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캐릭터 아뽀키는 상당한 인지도를 갖춘 케이팝 사이버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컴퓨터로 만들어냈다지만, 기획사가 만든 콘셉트와 세계관에 맞춰 움직이는 ‘인간 아이돌’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아뽀키 소속사 븨븨(VV)엔터테인먼트 누리집
븨븨(VV)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여성 케이팝 아티스트 ‘아뽀키’는 지난 2월22일 첫번째 디지털 싱글 ‘겟 잇 아웃’(Get it out)을 발매했다. 제트(Z)세대 아티스트들이 흔히 그렇듯 그 또한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한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고, 라이브 채팅으로 팬들과 소통하며 차근차근 이름을 알리는 계단을 밟아 올라왔다. 그가 2019년 4월 유튜브 채널에 켈라니의 ‘허니’를 커버한 영상을 올렸을 때부터 아뽀키의 행보를 지켜봐 왔던 팬들은, 유튜브에 올라온 ‘겟 잇 아웃’ 뮤직비디오를 보며 앞다투어 감격의 댓글을 달았다. “먼 훗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난 이 모든 게 시작되던 순간부터 아뽀키를 지켜봤다고 말해줄 거야.”, “마침내 네 노래를 가지게 되었구나! 자랑스러워!”
아뽀키는 이제 문화방송(MBC)의 유튜브 채널 ‘엠드로메다’의 케이팝 콘텐츠 ‘잇츠라이브’에 출연해 밴드의 연주에 맞춰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는가 하면, 아시아·태평양계 아티스트들의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퍼시픽 브릿지 아츠와 아마존 뮤직이 공동주최한 가상 라이브 행사 ‘아마존 아이덴티티 라이브’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제 그는 유튜브 채널 구독자 27만여명, 틱톡 구독자 210만여명을 보유한, 명실공히 세계적 인지도를 확보한 케이팝 아티스트다.
대견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새롭지는 않은, 전형적인 아티스트의 성장 스토리다. 딱 한가지만 빼고. 아뽀키는 사람이 아니다. 분홍색 토끼 귀와 토끼 꼬리를 단 아뽀키는 외계 행성에서 온 토끼인간이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오브젝트를 실시간으로 구현해내는 ‘리얼타임 렌더링’ 전문기업 에이펀인터렉티브가 선보인 아뽀키는 버추얼 아티스트, 그러니까 가상의 캐릭터다. 물론 아뽀키에게 목소리를 제공하고 노래를 부른 것도 사람이고, 아뽀키의 유려하고도 힘 있는 춤에 모션캡처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이해가 어렵다면, 과거 일본이 선보인 세계 최초 사이버가수 다테 교코나, 그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한국 최초의 사이버가수 아담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오늘날 아뽀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과거 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뽀키에게 목소리를 제공한 인간 가수나 춤선을 제공한 인간 댄서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뽀키의 특성이라고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물론 아담과 아뽀키 사이에는 20여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하고, 그 기간 동안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성장 속도는 압도적이었다. 뮤직비디오 안에서도 뻣뻣한 모습을 피할 수 없었던 아담과 달리, 아뽀키는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오직 기술의 발전 때문에 아뽀키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컴퓨터그래픽 기술 쪽보다는 인간이 가수를 향해 열광하고 관련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 쪽에 있었다.
2011년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가 아이돌 엑소(EXO)를 선보였을 때, 에스엠엔터테인먼트는 이들에게 ‘세계관’을 부여했다. 태양계 바깥의 외행성(엑소플래닛)에서 온, 각기 다른 초능력을 지닌 12명의 외계인이라는 배경 스토리가 멤버들에게 주어졌다. 처음 엑소가 이러한 설정을 선보였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이 ‘화양연화’ 앨범 시리즈와 ‘윙스’(WINGS) 시리즈를 통해 펼쳐 보인 세계관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사람들은 이런 고유의 세계관 구축이 팬덤의 결집력과 몰입도를 높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걸그룹 드림캐쳐가 선보였던 ‘악몽’ 시리즈와 ‘디스토피아’ 시리즈나, 보이그룹 세븐틴이 선보인 ‘소년 3부작’ 세계관은 충성도 높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안 그래도 한국의 케이팝 아이돌 가수들이 수행하는 노동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필하기보단 멤버들과 회사가 정한 콘셉트에 맞춘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라 해도 팀 안에서 맡은 포지션이 ‘생기발랄한 막내’라면 통통 튀는 애교덩어리를 연기해야 한다거나, ‘카리스마 래퍼’라는 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몇개월 동안 선글라스를 벗지 못한 채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거나 하는 사례는 얼마나 흔한가. 여기에 ‘고유의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은 정교하게 구축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에, 아이돌 산업은 마블이나 디즈니가 주도하는 캐릭터 기반 지식재산권(IP) 산업에 더 가까워졌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다소 흥미로워진다. 어차피 우리가 아이돌 아티스트들을 보며 열광하는 것이, 고유의 세계관으로 구축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고도로 정교하게 구축된 콘셉트에 맞춘 캐릭터들이 펼쳐 보이는 활약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뽀키를 향한 팬덤의 열광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무엇인가? 아뽀키 또한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구축된 우주 안에서 케이팝 아티스트의 꿈을 키우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온 외계 토끼인간이라는 스토리를 지닌 캐릭터로 활동 중인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아뽀키와 달리 실제 아이돌은 살아 있는 인간이 오랜 시간 연습을 거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아뽀키라고 다를까? 실감 나는 컴퓨터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한 회사의 노력은 둘째 치고, 아뽀키라는 아티스트가 거쳐온 연습의 시간도 실존한다. 아뽀키의 노래 속 목소리도, 라이브 방송에서 보여주는 아뽀키 특유의 말투와 성격도, 아뽀키가 소화하는 복잡하고 격렬한 안무의 춤선도 결국 인간의 것이다. 그 재능들이 인간의 것이라면, 아뽀키를 연기하는 인간 또한 오랜 시간 연습을 거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가수들의 곡을 커버한 영상을 올리고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아뽀키에겐 연습기간뿐 아니라 무명기간을 응원하는 팬들과 쌓아온 서사까지도 엄연히 존재한다.
아뽀키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연출된 가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 확인했듯, 아이돌 산업이 궁극적으로 향해왔던 방향은 애석하게도 언제나 인위적으로 연출된 판타지를 제공하는 방향이었다. 개인의 자연스러운 외모나 성격은 뒤로 물러나고, 기획의 결과로 구현된 이미지들이 전면에 부각된다. 인간의 육신에 들이는 노력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오브젝트에 들이는 노력 사이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최종 결과물 차원에선 그게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결국 고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콘셉트를 연기하는 인간과, 고도로 정교하게 구현된 버추얼 아티스트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이 둘이 본격적으로 경쟁이 붙는다면 인간이 언제까지나 우위에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아직까지 인간을 좋아하듯 캐릭터를 진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의 수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하지만 갈수록 버추얼 아티스트는 인간 아이돌의 영역을 유의미하게 잠식할 것이다. 제작자 입장에선 인간 아이돌보다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이점과, 계약상의 분쟁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점이 선명하다. 팬의 입장에서도, 사람과 달리 애정을 쏟아도 학교폭력이나 성범죄 따위의 비행으로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은 무시할 수 없다. 물론 팬 사인회에서 악수를 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등의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코로나19의 대유행 이후엔 인간 아이돌도 그런 일이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버추얼 캐릭터가 감히 인간의 영역을 빼앗다니!’라고 분개하려는 것도,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상에 마음을 주는 이들은 어리석다’는 무례를 범하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반드시 버추얼 캐릭터보다 더 사랑받아야 한다는 위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저마다 어떤 대상에 사랑을 쏟고 마음을 줄 것인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인간 아티스트들이 굳이 계속 버추얼 캐릭터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만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도로 설계된 콘셉트를 연기하고 가상의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 아이돌 산업의 본질이 된다면, 이 싸움은 궁극적으로는 더 통제가 잘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가수의 본질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