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여성살이 /
오랜만에 만난 동갑내기 친구는 웬일인지 어깨가 축 쳐지고 코도 쑥 빠져 있다. “나보고 평생 남자 덕 볼 생각하지 말란다. 너무 독립적인 팔자라나?” 평소에도 남자 덕 볼 생각을 하는 친구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찾아간 역술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실망이 되긴 했나보다.
그래도 요즘 역술인들은 “팔자 센 여자”라는 말 대신 “독립적인 여자”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니 기 센 여자를 대놓고 구박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우리 같은 맹꽁이들이 무슨 남자 덕을 바라냐? 독립적인 팔자라면 그렇게 살면 되겠네”라고 말을 받았지만 나 또한 그 친구가 느끼는 ‘온전히 독립적임’에 대한 두려움이 낯설지는 않다. ‘독립적인 여자’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의미겠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남자 덕 볼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가 된다는 것은, 데이트할 때 더치페이 한답시고 안 그래도 얇디 얇은 지갑을 열어제낀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남자 덕’이란 이 사회에서 남자가 갖고 있는 권력과 재력과 네트워크 전부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친구라는 존재의 실질적 힘을 넘어서, 남자의 자원을 빌어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믿음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삶이 힘들 때 부빌 언덕이 되어줄 것 같은 ‘남자 덕’은 그래서 외면하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다.
오롯이 혼자서 세파를 견디어 본 사람이라면, 남의 덕에 내 한 몸 업혀가는 삶에 대한 환상을 노예근성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에게 결혼은 곧 계급이자 자원이 되는 세상에서, 남자 덕을 보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자원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니까. 내가 아는 한, 남자 덕 볼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들 대부분은 아버지도 남자임을 너무 빨리 알아버려 가족의 지원을 일찌감치 거부해온 버릇 때문에 이제는 아버지 덕을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처지들이다.
이혼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야 남자 덕은커녕 숟가락 하나까지 챙겨가는 남자의 치사함이 더러워 손해를 감수한 탓에 집도 절도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통장의 잔고는 바닥나고 내 한몸 뉘일 곳을 여전히 걱정해야 하는 상황, 남자 덕 보지 않는 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나를 포함해 이런 여자들을 불쌍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온전히 혼자 됨의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할 줄 아는 여자들이라면, 남자 덕을 슬쩍 부러워하다가도 남자 덕 보려고 치러야 할 수많은 고통에 화들짝 정신 차릴 줄도 알 것이다. 다만 ‘남자 덕’을 안 보고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너무 많은 행복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는 있겠다. 혹시 세상이 바뀌어 이런 여자들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남자들이 ‘덕’을 좀 발휘할 날이 올까?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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