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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기록되지 않는 ‘젠더폭력’들… 112 통계서 피해자는 지워졌다

등록 2021-07-12 04:59수정 2021-07-12 07:45

젠더 데이터, 빈칸을 채우자
① ‘성별 분류’조차 않는 112신고 통계

데이터는 권력이다. 데이터는 현실을 압축해 보여주고, 단박에 상대를 설득한다. 그래서 데이터는 때로 기만이 된다. 데이터가 없으면 명백히 존재하는 현실도 지워진다. 데이터가 투박하면 현실의 날카로운 불평등도 뭉개진다. <한겨레>는 다섯차례에 걸쳐 치안, 산재, 채용, 출산 영역 등에서 지워진 젠더 데이터를 찾아내 바로잡으려 한다. 여성의 삶이 나아지고 있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데도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는 통계, 성별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 여성 현실을 읽어내는 데 무용한 반쪽짜리 데이터를 추적한다.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서 쏟아내는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이런 반쪽 현실을 아예 모르거나 애써 외면한 결과다. 남성이 기본값인 각종 데이터에 젠더 데이터 복원을 요구한다.

① ‘성별 분류’조차 않는 112신고 통계

② ‘산재=건설=남성’이 지운 것들

③ 합격자 성비 5 대 5? 사라진 면접자

④ 출산휴가 시행 68년, 통계가 없다

⑤ “이게 왜 문제죠?” 담당자가 물었다

누구나 아는 112범죄신고 전화번호가 도입된 지 올해로 65년째다. 1957년 7월 서울지역 경찰서에 비상통화기 몇대를 두고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일이 알린다’는 의미라고 낯선 번호를 홍보했다. 이제는 외국에 운영 노하우를 수출할 정도로 시스템이 고도화됐다.

지난해 112신고 건수는 1829만6631건에 이른다. 112신고 통계는 어떤 유형의 사건이,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사람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주요 지표다. 치안정책 핵심 정보값을 담고 있는 가장 날것의 정보에 해당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과 검사의 법률적 판단 또는 관행적 처리로 배제되는 사건까지 포착한다.

특히 암수율(드러나지 않은 범죄 비율)이 높은 젠더폭력에서 112신고 통계는 중요하다.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아주 일부만 공식 범죄통계에 잡힌다. 실제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맡긴 2019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를 보면, 지난 1년 동안 강간·강제추행 같은 신체적 성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같은 기간 대검찰청이 파악한 강간·강제추행 발생률(<대검찰청 범죄분석>)에 견줘 무려 18.5배 많았다. 암수 범죄가 상당수 존재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같은 해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에서 집계한 112신고로 들어온 가정폭력 발생 건수는 19만4150건에 이른다. 이 기간 경찰청 범죄통계에 ‘진입’한 가정폭력 사건은 5만277건에 그쳤다. 사건의 경중을 고려하더라도 절대다수 젠더폭력이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거나, 포착되더라도 사건화에 이르지 못하거나, 처벌 문턱을 넘지 못해 통계에서 배제되는 셈이다. 2018년에도 112신고 접수 가정폭력 24만8660건 중 입건은 4만1720건에 그쳤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나머지 20만여 사건은 형사적으로 입건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종결되는 대다수 사건 피해자 보호체계에 큰 허점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극히 일부만 통계 잡혀

112신고 통계는 이런 ‘걸러진 공식 통계’를 보완하고 치안정책의 허점을 메울 수 있는 기초 데이터다. 사건 발생 최초 단계의 생생한 정보를 신고받은 경찰 또는 현장 출동 경찰이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112신고 접수 건수 △사건 종류별 접수 현황 △코드 0·1·2·3(긴박성 지표)별 건수 △현장 도착 시간 △허위 신고 △자살 관련 신고 등 6개 지표로 통계를 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 통계가 성인지적 관점이 빠진 채 작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가장 기초가 되는 정보인 ‘성별 분리’조차 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연간 신고 건수 규모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성별 분리는 사회인구학적 특성이 반영된 통계의 기본이다. 112신고 통계를 보면 남성 혹은 여성이 어떤 이유로 112신고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충분히 성별 분리가 가능한데도 아예 이런 정보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ㄱ씨는 20년 넘게 남편에게 온갖 종류의 폭력을 당했다. 남편은 ㄱ씨 출퇴근에 동행하거나, 실시간으로 위치를 보고하도록 했다. 폭언은 기본이었다. 가정폭력은 담을 넘어 공공장소에서도 이뤄졌다.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해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흔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수사를) 해도 벌금이에요. 그냥 합의하세요.” 남편 보복이 두려웠던 ㄱ씨는 결국 합의했다.

ㄱ씨가 당한 폭력은 어디에 기록될까. 현재 국가 범죄통계 체계에서는 파악할 수 없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접수한 피해 사례로만 존재한다. 경찰이 생산하는 112신고 통계에는 이런 내용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은 112신고를 사건 종류별로 57개 항목으로 나눠 수집한다. ㄱ씨가 겪은 폭력은 ‘가정폭력’ 항목으로 집계한다. 폭력이 기록상 존재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20년간 ㄱ씨가 견뎌온 폭력은 행인의 112신고로 겨우 세상에 드러났다. ㄱ씨는 경찰 수사 개시 전 합의했기 때문에 이후 경찰 통계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최호진 단국대 법학과 교수는 “젠더폭력 피해자가 가장 많이 취하는 태도는 감수(인내)·이해(가해자 사정 감안)·지인에게 조언 요청이어서, 국가기관이 발표하는 범죄통계에는 최소한의 범죄만 반영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젠더폭력에서 암수 영역을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112신고가 접수되면 상황실에서는 신고자 성별, 요청 사항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가정폭력·데이트폭력·성폭력·스토킹·아동학대·자살 등 57가지 신고 내용 중 신고자 요청이 무엇에 해당하는지 표시한다. 이 종류별 신고를 집계하면 수사기관이 걸러내기 전 단계의 사건 발생 통계를 확보할 수 있다.

현재 경찰은 57가지로 분류해 수집한 신고 내용을 다시 △중요범죄 △기타 범죄 △질서 유지 △교통 △기타 경찰 업무 △타기관 이첩 등으로 재분류해 공개하고 있다. 이렇게 재분류한 통계는 범죄 지형을 그리기에 너무 투박하다. 중요범죄 항목에 절도와 성폭력이 함께 있을 정도로 통계가 뭉툭하기 때문이다. 데이트폭력, 스토킹, 가정폭력 등을 발라내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신고자 성별 구분도 안해…경찰청은 “문제없다”

경찰청은 현행 통계 생산방식에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경찰청 생활안전국에서 담당하던 112신고 업무는 2019년부터 경찰청 차장 직속 치안상황관리관 위기관리센터가 맡고 있다. 양성평등기본법은 ‘국가와 지자체가 인적 통계를 작성하는 경우 성별로 구분한 통계(성인지 통계)를 산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통계법도 성별 구분이 곤란하거나, 성별 구분의 실익이 없다고 인정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별 분리 통계 생산을 의무화했다. 이를 근거로 <한겨레>가 경찰청에 통계 개선 의지를 묻자 “112신고 건수는 인적 통계가 아니기에 성별 분리가 필요하지 않다. 사건 종류별로 분류된 통계를 원하면 정보공개를 청구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112신고 건수를 신고자 성별로도 나눠 집계하는 방안에 대해 ‘건수에는 성별이 없다’고 답한 셈이다. 이런 지나친 형식논리에 경찰 내부에서조차 “신고를 사람이 하지 누가 했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경찰청은 사건 종류별 112신고 건수와 관련해서는 원칙적 비공개를 유지하고, 국회의원실이나 정보공개 청구가 있으면 그때마다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경찰청은 연간 2000만건 가까운 방대한 112신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적용한 차세대 112시스템을 구축”해 지역별 맞춤형 범죄 예방 및 치안 활동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가장 기본인 성별 분리조차 이뤄지지 않은 빅데이터로 어떤 맞춤형 치안정책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성별 분리 통계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말한다.

중요범죄, 여성 신고일 때 ‘현장 종결’ 비율 높아

실제로 112신고를 신고자 성별에 따라 분리해 살펴봤더니 유의미한 차이가 드러났다. 경찰젠더연구회 회원인 이은애 총경이 2020년 5월7일~2021년 5월6일까지 1년 동안 ㄴ경찰서로 접수된 112신고 2만850건을 신고자 성별에 따라 분석했다. 분석 결과를 보면, 112신고자는 남성(1만3510건·64.8%)이 여성(7304건·35.2%)보다 1.8배 많았다.

반면 중요범죄(살인·강도·절도·성폭력 등 강력범죄) 관련 신고는 여성이 하는 경우(631건·54%)가 남성(538건·46%)보다 많았다. 그런데 같은 중요범죄 신고라도 성별에 따라 경찰이 하는 조치에도 차이가 있었다. 신고자가 남성이면 ‘계속 조사’하는 비율이 42.5%였지만, 여성 신고자의 경우에는 26.4%로 뚝 떨어졌다. 반대로 신고받은 사건을 그 자리에서 종결하는 ‘현장 종결’ 비율은 남성 신고의 경우 31.8%, 여성 신고는 41.2%였다. 이 총경은 “여성 신고자의 신고가 현장 종결로 처리되는 경우가 남성보다 많다는 건 형사 사법 절차로 진입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경찰의 행정조치로 종결되는 사건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12신고는 범죄 수사의 출발이자 국민이 체감하는 대표적인 치안 서비스다. 이 치안 서비스가 성별로 평등하게 제공되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성별 분리 통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노성훈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암수 범죄가 많은 젠더폭력에서 112신고 통계는 공식 통계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성별 분리 통계는 행정기관의 기본이고, 신고자 성별이나 사건 유형은 개인정보나 보안사항이 아니기에 경찰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한국 112신고에 해당하는 911신고 통계가 ‘3대 범죄통계 중 하나’ ‘치안정보의 보고’로 불린다고 했다. 주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 애틀랜타 경찰(APD)은 매일, 몇시,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112신고가 들어왔는지를 파일로 정리해 누리집에 올린다. 치안 서비스 주체인 경찰은 물론 연구자들은 이렇게 날것 그대로 공개된 신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떤 범죄가 발생하는지 등을 연구해 치안 서비스에 반영한다.

경찰은 112신고 빅데이터를 활용한 미래 치안 청사진을 그리면서도, 정작 “정제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통계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 교수는 “112신고 통계에 신고자와 피해자가 일치하지 않거나 오인 신고가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통계 해석에 주의를 달아줘야 할 일이지, 아예 통계 생산을 거부하거나 비공개할 일이 아니다. 오인 신고가 포함된 신고 통계도 시민의 주관적 차원의 불안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젠더 데이터 공백을 방치하고 있는 사이, 여성단체는 젠더폭력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통계를 만들고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국가기관이 집계해 발표하는 젠더폭력 통계가 없어 매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남성에 의한 살해’를 하나하나 손으로 세는 미개한 방식으로 통계를 만들고 있다. 2021년에 이래야 하나 싶어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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