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유월은 결혼기념일이 있는 달이다. 올해는 아직도 그늘에 들면 선선하지만 그해 유월은 몹시 더웠다. 양복이야 평상복에 가까우니 견딜 만했지만 실핀 수십개를 꽂아 만든 부풀린 머리를 이고 평생 다시는 입지 않을 불편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번거로운 것이라면 죽도록 싫어하는 우리는 예식이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아내의 머리에 꽂힌 실핀을 뽑으면서 나는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실, 언제부터 내가 남편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부에게만 제공하는 학교 기숙사에 입주하려고 결혼식 두달 전에 혼인신고를 했으니, 그때부터일까? 아니면, 예복과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때일까? 그도 아니면, 뉴욕의 소박한 호텔에서 침대에 함께 누워 여독을 풀던 시점일까? 내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 머리에 꽂힌 실핀을 뽑을 때를 꼽은 이유는, 그때 처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좋은 남편’이 되겠다는 다짐 같은 것을 마음속으로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도망가고 그 다짐은 1년에 한번씩만 떠오른다. 결혼기념일.
올해,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좋은 남편’ 다짐을 떠올리면서 <좋은 남편>을 주문했다. 도착한 책을 먼저 집어든 아내가 연신 낄낄대면서 책을 읽는다. “우리랑 똑같아, 깔깔깔.” 음, 뭐지? 내가 그렇게 ‘좋은 남편’이었다는 말인가? 오랜만에 아내를 웃긴 것만으로도 이 만화는 할 일을 다 했다. 내게 차례가 넘어와 표지를 보니, ‘좋은 남편’이라는 제목은 멀리 있고 거기까지 절대로 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벽과 파도를 앞에 둔 가여운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건 뭔가? 심상치 않은데. 책을 뒤집으니 이런 글이 박혀 있다. “TV와 SNS 속에/ 사람들의 풍문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주식으로 대박 났다는 사람/ 일, 사람, 돈, 모든 게 완벽한 회사/ 그리고/ 좋은 남편.” 아뿔싸, 이럴 수가.
이 책은 ‘좋은 남편’들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었구나. 제 딴에는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용을 쓰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좋은 남편’이라는 목표를 공략하는 일은 돈키호테가 풍차에 돌격하는 광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목표는 좋은데 행색은 초라하고 결과는 뻔하다. 아내는 뭘 보고 그렇게 웃은 것일까?
철수는 미숙이 남편이다. 티브이(TV)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한 부부. 아내는 한번도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인이 그런 것을 만지는 것을 남편이 참지 못한다나. 소파 한쪽에서 졸고 있는 미숙이. 왠지 찔리는 철수는 음식물 쓰레기를 찾아서 버리고 온다. 들락거리는 문소리에 잠을 깬 미숙이는, 반도 안 찬 쓰레기봉투가 아깝다. “미안해.” 모처럼 ‘좋은 남편’이 되려고 애를 쓴 철수는 본전도 찾지 못했다. 아, 여기서 웃었겠구나. 나도 ‘좋은 남편’이 되고자 가끔 애를 쓰는데, 살림을 내 것으로 살지 않다 보니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지.
한 번의 유산을 겪고 초록이를 가진 터라 미숙이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만원 지하철 출근길을 피할 수는 없었고 임산부석엔 낯 두꺼운 사람들이 떡하니 앉아서 무거운 몸을 기댈 곳이 없다. 임산부 배지를 들이밀어도 요지부동. 화를 풀어볼 곳은 철수밖에 없다. 문자로 불평을 하면 철수의 답은 “조금만 힘내”, 참 내, 됐다 됐어, “맨날 힘내래.” 아내가 여기서 또 배꼽을 잡았겠군. 아내와 나도 매번 이런 일로 다툰다. 아내가 내게 힘든 일을 털어놓을 때 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라는 둥, 진정하라는 둥, 번지수를 잘못 찾아 아내의 화를 돋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원인 제공자를 함께 실컷 욕하면서 자기편이 되어달라는 것인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판정은 ‘공감 능력 부족’.
살림도 속속들이 모르고, 눈치도, 공감도 모자란 남편들은 과연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많은 남편들이 반만 찬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들고 현관을 나서고, 입덧하는 아내를 위해 천지 사방을 헤맨다. 어머니의 눈치를 꿋꿋이 버티면서 일등 신랑감이라는 ‘꿈 없는 회사원’을 견딘다. ‘좋은 남편’은 없지만 되고자 하는 이들은 넘치니, 세상의 아내들이 좀더 어여삐 여겨주기만 바랄 뿐이다.
만화애호가
※격주에 한번,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