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항쟁 34돌 맞아 국가기록원서 생애기록 38건 복원·공개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던 1987년 6·10 민주항쟁 하루 전날인 6월9일,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전투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숨졌다.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6·10 민주항쟁 34돌을 이틀 앞두고 국가기록원이 이한열 열사의 생애기록 38건을 복원해 공개했다. 복원된 기록은 이한열열사 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던 이 열사의 유품으로, 일부 훼손된 부분을 전문적인 복원 작업을 거쳐 살려낸 것이다. 이 가운데 이 열사의 고교시절 일기와 고교생특별수련기, 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글은 온라인을 통해 처음 공개된다.
이 열사의 일기 ‘마이 라이프’에는 이 열사가 16~17살 시절에 쓴 것으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진지한 생각들이 많이 담겼다. 1982년 마지막 날에 쓴 일기에는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중략)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적었다. 닷새 전엔 “더욱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 갔다……. 역사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날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배은심 여사의 기록에는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다.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 한열이가 왜 그래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고 코, 입, 산소 호흡기를 온몸에 착용해서 이름도 모르는 기계에 의해 호흡하고 있었으니...27일 동안을 말 한마디 못해 보고... 한열이는 7월 5일 2시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6월항쟁 관련 기록도 함께 복원됐다. 이 열사가 숨진 이후 주검에 대한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에는 “뇌 속의 이물질이 최루탄 뇌관의 구리물질의 파열체임을 증명해냈다”며 “직접사인은 최루탄 피격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87년 7월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이 열사의 영결식을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한 오디오 파일도 복원됐는데, 여기엔 고 문익환 목사의 추도사와 배 여사의 음성,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음성도 포함돼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은 국가기록원 누리집(https://www.archives.go.kr/) 아카이브 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향후 이한열열사기념사업회 누리집(http://www.leememorial.or.kr/)을 통해서도 열람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곽정 국가기록원 복원관리과장은 “이한열 열사의 생애기록과 6월 항쟁 기록은 80년대 시대상과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하는 중요한 현대사 기록이며 필사본이자 유일본으로 그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이경주 이한열기념사업회 관장은 “이한열의 기록은 1980년대 사회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나서게 되었는지 보여준다”며 “후대의 사람들은 이 기록을 통해 그 시대와 생생하게 만나게 되었다”고 전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실황 녹음 카세트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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