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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단독] 직장여성 5년간 유산 26만건…산재 인정은 단 3건뿐이었다

등록 2021-08-13 05:00수정 2021-08-13 07:39

정춘숙 의원실·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
유산 여성 10명 중 6명 직장인이지만 ‘노동 인과성’ 인정은 소홀
노동시간 길수록 유산 위험 높아…주당 61~70시간 땐 56% ↑
업무 연관성 입증 쉽지 않고 ‘유산 = 여성 개인 문제’ 인식도 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ㄱ씨는 올해 유산을 겪었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회사에 알리고 단축근무를 신청했지만 회사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은 임신 초기(12주 이내) 또는 만삭(36주 이후)인 여성 노동자가 하루 두 시간 단축근무를 신청할 경우 이를 허용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는데도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았다.
간호사는 보통 병원 안에서만 하루 1만보를 넘게 걷는다고 한다. 온 종일 바삐 병동을 오가며 서서 일해야 했던 ㄱ씨는 결국 임신 8주차에 유산했다. ㄱ씨는 유산휴가를 신청했으나 회사는 이 역시 반려했다. 근로기준법은 유산한 노동자가 신청하면 유산휴가를 주도록 하고 있으나 고용주는 이마저 거부한 것이다. ㄱ씨는 “임신 초기에도, 유산한 뒤에도 출혈이 있는데도 병원을 돌아다녔다. 임신 했을 때도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더니, 유산도 오롯이 내 탓이었다. 최소한의 법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2016~20년 5년 간 유산을 겪은 여성은 45만8417명이다. 저출생 기조로 임신이 줄면서 유산 인원 자체는 과거보다 감소했으나, 임신한 여성 가운데 유산을 겪은 비율인 유산율은 오히려 증가했다. 특히 취업 여부에 따라 유산율 차이가 났다. 같은 기간 직장 여성 연간 유산율은 미취업 여성 유산율보다 7%포인트 높게 유지됐다. 노동 환경이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노동 조건과 연관된 유산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같은 기간 산업재해(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 유산은 단 3건에 불과했다. 정부가 저출생 대책에 한 해 46조원(2021년 기준)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임신한 여성 노동자 보호, 유산의 노동 인과성 인정에는 소홀한 것이다.

<한겨레>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유산·분만 관련 진료인 인원 현황’(2016∼2020) 자료를 받았다. 지난 5년 해마다 평균 9만1600여명이 유산했다. 같은 기간 분만 여성은 평균 26만2700명이었다. 임신 여성 4명 중 1명이 유산을 겪은 것이다.

저출생으로 임신 자체가 줄면서 유산 인원 역시 감소하는 추세다. 그러나 취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취업)와 피부양자(미취업)로 나눠 보면 감소폭은 달라진다.

미취업 여성 유산은 2016년 4만5515명에서 2020년 3만3877명으로 1만1638명(25.6%) 줄었다. 반면 유산으로 진료 받은 여성 취업자는 2016년 5만2101명, 2020년 5만893명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전체 유산 인원 가운데 직장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같은 기간 53.4%에서 60%까지 증가했다. 유산을 겪은 여성 10명 중 6명은 직장인이라는 얘기다.

만혼 경향으로 임신 연령이 높아지면서 유산율이 증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유산율은 취업(27.2%→31.3%), 미취업(20.3%→24.5%) 여성에게서 거의 동일하게 증가했다. 취업 여성 유산율 증가에 만혼 외 다른 원인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취업 여성 유산율, 미취업자보다 7%포인트 높다

눈여겨 볼 대목은 취업자와 미취업자 유산율 격차다. 지난 5년 간 취업자 유산율은 미취업 여성 유산율보다 꾸준히 7%포인트가량 높았다. 연도별 유산율 차이를 보면 2016년 6.9%포인트(27.2%, 20.3%), 2017년 7.1%포인트(28.4%, 21.3%), 2018년 7.1%포인트(30.2%, 23.1%), 2019년 7.1%포인트(30.8%, 23.7%), 2020년 6.8%포인트(31.3%, 24.5%)였다.

이런 격차는 이전에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2016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6~15년 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유산율을 분석했는데, 그때도 모든 연령대에서 직장가입자 유산율이 피부양자보다 높았다. 당시 연구팀은 “직장가입자의 근로 환경이 임신 및 출산 시 건강상태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유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취업 여성 유산율이 미취업 여성보다 7%포인트 높게 유지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노동 시간과 업무 종류, 태아에 영향을 주는 생식독성물질 사용 여부 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지만, 업무 연관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은 “과중한 업무, 일터 경쟁 심화가 직장가입자 여성의 유산율이 피부양자 여성보다 높게 유지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일반적으로 과로, 교대·야간 노동 등이 임신 유지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인 파악을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이 유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통념은 이미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2019년 이준희 순천향대 서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이완형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국민건강영양조사(2010~12년)에 참여한 19살 이상 여성 노동자 4078명의 유산 경험을 조사했다. 주당 50시간 미만 일한 여성과 비교했을 때, 61∼70시간 일한 여성은 자연유산 위험이 56% 높았다. 주당 노동 시간이 70시간을 초과하면 자연유산 위험이 66%까지 치솟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유산 위험이 높다는 인식이 학술적으로 증명됐다. 일하는 여성의 모성 보호를 위한 정책 근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노동 시간 뿐 아니라 ‘노동의 종속성’도 유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는 “피부양자 여성도 가사·돌봄 등 상당한 육체 노동을 한다. 그러나 고용주의 지휘·감독 등 통제를 받으며 경쟁적으로 성과를 내야하는 직장 여성과는 노동 양상도, 그로 인한 스트레스 양상도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간 7%포인트 격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동 자체뿐 아니라 이같은 노동 종속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산재 인정 단 3건…‘유산=여성 개인 문제’라는 장벽

유산과 노동의 인과성을 드러내는 연구와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유산은 여전히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2016~20년 유산한 직장 여성 25만8646명 가운데 산재(업무상 질병)가 인정된 유산은 단 3건이었다. 애초 산재 신청 자체도 8건으로 적었다. 전문가들은 유산을 겪은 당사자와 판정 주체 모두 ‘유산=여성 개인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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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근로복지공단이 정춘숙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 받지 못한 유산 사례를 들여다봤다. 불승인 사례와 그 이유가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불승인 사례 5건 중 2건은 임신 초기 자연유산이었다. 신청자는 음식점 종사자와 고객 상담원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장시간 서서 일하는 노동 환경, 고객 폭언으로 인한 유산을 주장했다. 질병판정위원회는 임신 초기 자연유산은 흔하고 염색체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업무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다른 2건은 조기양막파열이었는데 “조기양막파열은 현재까지 원인이 불투명하며, 업무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불승인했다. 나머지 1건은 자궁경부무력증이었다. 질병판정위는 “(신청자가) 과로나 장시간 근무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불승인 사례 5건 가운데 4건이 자연유산과 조기양막파열이었다. 발생 원인이 의학적으로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다. 원인이 모호하기 때문에 노동과의 연관성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문제는 이 어려운 입증 책임이 모두 여성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점이다. 질병판정위원으로 활동하는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태아 염색체 검사, 염증 검사, 감염 검사 등 모든 검사에서 이상이 없고 직업 스트레스 외에는 산모가 건강하다는 걸 본인이 입증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노동과 유산 연관 입증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삼성전자 백혈병 사망 사건 보상 문제 등을 처리하기 위한 중재판정을 통해 2018년 11월 독립기구인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LCD)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근로복지공단 산재 인정과 별도로 삼성전자 작업장 노동자 질병보상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만든 기구다. 2020년 6월까지 유산 173건, 사산 10건 등 모두 400건의 보상이 완료됐다. 지원보상위원회는 최소 기준(삼성전자 및 협력사 여성 재직·퇴직자 가운데 임신 3개월 전부터 출산(유산)까지 반도체 및 엘시디 라인 1개월 이상 근무 또는 출입한 자)만 충족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랬더니 한 사업장에서만 183건의 유산 관련 질병보상이 인정된 것이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는 “지금 시스템에서는 유산을 산재로 인정 받으려면 근로자 개인이 까다로운 입증 절차를 거쳐 판정을 받아야한다. 입증 책임을 덜어주고, 보상 문턱을 낮추면 많은 여성이 유산을 업무상 질병으로 신청한다는 걸 삼성전자 지원보상위원회 사례가 보여준다. 판정을 거쳐야만 하는 산재보험 제도 자체의 전환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행 제도는 유산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고, 여성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격이다. 유산 산재 인정 절차 완화 등 관련 법 개정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산재보험은 근로자 본인에게만 해당된다’는 규정으로 인해 유산, 태아의 건강손상 등이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회 환노위에서 논의 중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을 통해 유산이나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보험급여 사항을 새로 규정하는 방안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했다.

유산의 산재 인정 만큼이나 중요한게 일터에서의 최소한의 모성 보호다. <한겨레>가 유산을 겪은 반도체 노동자 2명, 보건의료 노동자 3명을 인터뷰했더니 교대 근무, 야간 근무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임산부 야간 노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다만 야간근무 동의서를 제출하면 가능하다. 이현주 교수는 “만혼으로 30∼40대에 첫 임신을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기에 더더욱 직장 내 모성 보호가 중요하다. 그런데도 정부의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포함된 유산 방지 대책은 임신 중 육아휴직 분할 사용 횟수 제외, 임신 중 유연·재택근무 활용 권고가 전부다. 임신 노동자가 자신과 태아의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직장 내 위험으로부터 피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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