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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낙태죄 폐지 44년 된 나라는 어떨까요? 임신중절 논란의 미래 [더(The)친절한 기자들]

등록 2017-11-28 12:10수정 2022-08-19 15:20

[더(The) 친절한 기자들]
청, 임신중절(낙태)죄 폐지 청원에 답변
시민사회 반응 엇갈려…갈 길 먼 논의

미국, 낙태죄 폐지 뒤에도 역행 움직임
관련 클리닉도 18년 새 절반으로 줄어
임신중절죄 폐지는 목표 아닌 출발점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인공임신중절을 허락하는 국가들. <청와대 페이스북> 영상 갈무리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인공임신중절을 허락하는 국가들. <청와대 페이스북> 영상 갈무리

안녕하세요. ‘더(The) 친절한 기자들’의 이재호 기자입니다.

청와대가 26일 임신중절(낙태)죄 폐지 논란과 관련해 입장을 내놓고 내년도(2018년) ‘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임신중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기사에서는 보편적으로 쓰는 ‘낙태’라는 단어 대신 모자보건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인공)임신중절’이라는 단어를 쓰려 합니다.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불법적’인 임신중절을 지칭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청와대 누리집에 23만5천여명이 청원한 ‘임신중절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요구에 대한 답변 동영상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지만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임신중절 음성화 야기, 불법시술 양산과 고비용 시술비 부담, 해외 원정 및 위험 시술 등의 부작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내년에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해 현황과 사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관련기사: 조국, 낙태죄에 “국가·남성 책임은 빠져…임신중절 실태조사”)

2012년 임신중절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던 헌법재판소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헌재에는 지난 2월 이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이 다시 제기된 상태입니다. 27일 취임한 이진성 헌재소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임신 뒤) 일정 기간 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다”라고 말했고, 김이수 재판관도 “예외적으로 임신 초기 단계고 원하지 않는 임신의 경우와 같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며 낙태죄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관련기사: ‘낙태죄 폐지’ 청원에 응한 청와대, 헌재 분위기도 달라졌다)

■ 청와대 발표에도…갈길 먼 임신중절 논의

청와대가 국민청원에 답변하고 나섰지만 시민사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의 제로섬 게임 구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각론을 놓고는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여성단체들은 청와대가 운을 뗀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입장을 밝혔지만 미프진 도입 등 보다 실질적인 대책을 시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임신중절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종교계에서는 임신중절죄 폐지에 대해 ‘생명경시 풍조가 우려된다’며 사실상 반대한다는 태도입니다.

일부 언론은 조 수석이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2013년)하던 때 쓴 논문인 ‘낙태 비범죄화론’에 주목했습니다. 해당 논문에서 조 수석은 “형법은 낙태 처벌을 규정하고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범위는 협소하지만 낙태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그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 법과 현실의 괴리현상, 낙태죄의 사문화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모자보건법상 우생학적 허용사유와 범죄적 사유는 현실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하며 사회경제적 허용사유는 새롭게 추가되어야 한다”며 “‘기간방식’을 도입하며 임신 12주 내의 낙태는 비범죄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 수석은 “낙태 감소는 낙태의 범죄화와 형사처벌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청소년 시기부터 지속적·체계적 피임교육, 상담절차의 의무화, 비혼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 입양문화의 활성화 등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 &lt;한겨레TV&gt; 자료사진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 <한겨레TV> 자료사진

■ 임신중절 금지시키자 ‘버려지는 아이·숨지는 산모’ 늘어

임신중절은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던 주제이기에 우리가 참고할 만한 외국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루마니아’입니다. 조 수석이 답변 영상에서 언급한 바 있는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가 최근 쓴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루마니아 사례를 잘 설명하고 있어 잠깐 소개하려 합니다. (▶관련기사: 병든 사회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관련영상: <한겨레TV> 북 토크쇼, 아픔이 길이 되려면)

루마니아는 1966년 <디크리 770>(Decree 770)이라고 불리는 임신중절 금지법을 시행했습니다. 이 법은 강간, 근친상간을 통한 임신과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임신, 이미 아이가 4명 있거나 산모의 나이가 45살 이상인 경우를 제외한 임신중절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디크리 770은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으로 폐기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째는 출생률의 변화입니다. 디크리 770이 시행되고 첫 4년 동안 인구 1천명당 태어나는 신생아 수를 의미하는 ‘조출생률’이 14명에서 21명으로 급격히 늘었습니다. 동시에 보육원 등 시설에 맡겨지는 아이의 수도 늘었습니다. 원치 않은 아이를 낳았지만 양육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열악한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은 영양결핍에 노출됐고, 유아사망률의 증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부는 의사에게 뇌물을 주고 임신중절을 했고, 저소득층 여성들은 위험한 임시중절 방법을 택했습니다. 잠깐 늘었던 조출생률은 1970년부터 다시 감소했고, 1985년에는 법 시행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둘째는 모성사망비(임신 중이거나 출산 이후 7주 이내 사망하는 여성의 숫자)의 급증입니다. 의사로부터 안전한 수술을 받을 수 없게 된 여성들이 불법 시술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많은 합병증을 앓으면서 매년 500여명이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 임신중절법 시행 이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7배 높아졌고, 1989년 기준 주변국인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모성사망비는 9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1989년 임신중절 금지법이 폐기된 다음 해 루마니아의 모성 사망비는 다시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2010년 소득별 임신중절 비율. 그래픽 이재호 기자
2010년 소득별 임신중절 비율. 그래픽 이재호 기자

■ 불평등 야기하는 임신중절 금지

잠깐 주의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미국의 피임이 합법화됐던 과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임신중절 합법화 논의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피임은 미국에서 1972년까지 불법이었습니다. 콘돔은 1838년 개발됐지만, 미국 정부는 1873년 콤스톡 법(Comestock Act)을 통과시켜 피임에 대한 정보유통과 광고를 막았죠. 저항이 커지자, 연방대법원은 1865년 부부 사이에서만 피임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 1972년에야 피임이 전면 허가됐습니다.

피임 금지는 사회 불평등을 고착화했습니다. 국가가 피임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동안, 사실상 백인들과 상류층 사람들은 피임법을 숙지하고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암암리에 피임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피임법을 몰랐던 유색인종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원치 않는 임신도 받아들였습니다. 피임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가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2010년 학력별 임신중절 비율. 그래픽 이재호 기자
2010년 학력별 임신중절 비율. 그래픽 이재호 기자

미국 켄터키주 북부에 있는 도시인 루이빌의 ‘이엠더블유 여성 수술센터’(EMW Women’s Surgical Center). 병원 누리집 갈무리
미국 켄터키주 북부에 있는 도시인 루이빌의 ‘이엠더블유 여성 수술센터’(EMW Women’s Surgical Center). 병원 누리집 갈무리

그렇다면 한국의 임신중절 수술은 어떨까요? 2010년 발표됐던 보건복지부의 ‘마지막’ 임신중절 실태조사 보고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학력이 낮을수록 임신중절률이 높았습니다. 월 소득 300만∼500만원 사이 가임기 여성의 임신중절 비율이 37.5%로 가장 높았고 그 뒤를 200만원 이하 저소득자(29.7%)가 이었습니다.

조 수석이 답변 동영상에서 밝혔듯 임신중절이 불법인 상황에서 횡행하는 고비용·불법 임신중절 시술은 저학력·저임금의 여성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려대 김승섭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현행법으로 임신중절을 규제한다고 해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수가 줄어들 리 없고, 결국 법을 우회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임신중절술이 과거보다 더 높은 비용으로 은밀히 진행되면 많은 여성이 인터넷에 떠도는 위험한 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그로 인한 피해는 한국에서 임신중절 비용을 낼 수 없고, 수술을 위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저소득층 여성이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임신중절 금지 위헌 판결 난 미국, 논란은 여전

이러한 이유로 임신중절죄를 폐지하면 임신중절과 관련된 논란은 끝이 나는 걸까요? 미국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임신중절죄의 폐지가 논란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1973년 연방대법원이 이른바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통해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했습니다. 법원은 임신중절이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의 일환이라며 임신중절죄를 규정한 텍사스주법을 위헌으로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이 판결에서 조 수석이 언급한 ‘기간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임신 후 첫 3개월 동안은 태아가 생존능력이 없으므로 주는 임신중절을 규제할 수 없고, 4개월부터 6개월까지는 오직 산모의 건강을 보호할 목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수 있으며, 6개월이 지난 태아는 모체 밖 생존능력이 있기 때문에 임신중절을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내 임신중절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정부는 최근 낙태 상담을 제공하는 의료단체에 대한 자금 원조를 중단하는 명령에 서명했고, 공화당은 지난달 임신 20주 이후 산모의 임신중절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청와대가 임신중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 열흘 전, 미국의 방송국 <시엔엔>(CNN)이 보도한 ‘마지막 (임신중절) 클리닉’이라는 기사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미국 켄터키주 북부에 있는 도시인 루이빌의 ‘이엠더블유 여성 수술센터’(EMW Women’s Surgical Center)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수술센터는 미국 켄터키 주에서 마지막 남은 ‘임신중절’ 클리닉입니다. 이엠더블유 수술센터 앞에는 하루가 멀다고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이 찾아와 병원문을 닫을 것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세력의 위협은 실제적입니다. 미국의 임신보건 문제 연구기관인 ‘것마커’(Guttmacher)는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임신중절 반대 극단주의자 세력은 최소 26명에 대해 살해를 시도했고, 11명이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또다른 여성인권단체인 엔에이에프(National Abortion Federation)는 39곳의 임신중절 클리닉에 방화가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것마커에 따르면 이렇게 실제적인 위협이 가해지는 사이 1996년 452곳이던 임신중절 클리닉 수가 2014년 272곳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임신중절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공감대와 합의 수준이 낮을수록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임신중절죄가 폐지되더라도 미국처럼 역행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임신중절죄의 폐지냐 지속이냐를 놓고 갈등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은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끝으로, 더 친절한 기자들이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려 합니다. ‘임신중절죄는 모자(母子)의 건강을 해친다’, ‘임신중절죄는 특히 저소득·저학력 여성에게 해롭다’, ‘임신중절죄 폐지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꼭 기억해야겠죠?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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