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젠더폭력 피해자 김세근, 박경보씨가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거사 젠더폭력 피해자 증언대회 및 입법 토론회’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채윤태 기자
“형제복지원에서 한 방에 120명씩 (옷을) 벗긴 채 재웠다. 소대장이라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목욕탕에서는 시끄럽다는 핑계로 ‘원산폭격’을 시켰는데, 거기서도 성폭력이 벌어졌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와 형제복지원에서 21년여 동안 감금 피해를 입은 김세근(66)씨가 16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거사 젠더폭력 피해자 증언대회 및 입법 토론회’에서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 피해를 털어놨다. 40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체념한 듯 말을 이어가는 그의 증언에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김씨는 5살이던 1962년에 수용됐던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9살 때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김씨는 “통장이라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산에 (나를) 끌고 가서 여러 형태의 폭력을 가했다”고 말했다. 1971년에서야 보호소에서 도망쳤지만, 곧 경찰에게 잡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내무부 훈령에 따라 무연고 장애인 등을 불법 감금하고 구타, 학대했다.
형제복지원에서도 김씨와 아이들에 대한 관리자들의 성폭력은 일상적이었다. 김씨는 성폭력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기저귀를 착용하고 있으며, 공황장애와 우울증 등으로 정신의학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토론회에는 형제복지원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과 선감학원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국가로부터 받은 젠더 폭력 피해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은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의 배우자들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명운동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성폭력과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정의진 <광주방송(KBC)> 기자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고속’ 안내원이었던 피해자가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전했다. 정 기자는 “피해자분께서 ‘국가 폭력은 있었는데 성폭력 피해자는 없었다’고 이야기하셨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5·18 민주화 운동 등의 국가 폭력에 대한 과거사 청산 진상 규명을 하는 과정에서 젠더폭력에 대한 조사는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권태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위원장은 “기존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젠더폭력은 별도의 피해 유형으로 충분히 개념화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진실규명 과정에서도 젠더폭력 피해의 특수성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은 “많은 국민은 국가가 자행한 ‘과거사 젠더폭력’ 사건의 사실과 진상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 못한다”며 “그 이유는 젠더 관점의 과거사청산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제도적 근거의 미흡함과 피해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없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해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 범위에 성폭력 등을 명시하고 성폭력 사건을 진실 규명하고 조사하는 별도의 전담 기구를 설치하는 안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안(과거사 젠더폭력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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