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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인터뷰어 이진순 앞에선 천하의 김민기도 막걸리만 ‘벌컥벌컥’

등록 2015-07-15 12:38수정 2015-10-20 14:30

[한필진] ③ 이진순
그녀가 말하는 인터뷰 뒷이야기
‘염장’을 ‘공감’으로…“까칠하지 않아요. 착하고 연약하답니다”
“유승민·김훈 같은 합리적 보수주의자들과도 인터뷰하고 싶어”
<한겨레> 지면은 기자의 기사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기자·독자·칼럼니스트가 매일 한겨레 지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한겨레 필진들’(한필진)은 한겨레에 칼럼을 쓰는 다양한 필진을 인터뷰해 그 필진이 어떤 분인지를 좀 더 생생히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한겨레 필진 가운데 궁금하거나 소개됐으면 하는 분이 있다면 한겨레 SNS(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에서 얘기해주세요. 이메일(june@hani.co.kr)로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이진순의 칼럼을 처음 본 건 ‘엄마의 콤플렉스’에서였다. ‘시시포스의 앞치마’라는 제목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남편은 아내와 딸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했지만 요리를 못했다. 이진순은 “어이구 내 팔자야”라고 한탄하며 앞치마를 두르곤 했단다. 그러다 마침 저녁 때 동네에서 여는 요리강습이 있는 걸 알게 됐다. 남편 역시 요리를 배우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강인원이 적어 강습이 폐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으로 글은 끝난다.

재미있는 반전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계속 밀어 올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떠올리며 집안 일을 생각하게 만든 칼럼이었다. 인터뷰를 앞두고 다시 읽어 보니 ‘차줌마’로 대표되는 요리하는 남자도 문득 생각났다.

한필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금요일이 어떠냐고 했다. 목요일엔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가 있어서였다. 해서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9일엔 누구와 인터뷰를 하셨나요?

“임미애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과 인터뷰했어요. 1992년 경북 의성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 2006년과 2010년 의성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분이죠. 지금은 평범한 아줌마 농민으로 돌아왔어요. 인터뷰하면서 두 아줌마가 울다가 웃다가 눈물콧물 범벅이 됐어요.”

- 인터뷰 내용이 어떻기에 그랬나요?

“토요판에서 확인하세요. 영업기밀이에요. 호호.”

- 한겨레에서 칼럼을 처음 쓴 건, 언제였나요?

“한겨레 오피니언사이트 ‘훅(Hook)’에 칼럼을 잠시 썼는데요. ‘한겨레 토요판 지면에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2012년 1월부터 ‘엄마의 콤플렉스’라는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죠.”

- 첫 칼럼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미안해, 근데 3초뿐이야’ 라는 제목이었어요. 제가 마흔 한 살 때 첫 아이를 낳았는데요. 어린 딸을 키우며 느낀 점을 썼어요. 아이를 낳기 전엔 이렇게 키우겠다는 고매한 이상이 있잖아요. 근데 그런 이상은 천장을 찌르는 고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더라고요. 남편에게 초고를 보여줬는데 ‘얘가 보면 안 좋겠다’고 해서, 초고는 딸한테 아직도 안 보여줬어요. 판금 원고인 셈이죠. 딸이 20살이 넘으면 보여주려고요.”

- 칼럼 반응은 어땠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요즘에는 그 칼럼 얘기를 듣고 하죠. 처음 만나는 어떤 분한테서 ‘엄마의 콤플렉스 칼럼 잘 봤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하니까요. 우리 딸도 그 칼럼을 더 좋아해요. 그 칼럼에는 자기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자기 이야기가 안 나온다면서요(웃음).”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만나고 싶다

이진순은 김두식 경북대 교수의 ‘고백’에 이어 2013년 6월부터 지금까지 ‘열림’을 맡고 있다. 열림의 원 제목은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이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 변화와 함께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다. 열림은 격주로 토요판에 연재된다. 7월4일까지 모두 52명을 인터뷰했다.

- ‘김두식의 고백’과 ‘이진순의 열림’ 차이를 얘기해주시면요?

“김 교수님은 착하게 인터뷰하는 분이고, 저는 안 착하게 인터뷰하는 사람이에요(웃음). 고백은 제목처럼 인터뷰한 분이 자신의 상처, 좌절, 혼란을 고백하며 함께 치유하는 느낌의 인터뷰 기사였던 것 같아요. 인터뷰 방식도 좀 다른 듯해요. 김 교수님은 공감을 많이 표현해 주던데요. 저 역시 공감을 늘 하지만, 어떤 때는 염장을 지르는 얘기도 가끔 해요. 내가 너무 빨리 공감을 표현하면 인터뷰하는 분이 더 이상 얘기를 안 하니까요.”

- 염장은 어떤 식으로 지르셨나요?

“김민기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였죠. 김 선생님이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자, 제가 ‘돈 버는 일을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나요’라는 식으로 되물었죠. 그런 식으로 몇 번 되묻자 김 선생님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인간하고는 말을 못하겠다’며 막걸리를 벌컥벌컥 드시곤 했어요. 채현국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마다 다른데요’라고 말하고, 채 선생님은 ‘아, 그게 아니고’라는 말을 서로서로 하곤 했죠.”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가 열림에서 처음으로 인터뷰한 사람은 윤종수 변호사(법무법인 세종)였다( 저작권을 나눠줘요, 세상이 바뀝니다).

- 첫 인터뷰는 어땠나요?

“그때 그 분은 현직 판사였어요. 제가 관심이 있는 저작권 분야 전문가였어요. 윤종수 판사가 신문, 잡지에 기고한 저작권 관련 칼럼 뿐만 아니라 윤 판사가 쓴 저작권 관련 논문도 꼼꼼히 봤어요. 그렇게 공부하는 동안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전문적으로 깊이 들어건 거죠.”

- 그럼 인터뷰 기사는 수월했겠네요.

“정 반대였죠. 고경태 에디터에게 원고를 보냈는데요. 못 싣겠다는 답변이 왔어요. 고 에디터가 팀원들에게 회람해서 읽어 보라고 했더니, ‘전문가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 같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너무 지루하다’와 같은 의견이 나왔다고 얘기하더군요. 제 원고를 물리면서 ‘다른 기자가 쓰는 인터뷰와 차별성이 뭐냐’고 물어보더군요. 그 때 ‘남들이 쓰는 인터뷰에 구애받지 말고 이진순 만의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생각했죠.”

- 그 뒤 인터뷰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그게 제게는 결정적 나침반이 됐어요. 독자 시선에 맞춰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거였죠. 신문을 보는 독자는 저처럼 예습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적인 시선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죠.”

모든 인터뷰이 매력적…열렬히 짝사랑 하는 마음으로 임해

이진순에게 ‘그동안 인터뷰한 사람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누구였냐’고 물었다. 그는 “모두 매력적이었죠. 열렬히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했다니까요”라고 답했다. 여기에 “인터뷰를 해주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인터뷰를 준비하고 인터뷰 기사를 쓰는 동안 내내 그 사람만 생각하고 떠올렸으니까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면서 보람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요?

“탈북자 강룡씨 인터뷰 기사( 진보진영 무관심이 ‘극우 탈북자’ 만든다 )를 보고 이영구 할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인터뷰에서 강룡씨가 대학원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할아버지께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젊으신 것도 아니신데 지인들과 뜻을 모아 등록금을 마련해 보겠다고 하신 거였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3월에 돌아가셨어요( ‘0416’ 글쓰기 제안 이영구씨 별세). 평소 할아버지를 잘 알던 스물 두 분께서 유지를 받들어 등록금 500만원을 마련했어요. 돈 많은 사람에게는 큰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평범한 소시민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었죠.”

- 인터뷰할 때 힘든 경우는 언제인가요?

“원고 쓸 때마다 ‘이번이 제일 힘든 것 같아’라고 매번 생각해요. 일단 섭외가 힘들죠. 인터뷰하고 싶은 분 중에 꺼려하는 분들이 많으셔요.”

- 어떤 분을 인터뷰하고 싶으신가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분들과도 인터뷰를 하고 싶거든요. 이른바 주류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의 확신과 철학에 관해서도 보여주고 싶죠. 그래서 보수 쪽 분들한테 ‘인터뷰하면 더 비중 있게, 더 우호적으로 써주겠다’는 의미로 ‘가중치 20점 더 드립니다’라고 얘기를 해요. 하지만 안 될 때가 많아요.”

- 그런 분들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누구인가요?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와 김훈 작가에요.(기자 주: 김훈 작가에게는 저 역시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했슴에도…)”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필진들‘ 이진순 박사.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4시간 넘는 인터뷰·7~8번의 퇴고…힘들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며 보람

이진순이 인터뷰하는 시간은 최소가 3시간30분이다. 원고를 쓰다 궁금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이메일과 전화로 추가 인터뷰도 자주하는 편이다. 인터뷰 장소는 인터뷰 하는 사람이 편하다는 곳에서 주로 한다.

- 인상적인 인터뷰 장소가 있었나요?

“동대문 근처인 종로구 창신동에는 작은 봉제공장이 많아요. 이 곳에서 봉제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신동 라디오>가 있는데요. 여기서 DJ를 맡고 계신 봉제미싱사 김종임씨를 인터뷰할 때였죠.(전태일도 우리처럼 재미나게 살고 싶었겠죠) 종임씨는 허름한 교회 부속 건물에 오디오와 마이크를 놓고 녹음실로 사용하고 있었죠. 인터뷰를 그 곳에서 하기로 했어요. 인터뷰를 하는 날 비가 왔어요. 근데 그 곳 천장 건물에 비가 세는 거예요. 물이 바닥에 저벅저벅할 정도였죠. 저와 강재훈 선배, 윤형중 기사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걸레로 물을 한바가지 내보내고 그렇게 앉아 인터뷰를 했네요. 인터뷰 장소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인터뷰 하면서 시켜 먹은 냉면이 참 맛있다는..”

- 영어로 인터뷰를 하시기도 하셨죠?

“두 번 있었죠.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와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을 인터뷰할 때였죠. 커밍스 교수의 경우 연구 논문과 관련해선 많은 자료가 있었지만 개인적인 기록은 찾기 힘들었어요. 인터뷰하면서 그나마 사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예를 들면 미국 학자들은 자유로운 풍토에서 학문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커밍스 교수 얘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교수는 메이저대에서 교수직을 구하기 힘들고 테뉴어(종신) 교수가 되기도 힘들다고 하네요.”

- ‘이진순의 열림’에 들어가지 않았던 인터뷰 뒷얘기 좀 해주세요.

“최근 일이라서 그런지, 김민기 선생님 인터뷰가 기억에 나네요. 극단 학전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났어요. 낮 2시에 시작해 새벽 1시에 끝났어요. 막걸리로 시작해 막걸리로 끝냈어요. 한 지인이 ‘인터뷰 기사에서 막걸리 냄새가 펄펄 나더라’고 하더군요(웃음).”

- 인터뷰 기사는 언제 주로 쓰시나요?

“인터뷰를 보통 주초에 해요. 녹취록은 주말에 받아요. 월요일부터 쓰고 줄이고, 쓰고 줄이는 일을 계속 반복해요. 인트로(서론)는 보통 7~8번씩 고쳐요. 그 때마다 파일이름에 버전 표시를 해놓는데요. 딸이 가끔 밤에 기사를 쓰는 엄마한테 와서 파일이름에 있는 버전을 봐요. 버전이 1번이나 2번이면 딸이 ‘아직 많이 남았네’라고 할 정도죠.”

- 성격이 ‘까칠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까칠하다뇨(웃음)? 그거 고경태 에디터한테 들었죠(기자 주: 고 에디터한테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질이 못된 것 같아 보이나요? 저만큼 착한 필자도 없지 않아요. 전 차분한 모범생도 아니지만 까칠한 편도 아니었어요. 제 캐릭터는요, 착하고 연약하답니다(또 웃음). 이 인터뷰 기사가 나가면 페북에 득달같은 댓글이 달라붙겠네요(웃음).”

이진순은 열림 첫회에서 이렇게 썼다. “희망을 찾고 싶었다. 개인적 경험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낯선 것, 새로운 것, 나와 다른 것에 자신을 열어 그 신선한 소통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열린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계속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오늘도 열린 사람들을 찾고 만나고 함께 어울림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시시포스의 숙명이다.

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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