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실을 커밍아웃한 엘리엇 페이지. 사진은 지난해 9월 그가 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의 한 시사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 사진 AFP 연합뉴스
괴롭힘당하고, 자신을 혐오하고, 매일 폭력에 위협당하는 모든 트랜스젠더에게. 나는 당신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습니다.
미국의 영화배우 엘리엇 페이지(개명 전 엘렌 페이지)는 지난 1일(현지시간)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커밍아웃’과 관련한 발언을 ‘사회적인 메시지’로 영리하게 활용해왔다. 그 배경에는 ‘백인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자신이 성소수자 가운데서도 ‘다수자’ 위치에 있다는 점을 성찰적으로 인식한 데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페이지는 비백인·저소득층 등 상대적으로 더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호명했다. 페이지의 이번 커밍아웃이 성정체성을 밝히는 걸 넘어서 모범적인 ‘연대의 메시지’로도 읽히는 이유다.
첫번째 커밍아웃…“나는 획일적 기준 강요하는 산업을 대표하는 사람”
엘리엇 페이지는 2014년 2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인권 캠페인(The Human Rights Campaign)’ 컨퍼런스에서 처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했다.(위 영상 5분23초에 페이지의 커밍아웃 관련 발언이 시작되고, 30초 가까이 청중의 환호가 이어진다) 이날 페이지는 “내가 오늘 여기 선 이유는 게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엘리엇의 ‘깜짝 커밍아웃’에 객석에서는 환호가 쏟아졌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변화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섰다. 다른 (성소수자인) 이들이 더 편하고 희망적인 기회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의무감과 사회적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성정체성을 숨겨오며 겪었던 고통을 언급하며,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는 “나는 수년간 아웃팅되는 게 두려워 괴로웠다. 내 영혼과 내 정신건강과 내 인간관계가 고통받았다”며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하고 고통받는다. 너무 많은 자퇴와 학대와 가출과 자살이 발생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그걸 바꿀 수 있고, 이미 그걸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2014년 2월 미국 라스베가스의 ‘인권 캠페인(HRC)’ 연단에 선 엘리엇 페이지. 인권 캠페인 누리집 갈무리.
특히 페이지는 이 자리에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여성 배우’로 소수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연단에 서 있는 게 어색하다고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는 산업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계가 제공하는 “아름다움의 기준, 좋은 삶의 기준, 성공의 기준”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아왔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밀어내고 항상 진실하게, 제 마음을 따르려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라고도 했다.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자리에서도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한계’를 솔직하게 언급한 셈이다.
미투 폭로…“시스젠더 백인 레즈비언으로 특권 누려”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폭로로 할리우드에 ‘미투 운동’이 거세던 지난 2017년 11월, 페이지도 입을 열었다.당시 페이지는 2006년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의 영화감독이었던 브렛 래트너로부터 성희롱과 ‘아웃팅’(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소수자로 알려지는 것)을 당했다고 폭로한다. 래트너가 엑스맨 촬영 전 가진 첫 만남 행사에서 페이지보다 10살 정도 많은 연기자를 가리키며 “네가 쟤(페이지)가 ‘게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쟤랑 자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고, 18살이었다. 페이지는 “이 공개적인, 공격적인 아웃팅이 내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래트너의 말은 수년간 내가 호모포비아를 마주칠 때마다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고 했다.
동시에 페이지는 이 폭로에서 자신이 ‘백인 레즈비언’으로서 누려왔을지 모르는 ‘특권’을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여성을 향한 폭력의 확산이 저소득층 여성, 특히 비백인 여성, 트랜스젠더·퀴어 여성, 원주민 여성들에게 불균형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들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나 사법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침묵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위협받을 때 경호인력을 고용할 수 있고, 정신건강을 위한 돈과 보험이 있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이라는 특권이 있다. 다른 많은 취약계층의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백인 레즈비언으로서 저는 특혜를 받았고, 특권을 가졌다. 백인 우월주의는 비백인들을 침묵시킨다. 우리가 배우고 들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다”라고 덧붙였다. 자신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을 언급하며 ‘미투’가 ‘할리우드’를 넘어서서 비백인·트랜스젠더·원주민 등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엘리엇 페이지는 지난 1일 자신이 트랜스젠더란 사실을 공개했다. 엘리엣 페이지 인스타그램 갈무리
두번째 커밍아웃…“올해 살해된 트렌스젠더 대다수는 흑인이나 라틴계”
페이지는 ‘두 번째 커밍아웃’에서도 첫 번째 커밍아웃과 미투 폭로 때처럼 성찰적인 태도를 잊지 않는다. 특히 그는 “사실 나는 이 기쁨의 순간에, 내가 누리는 특권을 알고 있음에도, 두려움을 느낀다”며 ‘통계’를 언급한다. 페이지는 2020년에만 최소 40명의 트랜스젠더가 살해됐고, 그중 대다수는 흑인이거나 라틴계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트랜스젠더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 지도자’도 언급했다. 페이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헬스케어를 불법화하고, 우리의 존재할 권리를 부인하는 정치지도자들과, 거대한 플랫폼에서 트랜스 커뮤니티를 향해 적대감을 쏟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손에 피를 묻히고 있다. 당신은 성인의 40%가 자살시도를 하는 트랜스 커뮤니티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페이지는 자신 역시 트랜스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그 일원으로서 ‘연대’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바로 그들 중 한 명이며, 우리는 당신의 공격 앞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