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
참, 이상도 하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신문의 ‘인사’란이나 ‘동정’란 바로 옆자리에 실린다. 웬만큼 잘나가지 않으면 ‘인사’란이나 ‘동정’란에 이름이 올려지기 어려울 터.
대개 중앙정부 관직이나 메이저 기업, 아니면 언론계 인사들의 승진 전보 뉴스 바로 옆에 부음은 두 개의 날짜와 발인 장소 정보를 담고 늘어서 있다.
누구의 남편이나 아내였고 누구의 아들딸 또는 사위, 며느리였으며 누구의 부모로서, 관계 속의 존재였던 그들. 부음은 이제 무대를 떠나는 고별인사가 된다.
하기야 죽음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일. 이 또한 전보 발령이 아니랴? 다만 죽음의 품계도 살아생전의 소속과 품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 사망, 별세, 타계, 서거부터 선종과 입적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뜻하는 말들은 삶의 방식이 죽음의 형식과 의전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어 보이는 ‘인사’란 속 주인공들도 언젠가는 ‘부음’란에 이름을 올리겠지. 오늘 그들에게 타인의 부음은 정보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부음’란을 ‘인사’와 ‘동정’란 옆에 나란히 실은 신문 제작진의 깊은 뜻은 음미해 마땅하다. 제아무리 바쁜 이도 가끔은 멈춰 서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 선배의 부음을 들여다보다, 언젠가 다가올 내 부음의 행간에 담을 메시지를 생각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낮과 밤의 섬세한 경계인 개와 늑대의 시간에 가을바람 부는 강화도 벌판을 걸어 보라고.
숨죽인 객석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첫 음에 전율하라고. 동네 숲 속 과묵하고 위엄 있는 나무들에게 경례를 해보라고.
아이들과 코를 박고 나눠 먹는 라면 냄비 속 국물의 맛을 기억하라고. 굳이 득도 같은 것 하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순간들의 불안과 서글픔을 민감하게 느끼라고.
영원한 사랑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모든 사랑이 시작될 무렵 설렘의 빛나는 한순간을 누리라고. 치과 견적이 무서워 치료를 미루는 레귤러 민간인의 근심걱정은 딱 적당 분량임을 알라고. 장래 희망이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를 가진 행운을 자축하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란 반포 대교의 중앙선처럼 얇고 투명하다는 사실을 어느 날 발견하기를. 그것이 누군가의 부음을 해독하는 하나의 자세가 아닐까?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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