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한, 사람을 오래도록 깊은 병이 들게 하는 고통에는 자주 이름이 없다. 그것은 속수무책이고, 불현듯 사람의 마음으로 쳐들어온다. 이정표가 없는 장소처럼, 다시 돌아가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가장 정확하게 사람의 현재를 괴롭힌다.
몇 년 전 여름, 무턱대고 공항을 향한 적이 있었다. 대체로 집에 있기를 좋아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은둔하는 편이라는 얘길 듣는 내게, 외출은 각오와 다짐을 수반하고 여행은 두려움의 터널을 오래 지나야 결심이 서는 일이다. 그런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공항이었다. 바람막이 한 벌과 보조 배터리, 당시 읽던 책만 욱여넣은 단출한 짐을 들고서. 부끄럽게도, 외국에 가려면 여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렇다면 제주도였다. 여권 없이,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곳.
제주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48시간 빌리고 나자 계획 없이 지출한 비행기 표와 렌트 비용이 아쉬웠다. 금방이라도 외국으로 떠날 것처럼 굴던 내가 고작 한 시간 정도 비행을 하고 나니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서울로 돌아가기엔 이미 지불한 객기의 값이 아까웠다.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장소와 순간들. 그때의 나는 그런 일들이 괴로워 혼자 앓고 있었다. 그런 일들을 괴로워하며 사는 내가 한심하고 괴로워 더욱 앓았다.
제주 도심은 아무래도 서울을 닮아 있었고, 익숙한 풍경을 지우려고 아무 길이나 택해 차를 몰았다. ‘해변도로’라는 이정표를 따라 조금 달리자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검은 해변이 나왔다. 내비게이션 안내 없이 운전을 하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잠깐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막막했다. 안내가 없으니 불안했다. 운전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삶의 모든 방향에서 내비게이션을 찾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지속적인 실패. 삶을 전부 망가뜨리는 실패. 잠든 이의 그림자를 밟고 슬며시 다가오는 도둑 같은 그런 실패. 지금 다시 생각하면, 내가 그런 실패를 완전히 경험한 적은 없다. 아마 삶의 어느 순간에 그런 실패가 있었다고 해도, 나는 그 이후를 살았고 여전히 살고 있으므로, 끝내 완벽하게 끝나버리는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시기에 무슨 일이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망상에 가까운 불안함을 껴입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다 보니 어쩐지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듯한 해변에 도착했다. 주변에 카페나 식당도 보이지 않고 철거 중인 창고들이 어두운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도로가 거기서 끝났고 다시 유턴해서 돌아나가야 했지만, 멀리서부터 보랏빛으로 젖어오는 저녁 하늘과 얕은 절벽이 보이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시동을 끄고 모든 창문을 내렸다. 남서쪽으로 꽤 내려온 것 같은데, 그 작은 해변의 정확한 이름은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 망가지는 이유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경우도 있겠다. 언젠가 정신분석학 학자들이 인간의 스트레스 반응 순위를 정리한 도표를 본 적이 있다. 서양과 국내의 통계 세부항목은 조금 달랐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의 죽음이 상위권이었다. 이혼, 해고, 이사, 신체 이상 등 스트레스 요인이 문화와 인종이 다르다고 해서 별반 차이점은 없었다. 결국 사람이 정신적인 우울과 슬픔을 겪는 요인은 크게 나눠 실연과 실업이다. 자신이 속하고 연결되어 있던 관계와 직무와 장소를 잃어버릴 때, 사람은 아프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나는 되려 가장 평온한 순간에 얼굴에 비치는 그늘 같은 것이 쌓이고 쌓여서 사람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행은 그 예감만으로도 생활의 모서리를 깨뜨린다. 저녁 식사에서 밝게 웃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이가 그날 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얘기는 이제 너무 흔하다. 차라리 아픔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표현하며 극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어딘가 조금씩 아프고, 보이지 않게 무너져 있는 것 같다. 스스로도 아픔의 원인을 알 수 없을 때도 있고 이전에 일어났던 고통의 부스러기가 마음의 습기를 먹고 더욱 자랄 때도 있다. 자신에게 무감각해져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때도 있다. 아는 한, 사람을 오래도록 깊은 병이 들게 하는 고통에는 자주 이름이 없다. 그것은 속수무책이고, 불현듯 사람의 마음으로 쳐들어온다. 이정표가 없는 장소처럼, 다시 돌아가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가장 정확하게 사람의 현재를 괴롭힌다.
눈을 떴을 때는 새카만 밤이 깔려 있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벌레가 들어왔는지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차 안에서 시트를 젖힌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숙소를 잡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그것도 그렇고, 꽤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도 와서 두드려보는 사람도 없는 그 외진 장소에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조금 무서운 생각에 나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중문관광단지로 차를 몰았다. 그날은 공영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몰래 잤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을 데워 먹었다.
카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해도 거울 속 몰골은 영 씻은 태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제 충동적으로 제주에 올 때까지만 해도, 상한 마음에 이제껏 해보지 않았던 모든 일을 다 저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하룻밤을 불편하게 지내고 나니 마음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서툴고 막막해졌을 뿐이었다. 차를 빌렸지만, 제주도 어느 곳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바닷바람은 옷과 몸을 끈적거리게 만들어서 싫었다. 내비게이션으로 1139번 도로를 찍고 출발했다. 한라산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도로 중 가장 높은 곳까지 차로 갈 수 있는 도로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1139번 도로는 한라산 상부에 다다를수록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나는 그 사정을 모르고, 단순히 지도에서 산봉우리에 가장 근접한 도로를 골라 향하고 있었다. 도로가 능선을 올라타자 이차선으로 좁아지고 굴곡이 큰 커브가 자주 나왔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한적했고, 키가 높은 침엽수들이 만든 숲이 도로의 양옆으로 펼쳐졌다. 햇볕이 깨운 흙과 식물의 냄새가 코와 눈을 씻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뒤, 투명하고 맑았던 시야가 1미터 앞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뿌옇게 막혀버렸다. 순식간에 짙은 안개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만큼 내 몸의 모든 감각이 곤두섰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차선도 사라지고, 최대한 상향시킨 전조등 불빛은 흡사 흰 벽에 비춘 손전등 불빛처럼 안개를 더욱 공포스럽게 했다. 대낮이었는데도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쉽게 차를 멈출 수도,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함부로 세웠다가 내 차의 비상등을 보지 못한 차량과 충돌할지도 몰랐다. 영화 〈미스트〉가 떠올랐다. 가드레일을 따라 박힌 노란색 반사체가 가까스로 내는 작은 빛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안개 속을 얼마나 걸려 빠져나왔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안개가 약간 헐거워지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자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30여분이 지나있었을 뿐인데, 마치 두세 시간은 족히 달려온 것 같았다. 안개 속에선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내리막으로 접어든 길 위에서 멀리 보이는 건 여전히 안개뿐이었다. 나는 왜 지금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 온당하지 못한 일을 벌이고, 온당치 못한 대가를 받고 있는 걸까.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의 햇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름다웠다. 세상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길을 잘못 접어든 걸까. 이 날씨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휴대폰 알람이 울리고, 지금 어디냐고 묻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게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답장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내가 불현듯 서울을 떠나 제주까지 와서 안개 속에 갇혀 있는 줄은 모르겠지. 아니, 내가 이렇게 멀리 와 있는 줄은. 그럴 줄은 몰랐겠지.
아무리 쉬어도 안개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에 올라 브레이크를 풀었다. 안개를 지나려면, 안개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때의 기억은 가드레일 불빛에 의존해서 아주 천천히, 핸들에 양손을 꽉 붙이고 오래도록 차를 몰았던 기억이 전부다. 능선을 내려와 고도가 낮은 지대로 접어들자 안개는 다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쯤 되자 내가 안개에 갇혀 있었던 게 무언가에 홀렸던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차를 다시 세우고 내려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지독한 안개의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도망쳐서 지금 여기에 와 있을까.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일과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문자메시지에 다시 집으로 갈게, 라고 답장을 했다. 배가 고팠다. 아니, 배보다 더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허기였다. 나는 내비게이션에 공항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차를 몰았다. 단 하루였지만 내게는 너무 긴 일탈이었다. 지나가려면, 돌아가야 했다. 서울. 공평하지 않은 사람의 도시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끝.
최현우(시인)
※그동안 ‘오늘의 날씨’를 사랑해주신 독자님과,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최현우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