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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그래도 여전히 괜찮습니다

등록 2021-06-03 04:59수정 2021-06-03 10:1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일을 감행하거나 중단할 때마다 나의 이유는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였다. 생활을 지킨다는 건 생명과 활동을 돌보는 일. 그것이 결국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선한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부터 거실 창문에서 빗물이 샌다. 창틀과 천장이 맞닿은 이음새 부분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바깥에서 내리는지 집 안에서 내리는지 모를 만큼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벽의 물기를 훔치고 바닥에 수건을 깔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오래된 집의 창틀을 바깥에서 특수 실리콘으로 감싸는 외벽 코킹이라는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맑은 날에나 작업이 가능할 것이므로, 결국 당분간 창문을 닫아도 비가 내리는 실내를 살게 될 터였다.

창문을 굳게 닫으면 바람과 빗물과 소음으로부터 실내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 창문이라는 믿음. 그 사소한 믿음이 무너졌다. 집주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 재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집은 주변의 다른 집보다 저렴하게 구했는데, 여러모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설마 나를 민폐 끼치는 세입자로 몰면서 수리를 거부하지는 않을까.

겨우 5월의 끄트머리인데도 한여름의 장마처럼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

그날 면접관의 질문들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상당히 곤혹스러운 질문들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눈빛 가득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대체 왜 내 시간을 당신에게 축내고 있어야 하지?’라는 듯한 냉기를 가진 면접관에게 서둘러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래도 당당하고 여유롭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쿨한 뒷모습을 남기고 싶었는데, 그만 아주 대차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의자 팔걸이에 입술을 부딪쳤고 앞니 쪽에서 비린 맛이 났다. 면접실 바깥 사무 공간에서 직원 몇 명이 놀란 눈으로 뛰쳐 들어왔고, 면접관은 서둘러 뛰어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진짜 괜찮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정말 도망치듯이 엘리베이터까지 달려와 1층에서 올라오는 느려터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어떤 직원이 나를 쫓아왔다. 가방! 가방 놓고 가셨어요!

스물일곱의 여름, 정말이지 나는 요절하고 싶었다. 정말 진지하게 이번 생을 여기서 마감하는 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고상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인생을 통틀어 죽고 싶었던 순간이 딱 세 번인데, 그중 한번이 저 순간이다.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시린 앞니를 핥으며 눈물이 찔끔 났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버스가 타고 싶었다.

구직활동이라는 게 나만의 특별한 난제는 아닐 것이고, 누구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일일 테다. 이 고난과 역경에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들이 동지이자 적으로 함께하고 있고, 말마따나 개국 이래 역대 최고라는 청년실업 사회에서 가장 인정받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닌가. 그러니 스스로 괜찮아, 처음이 아니니까 괜찮아, 하다가도 문득, 넓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이 막연해서 서럽고 외롭고 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 자리에서 느낀 감정은 일종의 모멸감이었는데, 그렇다고 면접관이 인신공격을 하거나 수치심을 유도하는 악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진단에 내가 반박을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나의 바보스러움이 부끄러웠고, 내가 살아온 일말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고작 부끄러운 처지라는 게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움이 순간 내 두 발을 엉클어트리고 만 것이다.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이동하기 전에 근처 공원에 있는 간이 화장실에 들렀다. 아무래도 몰골이 삭막할 것 같았다. 물로 입을 헹구고 뱉자 세면대에 진한 핏물이 쏟아졌다. 그 핏물이 캄캄한 구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가 조금 전 들었던 면접관의 질문이 기억났다. 시인이라면서요?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여기 왜 왔어요?

대체 그 면접관은 내가 적지도 않은 이력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날 오후의 일정은 대학로에서 시 낭독회였다. 여러 시인들이 함께 관객을 모시고 자신들의 시를 읽고 관객 질문에 답을 했다. 당연하게도, 다른 시인의 낭독 차례에서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혀끝으로 앞니를 더듬고 있었다. 흔들리는 거 같은데. 아직 잇몸에서 피가 나고 있을까 봐 말을 할 때 입술을 최대한 오므리고 발음하느라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시인들이 시를 낭독할 때, 관객들은 눈을 감거나 주어진 소책자를 음미하며 조용한 품위를 지켰다.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면 그제야 다른 이의 낭독이 끝난 것을 알고 침을 꿀꺽 삼켰다.

관객이 내게 질문했다. 나는 당시 참여했던 시인 중에 가장 어렸고, 내게 질문을 한 관객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젊은 나이에 시인이 되셨는데, 어떻게 시인이 될 생각을 하셨어요? 시인의 삶은 어떤가요? 시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보통 이런 질문은 단순하고 짧은 호기심에서 비롯하지만, 짐짓 겸연쩍은 척하면서 멋있게 무게 잡으며 대답할 수 있는 부류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가진다는 건 그것을 선망하여 삶의 가장 앞쪽에 둔다는 것일 텐데, 그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그곳에 도착하거나 목적을 완수하고 난 다음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고난도의 블록쌓기처럼, 쌓을수록 위태로워지는 게 내가 아는 삶의 전부였다. 여기서 어떻게? 조금 더? 언제까지?

그분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사실 저는 아까 어떤 회사의 사무직 자리를 지원했다가요, 면접을 망치고 심지어 망신스럽게 대자로 뻗어 넘어졌어요, 생활비가 모자라거든요, 아무튼 저는 내일 눈을 뜨자마자 당장 치과에 가서 비싼 돈을 내지 않으면 앞니가 빠져버릴지도 몰라요!’라고 대답할까 망설였으나, 그날의 시 낭독회는 너무나 오붓하고 아름다워서 영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간신히 버벅거리면서 했던 대답은 고작 생활이었다. 제가… 그러니까… 생활을 해야 해요. 생활이요.

엉뚱한 대답이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회자가 서둘러 마이크를 넘겼다.

*

이후로 어떤 일을 감행하거나 중단할 때마다 나의 이유는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였다. 생활을 지킨다는 건 생명과 활동을 돌보는 일. 그것이 결국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선한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지속 가능한 어떤 성취에서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중간에 선로를 바꾸어 알 수 없는 경유지에 도착하더라도, 그 어느 때라도 우리는 각자 생활이라는 그릇에 영혼의 밥을 담는다. 누군가의 생명과 그 활동에 관심을 두고, 시간과 마음을 떼어 나눠 먹는다. 생활을 나눈다.

여전히 서투르지만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건, 괜찮다는 말을 정말 괜찮아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엉망인 하루와 한 달과 일 년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생활이 끝내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항하는 최선이자 최후의 용기라는 것.

흥건한 벽과 바닥을 연신 닦으며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집주인의 번호로 사진과 영상을 보냈다. 부디 고쳐주세요. 맑은 날에 서두르겠다는 답을 받았다. 나무로 된 창가의 움푹 팬 부분으로 물이 가득 고였다. 창문이 가진 오래된 상처인 줄 알았는데, 창문은 연못을 닮은 아주 작은 웅덩이를 키우고 싶었나 보다. 흠뻑 젖은 수건들을 모아 세탁기에 돌렸다. 내일도 또다시 비가 온다고, 일기예보가 있었다. 최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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