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용기가 만든 1년] 2018년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한국의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여성들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고발에 함께하겠다는 연대도 이어졌다. 이들의 말하기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묵인해온 비뚤어진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이제는 새로운 시민성이 필요하다는 외침이다. ‘미투’에 한국 사회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3회에 걸쳐 살펴본다.
2016년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가 피해자를 추모하는 글들로 뒤덮여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심석희에 앞서 서지현이, 그에 앞서 권인숙, 김학순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발한 여성들의 ‘말하기’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둘 목소리를 냈고 그 경험이 켜켜이 쌓여 ‘미투’(#Me Too) 운동이 되었다. 일련의 ‘미투’가 가해자에 대한 ‘고발’ 또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폭로’를 넘어 ‘여성들의 말하기(Speak Out)’로 불려야 하는 까닭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1980년대 ‘(성고문은) 여성만의 특수한 문제 아니냐’는 의견에 부딪혔던 권인숙 사건이나, 김학순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증언이 있고 나서 남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를 민족 문제로 접근할 때 이를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정대협을 꾸렸던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투’의 시초는 1986년 당시 대학생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이유로 부천경찰서에 잡혀가 당한 성고문을 폭로한 일이다. 권인숙은 강제추행 혐의로 형사 문귀동을 고소했고 1989년 문귀동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대중적으로 처음 공론화한 사건이었다.
1993년에는 서울대에서 대자보를 통해 교수의 성희롱이 폭로되었다. 우아무개 조교는 신아무개 교수가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하는 등 성희롱을 저질렀고, 거부 의사를 밝히자 조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고 공개했다. 대법원은 1999년 신 교수에게 500만원을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부터 매해 여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공감과 치유를 얻어왔다. 2000년대 초반에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가 성폭력 가해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여성들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이즈음부터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계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는 이런 맥락의 연장선이면서 어떤 변곡점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는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정치적 입장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라고 결탁하기 위해 룸살롱과 군대 문화로 담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며 “예전에는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의미가 강했다면, 최근엔 학교와 직장 등에서 일상화된 ‘위력’을 경험하는 여성들이 ‘의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폭력을 느끼고 문제제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황예랑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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