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사장 박○○(40대 후반·남)은 계약직인 김○○(20대 중반·여)을 사무실로 불러서 업무에 관해 칭찬하면서 안부를 묻는 등의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김○○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허벅지에 손을 얹는 등의 행동을 했다. 김○○이 거부하자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싶지 않냐? 아직 어려서 사회생활을 할 줄 모르나 보다’라는 말과 함께 성관계를 요구했다. 김○○은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계속된 박○○의 요구에 따라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이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해당할까, 해당하지 않을까?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연구팀은 위와 같은 ‘가상 시나리오’를 대학생 329명(남성 120명, 여성 209명)에게 보여준 뒤에 박○○을 처벌하는 형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등을 물었다. 더불어 “나의 성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문제 될 수 있다고 느낀다” 등 31개 문항에 동의하는 정도를 물어, 응답자의 ‘젠더 감수성’(성인지 감수성)도 측정했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해 겨울 <한국경찰연구>에 ‘대학생의 성인지 감수성이 위력 성폭력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실렸다.
형법상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의 법정형은 7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이 연구 결과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집단은 평균 5년2개월(61.6개월)의 형량을 부과한 반면,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집단은 평균 4년2개월(49.7개월)로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을 내렸다. △피해자의 책임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해자의 행위를 범죄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는지 등도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평소 성차별, 성적인 괴롭힘을 대하는 민감성에 따라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이고 유무죄 판단, 판결에서의 양형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일반 성폭력 사건보다도 성인지 감수성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권력’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대부분 피해자가 위력에 눌려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거절 의사를 밝혔더라도 ‘동의’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는 ‘명백한’ 거절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사건이 공개된 이후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냈던 친밀한 문자 등을 꼬투리 잡아 ‘마녀사냥’이 이어진다. 법원은 안희정 사건, 유명한 현대무용가의 제자 성추행 사건 등에서 피해자의 순응하는 듯한 태도는 ‘동의’가 아니라며 ‘업무상 위력’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성인지 감수성에 바탕한 재판에서 나아가,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1대 국회에는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담은 형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직접적인 ‘폭행·협박’과 같은 물리력이 수반되지 않았더라도, 서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처벌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지난 6월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형법 일부개정안을 대표발의했고, 정의당 역시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최우선 입법 과제로 추진할 계획이다. 2016년 개정된 독일 형법에는 ‘성적 침해죄’를 추가해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표시에 반한 성행위’를 범죄로 규정했고, 캐나다 형법 역시 ‘자발적 동의’ 없는 성행위는 처벌하도록 돼 있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피해자 동의’를 중심으로 형법을 개정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황예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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