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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목소리, 들 3] 내과에서 남자 의사는 말했다 “낳을거지?”

등록 2020-12-09 17:57수정 2020-12-09 18:11

벌벌 떨며 괴로워하고 두려워했던 날
어떤 마음으로 싸우는지 죽어도 모른다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열었다. 사진 한국여성민우회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열었다. 사진 한국여성민우회

▶바로가기 : 낙태죄 폐지 특별페이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지난 10월15일 한국여성민우회는 ‘낙태죄 전면폐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를 열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헌법불합치하다고 결정했는데도,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이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시민들이 모여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날 6시간15분의 이어 말하기에는 60여명의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직접 나서 또는 영상으로 또는 편지로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말했습니다. <한겨레>는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 건강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낙태죄 폐지’ 페이지에 이어 싣습니다.

자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 목소리 3 : 그만

임신중지 경험을 나누는 모임 신청서를 다운받아 며칠을 고민하고 망설이다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필리버스터 소식을 보고도 망설이고 고민하다, 지금이 아니면 이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한 채 낙태죄가 존치되어 또 오랜 시간 가슴의 응어리로 묻어둘 것 같아 용기를 내봅니다.

저는 두 번의 낙태 경험이 있습니다. 늘 그렇듯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부정출혈이 있었기에, 대수롭잖게 예정일을 넘겼고, 위가 너무 안 좋으니 내시경이라도 받아볼까 하고 엄마를 데리고 간 내과에서 전혀 뜻밖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저를 보며 "낳을거지? 낙태하면 처벌받아. 엄마한테는 얘기할거지?"하는 남자 의사에게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그대로 진료실을 뛰쳐나와 “소화제 먹으면 된대”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엄마 손을 잡아끌고 병원을 나섰습니다. 애정은 식었지만 저와 콘돔도 쓰지 않고 주기적으로 성관계는 하고 싶어하던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린 그 날 저녁, 돈을 마련해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다분히 회피하고 싶어하는 태도에 얘가 잠수를 타면 나는 어디서 돈을 구해 어디서 수술을 받아야하나 막막하던 그 날 저녁, 혼자 가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불안하고 두렵고 죽고 싶던 그날 저녁, 희한하게도 찐감자와 인삼차가 미치게 먹고싶었습니다. 내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이 어처구니없는 식욕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마침 연락 온 친한 언니에게 수제비를 얻어먹으면서 언니한테 털어놓고 싶다 수백번을 생각했지만 저는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12주라고 했습니다. 소화가 좀 안되고 찐감자랑 인삼차가 먹고싶었던 것 외에 특별한 증상이랄 게 없는 상태였는데 그랬어요. 14주는 정말 말도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남자친구에게 다시 또 콘돔없는 성관계를 요구받았고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고 전신마취가 완전히 되기 전에 시술이 끝났습니다. 더럽고 좁고 불친절했던 그 병원에서 '한 번 더 낙태하면 임신 못해요'라는 말을 듣고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발기가 되지 않는다며 피임의 책임을 저에게 떠넘겼고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저는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자궁경부암 직전 단계까지 진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자궁경부원추절제술을 받고 나서 뒤늦게 연락이 닿은 그 남자는, 네가 나 때문에 다시 임신을 할 수 없게 될까봐 겁이 났다고 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건 내 몸인데 아무도 내 몸을 염려해주지 않았고 내 임신을 걱정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된 저는 질책하고 경멸하고 비난하더군요.

낙태가 죄가 되지 않아도,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였다는 두려움, 후회, 자책을 모두 벗겨내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싸워야할지 알 수 없는데 낙태죄를 존치하겠다니요. 누구도 제가 보낸 그 끔찍한 고립의 순간을 다시 겪게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낙태죄 폐지는 겨우 떼는 첫 걸음일 뿐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그런 위험과 고립 속에 혼자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어떤 순간을 지나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지 당신들은 죽어도 알 수 없습니다.

동지들의 손을 단단히 잡고 외칩니다.

지금 당장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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