화장실을 써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쉼터에서도 나와야만 했습니다.

얼마 전 변희수 하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저는 사회안전망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과 힘겨운 싸움을 하던 한 사람이 홀로 집에서 생을 마치는 결심을 하기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물론 그와 소통하던 지역사회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있었다는 짧은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 도움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테죠.

막연한 답답함을 가지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정신보건 정책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자살 예방 안전망이 있나요?” 하지만 이 질문은 번번이 답을 듣지 못하고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젠더·건강 연구자는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성소수자 개인에게 우울증약이나 잘 챙겨 먹으라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면서요. 일견 타당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충분한 해법 같지는 않았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과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일상을 견뎌야 하는 개인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살아가게 할 것인지, 그런 논의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정부의 정책에 성소수자 안전망이 빠져 있다면 지방정부에서라도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서 각 후보가 외치는 ‘시민 여러분’ 속에 빠진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김미향 젠더팀 기자 aro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영상] 윤 ‘부적절 골프 의혹’ 골프장 직원 신상, 경찰 ‘영장 없이 사찰’ 논란 1.

[영상] 윤 ‘부적절 골프 의혹’ 골프장 직원 신상, 경찰 ‘영장 없이 사찰’ 논란

‘윤 퇴진 집회’에 경찰 이례적 ‘완전진압복’…“과잉진압 준비” 비판 2.

‘윤 퇴진 집회’에 경찰 이례적 ‘완전진압복’…“과잉진압 준비” 비판

‘벤츠 급식’ 충격도 받았지만…“버릴 수 없다”는 김하종 신부 3.

‘벤츠 급식’ 충격도 받았지만…“버릴 수 없다”는 김하종 신부

[영상] 명태균, 영장심사 때 “경거망동하여 죄송” 고개 숙였지만… 4.

[영상] 명태균, 영장심사 때 “경거망동하여 죄송” 고개 숙였지만…

이재명 선고 나오자 지지자 기절하기도…구급대도 출동 5.

이재명 선고 나오자 지지자 기절하기도…구급대도 출동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