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유족 임철호(왼쪽)씨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공판이 끝난 뒤 법원을 빠져 나가고 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정규 씨는 일제 치하 당시 일본 나가사키로 강제 노역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연합뉴스
법원이 7일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피해자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을 확정한 지 2년8개월 만에 이를 뒤집는 하급심 판결이 나오면서 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한강의 기적’을 언급하고, 피해자가 승소하게 되면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표현을 기재한 점을 두고서도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뒤집은 하급심…“전합 판결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는 이날 강제노역 피해자 송아무개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해당한다”며 각하 이유를 밝혔다.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체결한 한·일 청구권협정에는 “두 나라와 그 국민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돼 있다. 재판부 판단은 강제노역 피해자 개인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개인청구권 또한 이 협약에서 말하는 ’청구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다.
문제는 이런 판단이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다수의견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일본제철 강제노역 피해자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전합은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국가 간 협정으로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며 피해자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 쟁점이었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는지’를 두고 전합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쪽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관 7대6의 의견이었다. 다만, 소수의견(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날 사건 재판부도 전합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한 판단을 한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1심 재판부가 전합과 다른 판결을 내리면서 내놓은 논리가 빈약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하급심이 전합 판결과 다른 판결을 내놓을 수 있지만, 전합 판결을 반박할 수 있는 충분한 논리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매우 이례적으로 보인다. 전합 소수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법리가 앙상하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 재판부는 전합 판결을 두고 도리어 “국내 최고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어 이러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 해석”이라며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한 자료가 없다. (중략)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이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일괄 보상하기로 합의한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제노역 판결문에 등장한 “한강의 기적”,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
재판부가 판결문에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외화 덕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쓴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재판 과정에서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타결된 3억 달러는 과소하므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재판부가 “당시 낙후한 후진국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과 이미 경제대국에 진입한 일본국 사이에 이뤄진 과거의 청구권협정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며 “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며 원고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한·일 관계가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식민지배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한·일 청구권협정이 꼽히는 상황에서, 재판부는 이 협정으로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일 외교갈등을 우려하는 듯한 표현을 담은 것도 불필요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가 있다며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손해배상 책임을 거부하는 일본기업들에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의 국내 자산을 압류하는 등 강제집행 절차로 나갈 수 있는데, 이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에 해가 된다며 외교적 갈등상황을 우려하는 듯한 문구를 써넣은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전합 판결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 손상”,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썼다. 이어 “분단국이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대목도 담았다.
민변 “일본 보복 걱정에 법관 양심 저버려”…선고기일 당일 바꾼 것도 논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5개 시민단체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이 사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법원에서 최근 정립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법리적 논거 없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는 점”이라며 “일본의 보복과 이로 인한 나라 걱정에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어 “이번 판결은 항소심에서 파기될 것으로 예상한다.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현실에 굴복한 1심 재판부의 비상식적, 비법리적 판단은 중대한 비판을 받아야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해자 쪽은 울분을 터트렸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재판 결과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며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울어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 쪽을 대리한 강길 변호사는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애초 이 사건 선고기일은 오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날 재판부가 갑자기 선고기일을 변경하면서 혼란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기일 변경으로 지방에 사는 피해자들 다수는 법원에 나오지 못했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해 판결선고기일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령의 원고들이 다수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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