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여성

밀양 사람 이계삼의 칼럼, ‘세상의 비밀’에 ‘빛’을 던지다

등록 2015-05-25 18:12수정 2015-07-16 15:46

[한필진] ② 이계삼
2회 세월호와 송전탑 ‘국가는 국민을 버렸다’
<한겨레> 지면은 기자의 기사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기자·독자·칼럼니스트가 매일 한겨레 지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한겨레 필진들’(한필진)은 한겨레에 칼럼을 쓰는 다양한 필진을 인터뷰해 그 필진이 어떤 분인지를 좀 더 생생히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한겨레 필진 가운데 궁금하거나 소개됐으면 하는 분이 있다면 한겨레 SNS(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에서 얘기해주세요. 이메일(june@hani.co.kr)로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이계삼씨가 21일 오후 밀양의 한 식당에서 홍준표 도지사와 무상급식을 얘기하고 있다. 밀양/정혁준 기자
이계삼씨가 21일 오후 밀양의 한 식당에서 홍준표 도지사와 무상급식을 얘기하고 있다. 밀양/정혁준 기자
이계삼 칼럼니스트(이하 이계삼)와의 점심은 즐거웠다.

하숙집에서 밥 잘 먹던 ‘준표 형님’과 아이들 밥을 먹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도지사 홍준표’가 오버랩 됐다 (1회 ‘시골 교사’ 이계삼이 말하는 홍준표와의 ‘이상한 인연’).

그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미울타리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그가 타온 커피를 앞에 두고 밀양송전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밀양송전탑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014년 가을, 밀양에는 ‘드디어’ 송전탑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해 12월 26일, 시험 송전이 시작됐다. 10년 투쟁은 마침표를 찍은 것일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론에서는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가장 앞장서서 싸워온 225세대 주민들은 한전에서 주겠다는 보상금을 한 푼도 수령하지 않고 있어요. 끝까지 가겠다는 거죠. 보상금 받는 건 굴복이라 생각하고 버티시겠다는 겁니다. 어르신들은 싸움을 하면서 탈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게 되었죠. 그래서 뭔가 이 사회에,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계삼과 주민 16명은 지난 3월 내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밀양’을 만났다. 당진, 아산, 서산, 영광, 횡성, 여주, 광주, 안성, 고리, 월성, 영덕 등 2900km에 이르렀다. 이들의 원정길은 <탈핵탈송전탑 원정대>(한티재 펴냄)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계삼은 지금 어르신들과 함께 이 책을 들고 전국으로 북콘서트를 다니고 있다.

이계삼은 밀양 투쟁 10주년을 맞아 대책위 일꾼들, 연구자들,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밀양송전탑 투쟁 백서’를 준비하고 있다. “3권으로 구성하려 해요. 1권은 밀양송전탑 싸움에 연루된 에너지 시스템과 정책의 난맥상을 다룰 거예요. 2권은 국가와 공권력, 한전이 주민 인권을 탄압했던 인권 탄압 사례집이 될 것이구요, 3권은 한전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마을공동체가 파괴된 과정과 사례를 담을 겁니다.”

오는 12월5일은 밀양 송전탑 싸움이 시작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2005년 12월 5일,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전 밀양지사 앞으로 몰려가서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항의집회를 했다. 이때를 맞아 10주년 기념행사도 준비 중이다.

■ 글쟁이가 현장 활동가로 나선 이유

그에게 ‘어떻게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에 참여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우연한 계기였죠. 2012년 1월13일자로 학교에 사직서를 냈어요. 퇴직한 뒤에는 이런저런 일정들로 꽉 차있었어요. 오랫동안 덴마크를 눈여겨봐오고 있었는데, 거기 연수도 다녀올 계획이었고, 책을 쓰려고 생각한 주제가 두 가지 정도 있었죠. 홍성 풀무학교 전공부와 몇몇 대안학교들, 공부방 여러 곳을 다닐 계획도 있었죠. 제가 편집위원으로 함께 하고 있던 <오늘의교육> 편집 일도 열심히 하려고 스스로 ‘편집 부주간’이라고 이름까지 붙여두었죠. 겨울방학 보충수업 중이었는데, 2월 봄방학 시작과 함께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할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고요. 그런데, 사직서를 낸 사흘 뒤인 1월16일, 산외면 보라마을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자결한 사건이 일어난 거죠.”

2012년 8월22일 저녁, 밀양시 삼문동 너른마당 2층에서 열린 56번째 수요 촛불문화제가 끝나고 주민 50여명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크레파스로 스케치북 종이에 ‘꼭 이길 낍미데이!’라고 적었다.  밀양/강재훈 선임기자
2012년 8월22일 저녁, 밀양시 삼문동 너른마당 2층에서 열린 56번째 수요 촛불문화제가 끝나고 주민 50여명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크레파스로 스케치북 종이에 ‘꼭 이길 낍미데이!’라고 적었다. 밀양/강재훈 선임기자
당시 이계삼은 전교조 활동을 거의 접고 밀양 지역의 진보적인 시민들과 단체들이 함께 출자하여 만든 협동조합인 ‘너른마당’에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서 우리가 뭔가 도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퇴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아질 이계삼이 그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결성된 분신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고, 장례를 치른 뒤 주민대책위 조직과 분신대책위가 결합한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처음에는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어르신들만 싸우도록 놔두면 이 어르신들도 쌍용차 사태와 같은 길을 가게 될 것 같았어요. 당시까지 8년째 투쟁하던 중이었는데, ‘8년을 싸우고, 노인이 분신자결을 해도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절망이 너무 깊었어요. 기운이 하나도 없이 분향소 컨테이너 안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을 보고 있자니, 이거 큰일이다, 우리마저 빠져버리고 공사가 재개되면 결국 분신 이전의 상황, 정말 야수적인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겠구나, 제2 제3의 사고가 계속 일어나겠구나, 이런 강력한 느낌이 왔어요. 결국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죠.”

밀양대책위와 노인들은 풍찬노숙의 세월을 다시 이어갔다. 그 사이 세 번의 공사 중단과 재개가 있었고, 서서히 밀양 송전탑 싸움은 전국적인 이슈로 알려졌다. 하지만 쉽지 않는 싸움이었다. 밀양 구간을 제외하곤 다른 곳은 이미 공사가 완료되었고, 신고리 3~4호기의 공정률은 이미 100%에 다가가고 있었다. 주민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 놀라운 확신이 지켜본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강력한 투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패배했고, 철탑은 모두 들어섰다. 그들은 부질없는 일에 뛰어든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밀양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습니다. 에너지 분야는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 마련된 법제도와 관행이 거의 그대로 관철되고 있었습니다. 노동, 교육, 언론, 문화, 사회 거의 모든 영역이 어쨌든 민주항쟁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았지만, 에너지 영역, 그러니까 핵발전소든, 화력발전소든, 수많은 송·변전 시설이 통과하는 지역 주민들은 자기 생존권을 ‘끽소리’도 못하고 고스란히 빼앗겨왔고, 그런 사정을 국민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났고, 수산물 공포로 나라가 흔들리긴 했지만,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시스템이 어떤 고통과 모순을 감추고 있는지를 체감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밀양 노인들의 투쟁이 이 모든 모순들을 대낮처럼 드러내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세월호 참사와 밀양송전탑 투쟁, ‘국가가 국민을 버렸다’

지난해 5월 서울에서 열린 세월호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이계삼씨와 밀양 할매들.  박승화 기자
지난해 5월 서울에서 열린 세월호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이계삼씨와 밀양 할매들. 박승화 기자
세월호 참사와 밀양 송전탑 투쟁은 닮은 점이 있다. “국가가 국민을 버렸다는 점에서죠. 밀양 주민들이 현장에서 싸울 때, 경찰을 향해서 울부짖으면서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도 국민이다. 국민 대접을 해 달라. 우리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가권력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국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죠.”

그는 말을 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결국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아이들이 숨진 거잖아요. 밀양 송전탑 역시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대자본의 이익을 위해 시골 노인들과 마을 공동체를 죽이는 거죠.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어르신들은 마지막 4개 현장을 점거한 움막에서 행정대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6월11일 행정대집행을 당할 때까지 예닐곱 번 정도의 촛불문화제를 4개 움막에서 진행했는데, 그때 집회를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콘셉트로 진행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쓰신 추모의 글과 말씀들이 얼마나 생생하고 감동적이었는지 몰라요.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서글픈 전망도 내놓았다. “송전탑은 밀양 30개 마을을 지나갑니다. 이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아마 이들 마을은 차례로 사라질 거예요. 누가 이 어르신들의 집과 땅을 물려받아서 송전탑 주위에서 살아갈까요. 아마 없을 거예요. 자손들이 되돌아와서 거기에 살게 될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나 밀양 할매 할배들은 국가를 향해서 자신들을 더 잘 살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게 아니잖아요. 그저 국가가 해야 할 아주 최소한의, 그야말로 기본적인 역할만이라도 제대로 해 달라는 거였잖아요. 극히 평범한 조난 사고를 당했을 때, 국가의 안전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서 구조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역할,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권리에 입각해서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한전의 개발 행위가 민주적 절차를 어기고 있다면 이를 교정해서 억울하게 생존권을 빼앗기지 않게 해 줄 정도의 방어적인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국가는 그런 요구를 완벽하게 외면해 버린 거죠.”

이런 작은 요구에도 일부 언론들은 ‘돈 때문에 저런다’는 프레임을 걸어 이들을 매도하고 있다. 그는 분노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돈 때문에 이렇게 투쟁하는 것이 아니듯, 밀양의 할매 할배도 돈 몇 푼 더 받자고 10년간 싸워 오신 게 아니에요. 그런데 국가도 한전도 보수 언론도 모두 세월호 유가족의 보상금 얘기를 끄집어내고, 송전탑 때는 보상 문제로 프레임을 딱 쳐서 일방적으로 매도해버리고 말죠.”

■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준 밀양 할매 정신

이계삼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2012년 대통령 선거 뒤였다. 그는 대선 뒤 1주일 동안 휴대폰을 꺼 놓고 ‘잠수’를 탔다. “힘들 때 마다 ‘대선 승리할 때까지만 참자’라고 어르신들에게 얘기했는데,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대통령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였는데, 결국 그렇게 됐죠. 1주일 뒤 겨우 주민들을 만났는데, 할매들이 너무 반가워하며 맞아 주었어요. 그때 만감이 교차했어요. 당신들도 선거 패배가 무슨 의미인지를 아실 거예요. 결국 좀 있으면 공사가 재개되고, 그 야수적인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철탑이 서지 않을 가능성이 사실상 떠내려가 버린다는 그런 의미, 모르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겠다고 손잡아 주시고 끌어안아주시는 할매들, 이분들 때문에 제가 아직도 이러고 있죠. (웃음) 이 할매들이야말로 밀양 투쟁의 정신 그 자체죠.”

2013년 12월 밀양 상동면에서 돼지를 키우던 유한숙씨가 송전탑 때문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이계삼씨의 모습. 밀양/박종식 기자
2013년 12월 밀양 상동면에서 돼지를 키우던 유한숙씨가 송전탑 때문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이계삼씨의 모습. 밀양/박종식 기자
사실 밀양송전탑은 할매들의 싸움이었다. 처음엔 마을 대표도 남자, 각 면별 대책위 대표도 남자, 정부 공무원도 한전 직원도 남자, 경찰도 남자, 모두 남자들 판이었다.

“할매들을 포함해서 여성들은 처음엔 그저 동원되는 주체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남성 지도부들 상당수가 싸움을 포기하고 말았죠. 힘없는 할매, 아주머니들이 다수로 남은 거죠. 하지만 할매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할매들은 누가 와도 환대했고 밥을 해서 대접하고, 당신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잠자리를 내 주었죠. 밀양을 찾아온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시민 학생들이 다름 아니라 이 ‘할매들’을 보고 감동하고 또 배운 거죠.”

“사실 밀양 싸움은 객관적으로 보면 전국적인 투쟁이 되기 어려운 조건이었어요. 에너지 분야의 싸움도 생경했고, 송전탑 투쟁은 더욱 그랬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외진 시골의 싸움이었고. 그런데도 2013년 5월, 10월 공사 재개 당시에, 그리고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때는 전국 곳곳에서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왔어요. 이게 다 할매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장 약한 주체들만 남았을 때, 오히려 가장 강력한 투쟁이 되었죠. 수십 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이 에너지 시스템이 크게 한번 기우뚱했어요. 물론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지들 마음대로 발전소 짓고, 송전선 깔고, 전기요금 걷어가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절대로 예전같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힘없고 약한 우리 할매들이 그 큰일을 했어요.”

■ 칼럼 ‘가만히 있으라’에서 제시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이계삼이 한겨레에서 칼럼을 쓴 건 2009년부터였다. 그는 <녹색평론>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했고, <한겨레21>, <전교조신문> 등에도 칼럼을 쭉 써 왔다.

그는 4주에 한번씩 ‘세상읽기’라는 코너에 칼럼을 쓴다. ‘기억나는 칼럼은 어떤 건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2013년 7월에 쓴 ‘공부는 힘이 세다’를 꼽았다.

그는 이 칼럼에서 50대 아주머니에게 호통을 쳤던 공부 잘한다던 젊은 검사를 소환시켰고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대필보고서’로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는 미국 박사들을 정면으로 ‘깠다.’

이계삼씨가 자신의 집 책상에 앉아 있다. 그는 이 책상에서 한겨레 칼럼 등 글을 쓴다.  밀양/정혁준 기자
이계삼씨가 자신의 집 책상에 앉아 있다. 그는 이 책상에서 한겨레 칼럼 등 글을 쓴다. 밀양/정혁준 기자
이 칼럼은 두어 시간 만에 쓴 것이다. 사실 그는 칼럼을 쓰기 며칠 전부터 이런저런 자료를 검토하고, 요약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먼저 노트에 손으로 초안을 쓴 뒤, 초안을 컴퓨터에 옮겨 쓰며 퇴고하는 꽤 ‘교과서적인’ 글쓰기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는 칼럼을 그렇게 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 이유를 그는 말했다. 2013년 5월28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밀양송전탑과 관련해 “그게(밀양 송전탑 건설 필요성 논란) 시작된 지가 벌써 7, 8년 됐는데, 그 세월 동안 뭘 하고 있었느냐”며 국무위원들에게 호통을 쳤다. 곧바로 전문가협의체가 꾸려졌고 공사가 두 달 동안 중단됐다. 그때 마련된 ‘전문가협의체’에서 그는 주민 쪽 간사로 한전 전문가들과 ‘총성 없는 전투’를 벌이느라 두 달간 ‘죽을’ 고생을 했는데, 칼럼 마감일이 공교롭게도 한전 위원들의 보고서가 사실상 ‘대필’된 정황을 폭로하는 기자회견과 겹쳐버린 것이다. 며칠 내내 그 문제로 밤을 샜는데, 그날 점심 무렵에 칼럼 마감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후 1시부터 칼럼을 써내려 갔죠. 마감시간은 3~4시간 밖에 남지 않았어요. 버스에서도 쓰고, 기자회견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도 쓰고,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에게 걸려온 전화 받으면서도 썼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서럽기도 했어요.”

다행히, 그 칼럼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칼럼을 링크하면서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 머리 좋고 외우기 잘해서 좋은 대학 나온 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강자의 마름 역할을 하면서 벼슬한 것으로 착각하고, 쌀 한 톨은커녕 손에 기름이나 흙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남을 지배하는 특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들로 넘쳐 나고 있으며 온 사회는 그들처럼 되기 위해 안달을 한다. 한국의 60년 교육은 이 점에서 크게 실패했다. 나는 20년 전부터 노동문제는 교육문제와 함께 풀지 않고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이계삼 선생이 한국의 지배체제의 핵심에 도달했다”고 평했다.

세월호 참사 뒤 그가 쓴 ‘가만히 있으라 칼럼도 화제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그 다음날 쓴 칼럼이었어요. 저뿐 아니라 이 나라 시민들이 완전히 ‘벙 쪄’ 있는 시간이었으니, 어떻게 뭘 써야 할지 감당이 안 됐어요. 우리의 상상력을 완전히 넘어서버리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든 칼럼은 써야 했다. 그때 떠오른 건, 체르노빌 원전사고였다. 선장이 탈출하고 정부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방기한 건, 소련 대통령에게조차 허위 보고를 하고, 곳곳에서 부패한 당관료들이 민중을 놔두고 제 살길만 찾았던 사례들이 폭로된 체르노빌 사고와 너무나 닮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난 60년 한국 교육에 대한 사망선고였고, 지난 시절, 국가가 국민에게 강요한 유일한 행동의 준거였죠. 뭔가 이 시대의 핵심과 확 부대끼는 느낌 같은 것이 왔죠. 근데, 이제 다 식어버렸네요. 요새 유행하는 농담을 빌자면, ‘이미 가만히 있는데도, 더욱 격렬하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는 자들이 더욱 득세를 하네요….” 이계삼이 쓸쓸히 말했다.

■ 그의 칼럼에서 거세되지 않는 ‘나’

이계삼씨는 모든 글의 주어는 ‘나’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2014년 5월 월간지 ‘나·들’과 인터뷰할 때의 이계삼.  박승화 기자
이계삼씨는 모든 글의 주어는 ‘나’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2014년 5월 월간지 ‘나·들’과 인터뷰할 때의 이계삼. 박승화 기자
이계삼은 칼럼 쓰기 전 일주일부터 글감을 찾는다. 신문과 잡지 등을 죽 훑어보고 관련된 책도 찾아서 읽는다.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칼럼의 반향은 문자메시지 횟수를 통해 ‘감’을 얻는다. 전화를 걸어서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혁신학교를 비판한 칼럼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를 썼을 때는 현직 교사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의 항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고 한다.

그는 칼럼을 쓸 때 어릴 적 읽은 신문과 책이 많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제 문체가 예스러운 느낌이 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젊은 사람이 안 쓰는 한자성어도 가끔 있어요. 어릴 적 읽었던 신문의 영향인 거 같아요.”

사실 그는 글 읽는 걸 좋아했다. 도서관이 없던 시골에 살면서 어릴 때 그는 집에 굴러다니는 이문열의 소설들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군대에 있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국방일보>를 들고 갔고, ‘진중문고’도 열독했다.

그의 칼럼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구체성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구체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냐’고 물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어차피 저는 지식인이 될 자질도 자신도 없어요. 다만, 저는 ‘격물치지’(格物致知) 하고 싶어요. 어떤 ‘실제’ 사물을 속속들이 깊이 알고 이를 통해서 깨닫고 싶은 거죠. 그건 꼭 책이나 이론이 아니라 제가 하는 실제의 활동, 만나는 사람, 이런 구체적인 것에서 배양될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전 모든 글의 주어가 ‘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논술 시험의 제일 큰 맹점은 ‘나’를 거세하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남 얘기하듯 해야 객관적이라는 것도 허구입니다. 글이란 철저히 당파적일 수밖에 없어요. 논술이나 신문칼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 “환경이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앞으로 밀양에서 대안적인 삶에 대해 공부하고 살고 싶다고 했다. “유시민씨가 자신의 저술활동을 ‘지식소매상’이라고 표현했던데, 저도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쉽고 알찬 책을 쓰고 싶어요. 덴마크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고,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대한 책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송전탑 운동을 하며 알게 된 지역 주민들과 탈핵탈송전탑 운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이계삼은 한겨레에서 사설과 칼럼을 제일 열심히 본다. “인터넷은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흘러 다니죠. 하지만 믿을만한 정보와 견해는 많지 않아요. 여러 이슈들 가운데 갈팡질팡하고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한겨레 사설을 열심히 읽어요. 한겨레 사설은 그 어마어마한 정보와 혼란스러운 견해들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가장 깔끔한 요약정리이자, 신뢰할 만한 견해들의 목록이죠.”

그는 한겨레에 대한 고마움과 부탁을 전했다. “여러 진보매체 가운데 밀양 송전탑 투쟁을 가장 관심 있게 지켜봐 주고 보도해 준 건 <한겨레>, <한겨레21> <나·들>이었다고 생각해요. 밀양 송전탑 같은 변방의 이슈가 이만큼이라도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한겨레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계삼씨가 21일 자신의 집에 배달된 ‘한겨레21’을 보고 있다.  밀양/정혁준 기자
이계삼씨가 21일 자신의 집에 배달된 ‘한겨레21’을 보고 있다. 밀양/정혁준 기자
그는 언론에 대한 매우 아날로그적이고, 또한 교과서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종이매체가 점점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한겨레나 한겨레21이 굉장히 어려움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결국 언론의 근본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정보의 격랑 속에서 출렁이며 흘러 다니면서 더더욱 뭔가 ‘의견’을 찾고 그 의견들이 다투는 ‘공론장’을 찾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는 독자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대다수의 언론들이 독자를 한 사람의 시민으로 간주하고 기사를 쓰고 기획을 해 나가는 게 아니라, 뭔가 ‘귀찮아하고, 바쁘고, 이해력이 떨어지며, 또한 보수적인’ 주체로 상정해 놓고 기사를 쓰고 기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실상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매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자신의 삶과 직접 연관되는 세상의 일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주의집중하고 판단하는 주체라고 저는 믿어요.”

■ 에필로그

이계삼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는 말투가 너무 귀에 익었다. 아마 이 선생의 사투리 때문이리라. 그는 “~했지예” “~그렇지예”처럼 ‘예’로 끝나는 사투리를 썼다. 말끝이 ~예로 끝나는 건 경북 남부 내륙 지방의 특징이다. 내 고향이 대구여서 잘 안다. 그는 밀양이 부산과 대구의 딱 중간쯤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계삼은 어쩔 수 없는 ‘밀양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과 군대, 대학원, 교사 초년 시절을 합한 10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지만, 나머지 30여년을 밀양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밀양에서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다양성을 지향하지만, 필진은 어쩔 수 없이 이 나라 지식인 사회의 지형도를 좇아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형편에서 밀양의 칼럼니스트 이계삼의 존재는 이채롭다. 그가 밀양에서 글과 행동으로써 그려내는 삶의 궤적이 ‘변방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하듯 ‘시대의 한복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밀양/글·사진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한겨레가 필요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